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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조회수 | 1,707
작성일 | 10.03.26
오늘은 성지주일로 교회의 일 년간 전례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인 성주간을 시작하게 됩니다. 옛날 잿빛 가슴새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이런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언젠지 모르지만 우리 잿빛 가슴새 중에 영롱한 붉은빛 가슴을 가진 새가 나타나리라, 그때가 되면 어둠침침한 잿빛은 사라지고 모두 붉은색 가슴을 가진 새들이 되리라┘ 어느날 꼬마 새들이 하늘을 날았습니다. 그런데 언덕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웬 젊은이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어깨에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채찍을 맞으며 언덕을 오르더니,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꼬마 새들 중 한 마리가 저 젊은이가 너무 고통스럽겠다고 생각한 끝에 쏜살같이 내려가 있는 힘을 다해 작은 주둥이로 그의 손에 박힌 못을 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젊은이 머리에 박힌 가시를 주둥이로 빼기 시작했습니다. 간신히 가시를 다 뽑아내자, 가시를 뽑을 때마다 터져 나온 청년의 선혈로 잿빛 가슴은 영롱한 붉은 빛 가슴새가 되어있었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고 오늘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계십니다.

왜 하필 하고 많은 죽음 중에 십자가의 어리석은 죽음을 택하셨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믿음과 진리와 사랑 이 모든 것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믿음이든 진리이든 사랑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는 넘을수록 험하고 내는 건널수록 깊다는 말씀처럼 오늘 성지주일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수난의 시기로 들어갑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동반자는 고통, 번민, 고뇌입니다. 고뇌와 번민이 어디에서 옵니까? 어둡고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악에서 옵니다. 악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규명이 되지 않으므로 악은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어둡고 파괴적인 악은 없애 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끌어안음으로써만 해결 될 수 있는 것이기에 십자가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잘라냄보다 끌어안음이 훨씬 더 아프고 힘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둡고 미숙하고 불완전한 모든 면을 받아들이고 변화될 때까지기다릴 수 있는 힘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옵니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지혜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 박덕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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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금의 나의 자리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사순 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나름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결심했던 회개의 생활을 지금껏 잘 실천해 오셨는지요? 그렇지 못했다면, 이번 한 주간 다시 마음을 다잡아 봅시다. 성주간의 전례가 우리의 결심에 다시 힘을 실어줄 것입니다. 고난 받는 예수님, 너무나 무기력한 메시아의 모습에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당혹스럽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도 예수님께 열광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군중들처럼 말이지요.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예수님 안에서 체험하고, 예수님과 평생 함께 살겠노라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의 십자가 앞에 도망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말이지요. 수난복음에서 들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 주변에 있는 여러 사람들 중 수난복음에서 들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 주변에 있는 여러 사람들 중 하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저주하는 군중들 가운데, 예수님을 없애버리려는 백성의 지도자들 가운데 나의 자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넘긴 유다나, 스승을 외면하고 십자가 앞에 도망쳐 버린 제자들 가운데 나의 자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에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모습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비겁하게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허락한 빌라도, 예수를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들, 그들 가운데 나의 자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온 몸으로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나의 자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사랑받던 제자 요한이 나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눈물 흘리며 마음 아파하던 예루살렘의 여인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땀을 닦아주던 베로니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진 착한 키레네 사람 시몬의 모습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갖가지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아갑니다. 성주간에 만나는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을 당신의 십자가 가까이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통에 함께 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번 성주간에는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당신의 것으로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오랫동안 주님 곁에 머무르며 하느님의 큰 사랑의 품 안에 잠겨보면 어떨까요?

