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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십자가는 하느님 정의와 자비의 만남
조회수 | 1,912
작성일 | 10.03.20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교서‘제삼천년기’에서 “모든 희년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에 기초한 기쁨, 회개의 기쁨입니다”(32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를 회개의 기쁨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들킨 여인을 이용하여 예수님과 한 판 승부를 벌이고자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고자 한 여인의 수치심 따위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요한 8,4)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에는 그들의 이중적인 계략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그여인을‘돌로쳐라’하신다면은 사형권한이 없는 유대인으로서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자비’는 위선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돌려보내라’고 하신다면은 모세법을 어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경우에나 그들의 술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 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의 지혜로움으로 이 난관을 넘어서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7)

죄 있는 자는 그 누구도 함부로 이웃을 판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정의와 자비’의 완전한 조화를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들부터 돌멩이를 떨어뜨리고서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의를 무시하고 자비만을 이 여인에게 드러내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죄 값을 치룰 것입니다. 즉, 그녀를 대신해서 단죄를 받으실 것이기 때문에 이 여인을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서 석판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깨어진 석판위에 당신의 피를 뿌림으로써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당신께서 이루실 미래의 결과를 이 여인에게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맙시다.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깨닫게 됩니다. 우리 죄 값을 대신한 주님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의 절묘한 만남입니다. 용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은총의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대가를 치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의 해방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8,36) 용서를 통하여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이 시기에 만납시다. 아멘.

대구대교구 손무진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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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오늘 복음의 내용을 들으면서 단순하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하려던 이야기, 이에 예수님께서는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고 멋진 지혜로 그 사람들을 물리치신 이야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문장에로 마음이 모아집니다. :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있었다.”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와의 만남, 모두가 떠나간 뒤의 이 고요한 만남이 가슴을 울립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자기 자신을 옥죄는 수치스러움에서의 벗어남 때문만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을 것 같았고,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그끔찍한 시간과 상황 속에서 예수님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 계셨습니다. 아니, 예수님만은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고요한 만남과 사랑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아끼셨습니다. 사람들이 여자를 고발하며 대답하기를 재촉할 때까지 어떤 말씀도 하지 않고 몸을 굽히시고 땅에 무엇인 가만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말씀만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에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자만이 남았습니다.

이렇듯 마지막까지 말씀을 아끼신 예수님의 그 침묵과 행동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을까 하는 묵상을 해보게 됩니다. 그분의 기다림이 아닐까, 어떡해서든 사랑으로 끝까지 품어 안고자 하시는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인내의 기다림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져옵니다.

이런 가슴 뭉클한 감동은 여자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속에서 다시 한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 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물음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신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단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과 용서를 가져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그분의 참 사랑 속에 머무르는 삶을 살도록 해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 음의 신비에 동참하는 이 은총의 사순시기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무한한 사랑과 인내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순시기가 은총의 때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대구대교구 이광호 신부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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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복음은 가르치고 계시는 예수님과 그 가르침을 듣고 있는 온 백성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가르치는 이와 가르침을 받는 이의 긴밀한 관계는 또 다른 등장인물, 곧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때문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는 일은 모세의 율법에 대해 공부하고 그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는 역할은 예수님에게 덫을 놓아 그분이 ‘실수하게끔 ’ 하는 것이었다.(6절) 그들의 의도는 율법의 수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파멸을 위해 율법을 이용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한 여인을 자신들의 계략의 도구로 내세웠다.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었다. 유다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만큼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여인이었다.(레위 20,10; 신명 22,21-24) 여인이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죽음이라는 벌이 여인에게 주어질 것이고, 여기에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예수님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신다. 그 대신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셨다. 예수님은 율법에 의한 징벌이라는 장면에서 땅바닥이라는 새로운 장면으로 공간적 변화를 이끌어 내신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몸을 일으키신 후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 내신다. 여인의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율법을 이용해서 당신께 질문을 던진 이들의 죄를 들추어 내신다.(요한 8,7) 그리고 나선 다시 몸을 굽히셔서 또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신다. 위아래로 반복되는 예수님의 움직임은 여인의 죄를 탓하는 데서 율법을 도구 삼아 예수님을 시험하려했던 이들의 죄로 옮겨가는 움직임이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을까?’ 많은 이들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 어떤 답도 명쾌하게 제시되지 못했다. 율법을 통해 누군가를 제물로 희생시키고자 하는 이들의 논리는 율법조차 이용할 수 있는 거만함의 윗자리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는 것이다. 땅바닥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움직임은 그 윗자리를 자꾸만 아래로 끌어내리는 듯하다.

