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7 45.6%
[수도회]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에제 18,23)
조회수 | 2,092
작성일 | 10.03.17
사순절 막바지에 접어듭니다. 계속 루카복음을 따라오다가 오늘은 요한복음으로 바뀝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특징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이 많기에 오늘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가 마치 루카복음의 이야기같이 느껴지면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멋지게 위기를 극복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때는 초막절 축제기간입니다.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과 예루살렘 성전 뜰 사이에서 움직이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올리브 동산은 예수께서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피땀 흘리며 받아들일 장소요, 성전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장소입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벌써부터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살벌한 분위기. 그러나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여전히 성전에 가셔서 가르치십니다. 초막절은 빛의 축일이기도 했기에 예수님은 이른 아침 뜨는 태양처럼 참된 빛으로 성전에 오셔서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 나타나시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합니다. 간음한 여자를 현장에서 잡아다가 모든 이들 앞에 보란 듯이 내세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묻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8,5ㄴ) “어떤 남자가 자기 이웃의 아내와 간통하면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10)고 율법은 말합니다. 그런데 왜 여자만 붙들어 왔을까요? 이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께 재판에 대한 공정성이나 의견을 묻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들의 악의와 성차별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당하게 재판하지 않고 사형으로 몰고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스승님’이란 호칭 또한 마음으로 부르는 소리가 아닙니다. “스승이라고 불리우는 당신, 왜 빨리 대답을 못하시나?”라고 하고 싶었겠지요.

그 상황에서 그 여인을 살리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게 되고, 법대로 죽이라고 하면 평소에 사랑과 용서를 설교하시던 모습과 다르게 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예수님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 듯합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궁지에 몰린 것처럼 빨리 대답하지 않으니 그들은 신이 나서 더 재촉합니다. 두 사람 다 죽음으로 몰고 갈 승리의 시간이 목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몸을 구부리고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을까요? 이 행동의 의미는 분명치 않지만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라는 구절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니면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는 말씀을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여도 내 심판은 유효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나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함께 심판하시기 때문이다”(요한 8,15­-16)라고 하신 분입니다. 그들 모두를 올려보아야 하는 낮은 위치를 취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신중하고 겸손한 모습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7ㄴ).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 한 말씀에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장면입니다. ‘아기를 반으로 잘라서 각 어머니에게 나눠주라고 한’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이 여기 계십니다. 지혜서는 말합니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7,22ㄴ-23).

예수께서는 기존의 관습과 제도와 법률에 대한 생각을 뒤엎어 버리시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십니다. 그러나 율법을 없애려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명을 주는 데 이바지해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며 율법 완성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고개 숙여 땅바닥에 뭔가 쓰십니다. 재촉하는 그들과 여유를 두시는 예수님은 아주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궁지로 몰고 갔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십니다. 당신이 판단하시지 않으십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던 율법교사가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깨닫게 하셨고, 자캐오가 남을 속인 것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셨듯이 그들에게도, 여인에게도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십니다. 그들은 나이 많은 이부터 차례로 떠나갑니다.

예수님은 승-승의 길을 이루는 분입니다. 군중도 여인도 예수도 그 누구도 진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도 자신의 진실을 대면했으니 진 것이 아닙니다만 이 대면이 지속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은 진정한 내면의 ‘승자’로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예수님을 붙잡아 단죄함으로써 ‘패자’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나도 네 죄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8,11). 여인에게도 이제부터 진정한 ‘승자’의 삶을 살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의 순서를 보면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러면 나도 네 죄를 단죄하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단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먼저입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조건 없는 용서를 보여주신 아버지처럼 예수님도 조건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여인의 죄를 묵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지은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이에게 새롭게 살 수 있는 길을 터주심으로써 악을 이기십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447 45.6%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오늘 말씀에서 우리 구원을 위한 당신 자비를 깨닫도록 마음을 이끌어 주십시오.