▦ 대구대교구 이호봉 베드로 신부 : 2016년 3월 20일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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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호산나 (Hos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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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가 절정을 이루는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오늘 전례를 통해 우리는 두 개의 복음을 듣게 됩니다. 하나는 미사 전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때, 또 하나는 미사 중 ‘수난복음’입니다. 이 두 복음은 분위기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호산나”를 외치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옷을 벗어 길에 깔기도 하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저주와 광란의 분위기로 반전되며 십자가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돌변하는 인간의 처사가 너무나 ‘우매하다’라는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아를 정치적, 현실적으로 해방시켜 줄 분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당신 친히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이를 통해 영원한 삶에로 인도해 주시고자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신 분이십니다. 크고 힘센 군마(軍馬)를 타신 것도 아니고 작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으로‘참 평화’를 암시해 주시고 또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기억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속담처럼, 겉옷과 올리브 빨마 가지를 길에 깔아놓고 흔들며 “호산나(구원해 주옵소서)”를 외치며 환호하던 사람들이 그리 쉽게 구세주를 십자가의 죄인으로 몰아가는 인정 없고 폭력적인 무리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수난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십자가의 죽음에 일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과거사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마태26,15) ; 밀고, 배신, 청부살인, 인간이 사는 곳에 늘 함께 있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마태 26,35); 신앙 때문에 어떤 손해나 불이익이 생긴다면 언제나 등 돌릴 수 있는 우리들의 속내를 보는 것은 아닌지?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 ; 깊은 철학, 신앙의 진리, 정의와 양심을 뒤로하고 구호에 따라 덩달아 춤추는 군중들의 모습은 우리와 무관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어떤 이의 참된 모습을 잘 모르면서도 선입견이나 남의 말에 단죄해 버리기 일쑤인 우리들의 삶 말입니다.

-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마태 27,24) ; 예수님의 죄 없음을 알고도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여라.”하며 십자가에 매달게 내버려 두는 작태는 과연 오늘날에는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진실 왜곡과 양심부재는 - “내 양심은 내 생애 어떤 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욥 27,6)라고 말할 수 있는지 공정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도 “호산나(구원해 주옵소서)”를 외치고 있으며, 회개와 나눔을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이 실천과 결실 없는 빈 말에만 그친다면 ‘예수 사건(Christevent)’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 빨마 가지를 손에 들고 구세주를 환영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인류의 죄악을 속죄하시고, 무한하신 사랑으로 죄를 용서하심을 깨닫도록 합시다. 또한 이 성주간에 얼룩진 영혼의 허물들을 벗고, 작은 결점들을 고치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의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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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상락 바오로 신부 : 2019년 4월 14일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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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영원을 품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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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연초에 담근 장독이 하나 깨졌다. 함께 사는 가족의 부주의로 깨진 것이다. 곧 간장이 될 메주 우러난 소금물은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무른 메주는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미안해하는 가족의 마음을 달랠 궁리를 하다 엄마의 장독이 생각났다. 엄마가 평생 품다 남기고 떠난 빈 장독을 차에 싣고 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달리는데 장독 속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참, 평화롭구나.”

그 진한 사랑의 향기와 함께 가슴이 뭉클하고 기쁨이 샘솟으며, “아, 이게 부활의 기쁨이구나!”라는 깨달음은 ‘너무 좋은, 이미 충분히 행복한 인생’임을 되새겨주었다. 메주는 소금 녹인 물에 숙성된 콩의 맛을 듬뿍 주고, 소금 녹은 물은 메주에게 깊은 짠맛을 기꺼이 줄 때 비로소 무심한 독 안에서 세상을 품는 장맛이 생기는구나! 바로 그것을 우리의 부모가 평생 가르쳐 주셨고, 예수님은 이천 년이 넘게 부모와 사람들을 통해 그런 삶이 부활이라고 가르쳐주시는구나!

첫 번째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은 ‘찾아오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은 ‘신뢰하는 사랑’입니다. 세 번째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은 ‘그럼에도 사랑’입니다. ‘찾아와서(가서) 신뢰하며 그럼에도 사랑’은 내어줌과 용서와 품는 사랑으로 숙성되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맛을 냅니다.

부활은 찾아오는(가는) 사랑을 통해 주어지는 새 삶입니다. 부 활은 신뢰하는 사랑을 통해 주어지는 더 큰 삶입니다. 부활은 그럼에도 사랑을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삶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품고 오늘도 내일도 세상을 맛내며 힘내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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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형호 신부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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