율법이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입으로는 되뇌면서 정작 자신의 뜻을 대변하고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 인식하고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뜻 위에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교만한 이들임에는 틀림없다. 교만은 원죄의 뿌리와 같다.(창세 2-3장 참조)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 이 세상에 원죄를 불러들였고 그 원죄가 죽음을 가져왔다. 죄의 곁에는 늘 죽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수없이 듣고 보았다. 죄를 묻기 시작하면, 그 끝이 죽음으로 향한다는 자명한 논리를 예수님은 다르게 해석하신다. 죄 있는 자는 죽어야 할 자가 아니라 다시는 죄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자임을 분명히 하신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단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죄를 떠나 살아가도록 부르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율법으로 남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모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묵상(Meditatio)

가끔씩 친구들과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 제일 재밌는 것이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남을 칭찬하거나 두둔하는 이야기라면 듣고 말하기가 참 수월할 텐데, 대부분 헐뜯거나 비난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니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엔 괜한 이야기 했다며 후회하기 일쑤다. 한편 남에 대한 비판은 타당하기도 하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옷이 없듯이 잘잘못을 꼼꼼히 따지면 대부분 허물이 들추어지기 마련이고, 그 허물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잘못을 가지고 사람 자체가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문제가 있으니 너는 늘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살라는 식으로 헐뜯고 비난하기를 재미삼아 하는 우리라면, 예수님은 우리한테 뭐라 하실까.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나는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다짐했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좋은 점을 찾아 나서는 데서 그 다짐을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리 하셨기 때문이다.

기도(Oratio)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시편 8,5)

대구대교구 박병규 신부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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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사랑하지 않고는 안다고 말하지 말라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유고집 『거룩한 경청』 127쪽에 나오는 말씀을 한 줄로 요약해보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허물까지도 덮어집니다. 그가 가진 허물을 개의치 않게 됩니다. 일흔, 일곱 번의 용서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가운데 왜 갈등, 분열, 다툼, 증오, 미움, 공격, 음해, 모함이 있을까요? 사랑이,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하기 전에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 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그분의 이 말씀으로 이제 결백하고 고결한 사람, 죄 없는 사람, 격정과 육욕이 없고 거룩하고 완벽하고 선한 사람, 의롭고 신심 깊은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까지 모두 하느님 법정에 불려나온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거룩하고 고결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차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슬그머니 돌을 내려놓습니다. 그분이 계속해서 땅 바닥에 글을 쓰고 계시는 동안 모두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분은 돌을 든 사람들에게 그 돌을 던지지 않아도 되는 명분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현명한 방법을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차츰 알아차렸습니다. ‘암, 나는 거룩하지! 그런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안되고말고!’ 라며 발길을 돌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이미 어느 정도 단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쾌한 아침 햇살이 눈부신 가운데 이토록 밝은 날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시던 중 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한 쪽이 웅성거리더니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여인이 돌을 든 남자들 손에 무지막지하게 끌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부끄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수치심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평화가 깨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가련한 여인을 보는 그분의 눈길에 연민이 가득합니다. 그 여인을 예수님께서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분이 그 가녀린 얼굴 과 배, 혹은 가슴과 등을 겨냥해서 무자비하게 돌을 던지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었을까요? 우 리도 차마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없이 단 둘만 남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여인에 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어떤 것에도 메이지 않고 기쁘고 자유롭게 갈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날 아침 너무나 밝은 햇살에 차마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 없었던 한 여인의 그 “많은 죄를 용서받은”(루카 7,47) 기쁨이 우리에게까지 전 해집니다.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기에, 우리가 얼마나 죄에 잘 넘어가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더 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의 여인을 통해 우리도 조 금 알 것 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멘.

▦ 대구대교구 김상조 대건 안드레아 신부 : 2016년 3월 13일
  |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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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용서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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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를 손가락질합니다. 남을 단죄하고, 흉보거나 비난할 때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은 하나만 남을 가리키고 있고, 세 개의 손가락은 나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남을 향한 모자란 사랑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가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여러 가지 부족한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머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단죄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자리를 떠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나이가 많다고 죄가 많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은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입니다. 우리는 단죄나 처벌을 내릴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 또한 용서받고 사랑으로 새로 태어나야 할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으로 초대해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십니다.

남에게 향해 있는 손가락보다 내게로 향해 있는 손가락이 더 많습니다. 입술로만 살지 않고 마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내가 들고 있는 돌멩이를 내려놓고 사랑으로, 말씀으로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사순 시기에 특별히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돌려 놓아야할 것입니다.

용서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삶에 은총이 충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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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흥수 실바노 신부 : 2019년 4월 7일
  |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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