독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답하시기 전과 후에 두 차례나 ‘몸을 구부리고’ 땅 위에 무엇인가 쓰십니다.(6.?8절)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을 길게 늘어놓기 좋아하는 요한이 이 부분에서 침묵을 지키니, 예수님이 쓰신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6ㄱ절에서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찾기 위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생각을 물었다고 친절하게 해설하는 요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예수님의 상징적 행위 자체에 담긴 어떤 의미를 우리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땅 위’?에 쓰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어로 ‘땅(gh/)’?은 사람이 사는 땅이나 지역, 세상, 나아가 땅 위에 사는 사람들, 말씀의 씨앗을 받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인간의 마음을 상징합니다.(마르 4,?5.?8.?26.?28) ‘땅 위에 쓰신’ 행위는 예수님을 인간의 ‘마음 안에’ 새로운 율법을 쓰시는 분, 사람들의 마음 자체를 회개시키는 분으로 드러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예수님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보다 더 뛰어난 분임을 보여주려고 마련된 요한 이야기의 세부사항일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는 말씀 후에 다시 몸을 굽히고 무엇인가 쓰시는 중에(8절) 모든 사람이 ‘하나씩’ 떠나갑니다. 이 표현은 여인과 예수님만이 남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그분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 안에 깊이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침묵을 지키며 구부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몸을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하느님 영광의 빛나는 광채를 보게 되어 마음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예수님이 언제 허리를 펴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주 늦은 시간, 예루살렘 성전 대리석 벽이 지는 태양 때문에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는 저녁 무렵이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햇살을 받으면 어떤 이는 갑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바라보고 회개 체험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보는 데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편안하게 주저앉은 것도 아니고, 한참 동안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가”?(마르 1,?7 참조) 허리를 다시 폈을 때,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피곤에 지친 예수님이 혼자 남은 간음한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십니다. 우물가에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셨듯이?(요한 4,1???42) 오랜 시간 앉지도 못하고 “가운데에 그대로 서있던”?(9절) 여인에게 예수님은 잘살라는 윤리적 훈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녀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권고합니다. 늘 먼저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복음서의 전형적인 예수님 모습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이 본문 앞에서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7,?37)고 외치자 사람들은 그분의 정체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음 본문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라고 말씀하시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스스로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니 유효하지 않다고 반발합니다. 전후 문맥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복음이 예수님을 생명의 샘물이요 세상을 비추는 분이시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보다 모세 율법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분이심을 알려주기 위해 여기에 배치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그분의 인간적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ㄷ) 나아가 요한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라고 증언하는(요한 1,?1???2) 예수님이 ‘사람들 사이에서’ 하신 일은 ‘하느님의 감추어진 얼굴’?을 드러내는 것임을 오늘 본문은 보여줍니다.

성찰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해 ‘매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 듯이 보이는 삶이 사실은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걸어야 할 삶의 핵심에서 얼마나 벗어나는 것인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가 겪은 이 그리스도 체험을 소개합니다.(필리 3,?8???14)

기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시편 126,?3)

▶ 성바오로회 임숙희 수녀
  | 03.20
447 45.6%
끔찍한 세월

안개가 심하던 새벽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던 한 젊은이가 추돌사고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후유증이 컸습니다. 하반신을 못쓰게 되었고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야만 했습니다.

워낙 자존심이 강했던 젊은이는 자신의 처지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싫었습니다. 그 누구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시 암담했던 자신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글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 한잔을 마시려고 휠체어를 밀어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물을 따르던 나는 실수로 유리컵을 놓쳐버렸다.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들을 바라보던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 유리 조각들은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어버리고 회색빛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내 신세와 어찌 그리도 똑같은가?>"

그렇게 끔찍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월이 약이겠거니" 하고 견뎌왔지만 마음 같지 않았습니다. 당장 죽을 것만 같은 깊은 슬픔에, 도저히 못견딜 것 같은 심연의 고통에 젊은이는 가까운 성당을 찾았습니다.

젊은이는 힘겹게 휠체어를 밀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대성당 한 가운데 통로를 거쳐 십자가상 바로 아래까지 도착했습니다. 올려다보니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고통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이런 말씀을 하시는 듯 했답니다.

"애야, 힘 내거라. 네 십자가도 무겁겠지만 내 십자가는 더 무겁단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 고통스런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뒤쪽 배경은 은은한 빛깔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성당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색조가 마침내 젊은이 마음에 와 닿던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과 함께 이런 생각이 밀려왔답니다.

"그래! 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도 결국은 유리를 조각내어 만든 작품이 아닌가? 그렇다면 산산조각 나버린 내 인생으로도 아름다운 작품 하나 정도 만들 수도 있겠지? 그래, 충분히 방황했으니 이제 다시 한번 일어서야겠어."

하느님께서는 가끔씩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치시고 우리를 바닥에까지 끌어내리십니다. 용광로같이 뜨거운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재창조하십니다. 우리를 일으켜세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지혜의 말씀 한마디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온 한 여인을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세우십니다. 그 오랜 질곡의 세월에서 해방시키십니다. 그 여인은 갈 데까지 갔던 여인이었습니다. 더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던 여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십니다. 그녀를 일으켜세우십니다. 그녀에게 새 인생을 되찾아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복음서 전체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이라는 예수님 사명을 구체화시키는 하나의 장(場)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예수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여인의 삶을 묵상합니다. 여인 안에 자리잡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그 여인이나 저나 크게 다를 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여인 못지않게 밥 먹듯이 많은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아마도 인간이란 존재는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그래서 평생 자유롭지 못한 존재인가 봅니다. 늘 돌아보면 돌아볼 때마다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부끄럽다, 창피하다" 면서 살아서만은 안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젊은 시절, 미성숙함으로 그어졌던 우리 인생의 빨간 줄을 지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한 순간 판단착오로 저질렀던 초대형 과실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 보시기에 인간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상처 때문이리라 확신합니다. 허물이 있기에, 부끄러운 과거가 있기에, 그로 인해 괴로워하기에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여정에 상처는 필수입니다. 상처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존경하는 정호승 시인의 말씀처럼 "상처없는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진주도 상처가 있고, 꽃잎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장미꽃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상처 때문입니다."

남태평양 어느 섬에서는 톱이나 도끼 같은 것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나무를 쓰러뜨리는 전통적인 비방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나무에다 대고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하는 방법이라고 하네요. 새벽마다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나무를 둘러싸고 큰소리로 욕을 해대면 한달쯤 가선 그 큰 나무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어서 쓰러진다고 합니다.

물론 제가 보지 못한 일이니까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치로 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심히 던지는 말 한 마디에도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데, 하물며 마음을 모아 온 동네 사람들이 큰소리로 질러대는 그 욕과 험담에서 나무가 무슨 재주로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도 욕이나 험담을 들으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되지요.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이 ‘말’입니다. 특히 험담이나 거친 말들은 한번 시작되면 주변의 사람들마저 자기도 모르게 같은 방향으로 끌고 가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욕과 험담을 듣다보면 내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험담의 대상을 점점 나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단죄할 정도로 깨끗할까요? 자기 자신은 되돌아보지 않으면서 남에 대해서만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기심이 얼마나 많았던 지요.

오늘 복음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간음하다 들킨 여자였지요. 이 여자를 데리고 오는 그들은 아주 의기양양합니다. 왜냐하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만 했거든요. 즉, 그들은 마땅히 제거해야 할 사람을 한 명 잡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도 이에 동조합니다. 하지만 이 모습에서도 또 하나의 추악함이 드러납니다.

사실 간음했다는 것은 혼자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간음한 여자뿐만 아니라 그 여자와 간음한 남자도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이 율법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자만을 데리고 오지요. 여자만 있다는 것은 결국 간음했다는 죄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간음했다는 말 한 마디만을 듣고서 죽어 없애버려야할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재판관의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던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고를 내릴 권리가 있다고 자부하던 그들이 이제 재판관의 처지에서 피고의 처지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죄 지은 사람이 도망가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예수님과 그 여인의 곁을 떠납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에게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는지요?

혹시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스스로 아무런 죄도 없다는 착각, 그래서 사람을 단죄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도 단죄하지 않는데, 우리가 나의 이웃을 감히 단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죄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십시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3.20
447 45.6%
누구에게나 독특한 버릇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버릇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은 너무나 유명한 ‘간음하다 잡힌 여자’입니다. 사람들이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뭔가를 쓰기 시작하십니다. 이 장면이 매우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도 책을 읽다가 지루하고 따분해지면 글자의 빈 공간을 칠하거나 책 여백에 낙서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당신의 한 말씀에 걸려 있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한가하게 낙서나 하고 계시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렇지만 그 여유로운 모습은 사람들의 두 가지 마음, 곧 바라는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조바심과 돌을 던지려 했던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힌 것 같습니다.

주변이 조용해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8,7) 하시고 다시 땅바닥에 뭔가를 쓰십니다. 당신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든 관심 없다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어떤 도전과 위기가 와도 끄떡없는 예수님은 두려움의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 남은 여자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8,11)고 하십니다. 여자는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바닥에서, 어떻게 가려 볼 도리가 없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고 말씀하십니다.

여자는 예수님 앞으로 끌려올 때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생명과 삶을 얻고서 떠납니다. 그 생명과 삶을 지키고 키우는 것을 숙제로 받은 여자는 매 순간 예수님과의 만남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오늘날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여자만 남고 사람들은 떠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떠나는 이유가 모두 돌을 주으러 가기 위해서랍니다. 웃자고 지어 낸 이야기겠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졌다는 말 같아 씁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여자를 끌고 왔던 사람들도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세등등하게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왔던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떠나면서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자신에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누가 봐도 죄인인 여자조차 단죄할 수 없을 만큼 내 죄가 많았다니!’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웃에게 돌을 던졌던 것이 죄에 죄를 더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겠지요.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이 돌이 되고 그것이 가슴에 박혀 숨쉬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돌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이사 43,19)시는 분께서 그들 안에서 하실 새 일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변화’ 입니다. 그것은 내 안의 광야에 길이, 내 안의 사막에 강이 생긴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산을 무너뜨리고 골짜기를 메우는 작업이며, 메마른 땅에 물이 고이게 하는 것이므로 금방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중단 없이 계속해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사순 시기 동안 가장 많이 언급되는 ‘회개’입니다.

▶ 박미예 수녀
  | 03.21
447 45.6%
[수도회] 다른 사람을 함부러
단죄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우리는 누구나 죄를 짓고 살면서도 누가 더 큰 죄를 지었는지 도토리 키재기를 하며 다른 사람을 단죄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흥분하고 분노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죄를 더 감추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비로이 용서받기를 바라듯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주고 용서해주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똑같은 죄인이며 동시에 사랑스런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은 죄인인 당신 자녀들을 보지 않으시고 서로 용서하고 아파하는 사랑스런 자녀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기쁘게 살지 못하게 만드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실 따릅니다.

그렇지만 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겠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고 다른 사람을 함부러 단죄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오늘 간음한 여인과 함께 모든 죄를 용서받은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이제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새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뜻을 잘 받들어 기쁘게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5
447 45.6%
[수도회] 나든 남이든 단죄하지 마라!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하신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세 말씀에 사람들은 다르게 방점을 찍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죄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느님의 용서에, 어떤 사람은 가라는 하느님의 풀어주심, 곧 해방에, 어떤 사람은 죄짓지 말라는 하느님의 준엄한 명령에., 그런데 저는 오늘 <가거라.>에 방점을 찍겠습니다. 제가 프란치스칸이기에 가라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도 없지 않지만 오늘 사순 제 5 주일 메시지가 <가거라.>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순 제 5주의 메시지는 과거에 죄를 참 많이 지었는데 앞으로는 죄 짓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순 5 주일의 가라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죄녀에게 가라고 하셨는데 어디로 가라시는 겁니까?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까? 당신을 떠나가라는 것입니까? 설혹 주님은 당신을 떠나가라고 풀어주신 거라고 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떠나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겠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라는 것은 우선 과거를 떠나 미래로 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바오로 사도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떠나지 못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미래지향적이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마련해 놓고 그리로 오라하셔도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좋아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좋아서, 그 초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기에 거의 모든 죄는 다 미래지향적인지 않은 죄입니다. 그러나 미래지향적이지 않는 것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지향적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안주적입니다. 꿀단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안주적이라면 죄책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과거지향적입니다.

그런데 꿀단지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죄책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지요. 보통 좋은 것은 놓기 힘들고 싫은 것은 버리기가 쉽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죄책감은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죄인, 곧 죄의 사람으로 단죄하기 때문입니다.

단죄란 과거의 죄 때문에 자신을 죄의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죄녀를 단죄하지 않으신 것처럼 자신이든 남이든 단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이지 죄의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번 죄를 지었다고 계속 죄를 지으라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과거의 죄를 주홍글씨처럼 영원히 달고 다닐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에 머물러 있을 죄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마련하신 하늘나라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는 것은 하늘로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에로 나아가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그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늘로 가는 것이 그저 이 세상으로부터 염세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을 살며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모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며 그 가는 길이 비록 힘들더라도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고, 설사 많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작은 김찬선(레오나르도)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5
447 45.6%
[수도회] 사람에게 시험을 당하시는 주님.

사람들에게 위대하고 모든 일에 완전하게 보여 인기를 끄시는 주님을 시험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주님을 곤경에 넘어지도록 모세법을 앞세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놓고 주님의 판단을 시험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하였지만 기본이 되어 있는 주님을 슬기롭게 해결하였습니다.

너희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진하라고 이르신 것과 같이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현장에서 일어나는 지혜로운 관찰력으로 어려운 시험에 100% 해결을 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도 손상하지 않고 사람에 대한 애증도 손상하지 않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한 곳에 집중하여 기우러지면 중심을 잃고 마음의 상처와 몸에 병이 듭니다. 하느님은 법과 사랑을 함께 어울러 조화 있게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몇일전 명동성당에 갔을 때 정문 앞에 한 사람이 이런 피겟 들고 “ 염 추가경은 즉각 그 자리에서 사퇴 하라” 무응답이 해결책의 한방법이지만 대화의 길을 서로 찾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주님이 율법학자들의 시험을 나 몰라 말할 수 없어 하였으면 주님은 사랑 받는 분으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멋진 행동과 말씀 인간의 보편적 죄와 죄목을 적으면서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해당하는 내용을 보고 한 사람씩 물러난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 이 여인을 돌로 쳐라.” 우리는 가끔 자기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며 자기 죄를 희석시키려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누구 한 사람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주일 다른 사람의 회두를 권장하기 전 자기 죄를 가지고 회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현장 교육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죄인인 것을 고백하며 여인처럼 죄의 용서를 받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아멘.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5
447 45.6%
[수도회] 자비의 선물, 자비의 환대, 자비의 체험

저에게 자비하신 주님은 봄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 써놓은 시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봄님과 함께
봄이 되어

봄꿈을 꾸며
봄길을 걷는다

이 기쁨
이 행복 누가 알리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자비의 선물이며, 하느님의 참 좋은 환대가 자비의 환대이며, 하느님의 참 좋은 체험이 자비의 체험입니다. 자비의 희년을 지내는 교회의 요즘 화두도 단연 자비입니다. 하느님 체험은 바로 자비의 체험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니라 너그럽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음도 하느님의 자비덕분입니다. 우리의 평생 유일한 과제가 있다면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하나뿐입니다. 가장 멀리 있는 분같으나 가장 가까이 있는, 나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 자비로운 하느님이십니다.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선물을 주시고자 자비의 미사잔치에 우리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환대 시간이며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신 하느님의 얼굴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하여 사람 마음 깊이에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자비로운 얼굴을 찾으라 있는 사람의 얼굴이요 눈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면 보고 싶어하는 얼굴이듯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이렇게 주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싶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얼굴과 얼굴이 서로 만날 때 진정한 만남입니다. 전례의 궁극목적도 바로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보다 존엄한 품위의 사람이 되는데 중요한 수행은 없습니다. 물질주의가 금전만능주의가 현세주의가 만연된 세상일수록 초월적 차원의 인간의 가치는 날로 중요해질 수뿐이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영혼이 살기위해 생명의 하느님을 찾아야 될 때요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성서는 온통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 이들의 고백 이야기입니다. 진정 사람의 내적 변화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도 주님과의 만남이 주제입니다.

주님과 만나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제도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 여기입니다. 간음하다 사로잡혀 주님 앞에 있는 여인이나, 예수님과 여인을 에워싸고 있는 군중들 모두는 오늘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죄인인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바리사이들나 율법학자들, 그리고 군중들이 자비로운 사람들이었다면 무자비하게 불쌍한 여인을 사지에 몰아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지에 눈먼 이들이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참 좋은 사례입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참 진퇴양난의 질문입니다. 이들에게 결정적으로 결핍된 것은 자비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중에 마냥 땅에 무엇을 쓰십니다. 분명 하느님의 지혜를 청하는 침묵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자비는 지혜입니다. 침묵의 지혜입니다. 자비의 침묵에서 샘솟는 천상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찬연히 빛나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그대로 하느님 자비의 얼굴입니다. 오늘 복음도 지난 주 ‘잃었다 찾은 아들의 비유’처럼 현장감 넘치는 감동적인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결정적 승리를 상징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아마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의 군중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자비심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일방적 승리가 아닌 예수님도 살고 군중도 살고 간음하다 잡히 여인도 모두 사는 하느님 자비의 승리입니다. ‘무지의 눈’이 열려 죄인으로서의 자기를 발견한 이들은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무죄한 주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마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여자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각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진정 주님을 만난 이들은 과거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합니다. 하느님 역시 회개한 이들의 과거는 묻지 않고 오늘 지금 여기만 보십니다.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언제나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과거로부터의 해방이요, 내적변화와 치유요, 평화와 기쁨의 선물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주님을 만나지 못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유혹중의 유혹이 과거 서로의 잘못을 추궁함으로 끊임없는 악순환의 어둠 중에 살게하는 유혹입니다. 그러니 이미 하느님이 용서하신 지난 일들은 절대 캐내지 말고 정말 천근의 무게로 자기를 지긋이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만약 이랬다면 좋았을 걸’ 하며 후회하는 일도 부질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쨌든 하느님은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바오로의 고백 역시 감동적입니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가, 예수님과의 깊은 우정이 저절로 과거로부터 이탈하여 초연한 자유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저절로 분별의 지혜가 되어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들을 갈라냅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영원히 살아남아있는 것은 예수님과의 우정 하나뿐이요, 주님께 갈 때도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주님과의 우정 하나뿐입니다.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날 때 과거로부터의 해방이요 활짝 열리는 미래입니다. 미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하는 이들 순전한 착각입니다. 하느님이 진정 우리의 미래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유일한 말이 절망이요, 절망보다 큰 죄도 없습니다. 성서의 사람들, 모두가 희망과 비전,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만이 이들의 희망이요 비전이요 꿈이었습니다. 이사야도 바오로도 하느님이 그들의 미래이자 꿈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비전의 사람,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마음의 광야에 ‘생명의 길’을 내고, 내 마음의 사막에 ‘사랑의 강’을 내어 미래를 활짝 열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 말씀입니다. 바오로 역시 주님을 만났기에 하느님 미래를 향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입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바로 바오로 삶의 방향과 삶의 목표가 하느님이심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끊임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자비하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의 인생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라.”(시편126,5-6).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5
447 45.6%
[수도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8, 11)

봄꽃을 만나고 맞이하기 위해 겨울을 떠나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아야 할 한 사람한 사람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가장 맑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죄를 짓는 삶이란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의 모습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모두 죄인임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의 죄를 묻는 사람들은 넘쳐나지만 서로 사랑할 사람으로 있기에는 모두 불편합니다. 죄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단죄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갑니다. '예수님처럼 서로를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순 시기는 무엇보다도 흙으로 빚어진 우리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한 여인을 다시 살린 부활의 힘은 다름 아닌 용서입니다. 용서의 기쁨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실천하는 은총가득한 주님의 날 되십시오. 용서의 시작은 우리 모두가 죄 많은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단죄의 돌을 내려놓고 사랑이 필요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19   [의정부] 꿈나무, 땔 나무  [3] 2361
718   [군종] 고통과 역경을 통한 진정한 부활 신앙  [2] 1969
717   [수원] 진실과 증거  [5] 2212
716   [안동]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4] 2626
715   [부산]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5] 2263
714   [마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4] 2340
713   [대구] 우리도 함께 가겠소  [4] 2235
712   [인천] 부활은 새로운 시작  [3] 2236
711   [서울]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4] 2683
710   [대전] 우리 곁에 살아계신 주님  [1] 1975
709   [청주] 주님과 함께라면  [1] 138
708   [춘천] 말씀에 귀 기울여라  [2] 2272
707   [원주] 일상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100
706   [광주] 증거하는 삶  2180
705   [전주] 일어나시오.  [2] 106
704   (백) 부활 제3주일 독서와 복음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2] 1913
703   [수도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1] 2159
702   [수원] 이성(理性)을 초월한 신앙  [3] 2212
701   [춘천] 백견(百見)이 불여일신(不如一信)!  [3] 2299
700   [의정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 2125
699   [인천] 사람을 믿어도 행복한데 주님을 믿으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2] 2182
698   [대전]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477
697   [서울]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4] 2117
696   [안동] 문제가 없으면 그게 문제  [2] 1980
695   [부산]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3] 2186
694   [대구] 공동체를 지켜라  487
693   [마산]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4] 2165
692   [전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품으로 달려갑시다.  [1] 2091
691   [광주] 평화가 너희와 함께!  98
690   [군종] 우리의 의심과 불신앙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  2024
689   [청주] 자상한, 친절한, 자비의 예수님  [1] 95
688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독서와 복음  [2] 1627
687   [수도회] '착해빠져' 탈인 사람  [2] 1972
686   [인천] 무언의 가르침  [2] 1995
685   [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6] 1971
684   [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2] 2043
683   [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5] 2115
682   [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3] 1641
681   [군종] 이 세상에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2] 1901
680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69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