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7 92%
[의정부] 잘 지내십니까
조회수 | 1,678
작성일 | 10.03.26
눈물샘을 자극하는 최루성 멜로 영화가 있습니다. 결국은 주인공의 이별이나 죽음으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졸입니다. 영화의 장면들은 계속해서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고 관객들은 그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잠시 맛보는 기쁨과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마음은 점점 더 아려옵니다. 결말은 결코 주인공이 꿈꾸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관객들의 슬픔을 충동질해 놓습니다.

결국 슬픔만 남게 되는 영화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찾아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슬픔을 만끽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슬픔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슬픔이 아닌 사랑 때문입니다. 슬픔은 사랑 때문에 찾아옵니다. 슬픔이 깊고 아픈 이유는 그만큼 사랑이 깊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슬픔에 잠기지만, 슬프기 때문에 더욱 깊고 진하고 맑은 사랑을 맛보고 싶은 것입니다. 슬픔은 사랑 때문에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예수님의 드라마는 비극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배신하는 제자, 조롱하고 매질하는 군사들, 신문하고 분노하는 종교지도자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군중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사랑 때문에 찾아옵니다. 사랑이 없다면 슬픔도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슬피 우는 베드로를 보십시오(루카 22,62).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인들을 보십시오(루카 23,27). 간절한 사랑이었기에 애끓는 슬픔은 그들을 피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모습을 보십시오. 메말라버린 눈과 식어버린 마음으로 무덤덤한 삶을 살고 있는, 슬픔 없는 내 모습을 보십시오. 슬픔 없는 삶이니 행복한 삶입니까? 슬픔만 없다면 사랑 따위 없어도 상관없는 삶입니까? 그러니 나는 잘 지내고 있는 것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슬픔 또한 은총이라 부를 수 있는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

의정부교구 김효준 신부
447 92%
[의정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찬미예수님!!!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독특하게 오늘은 두 개의 복음을 봉독하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에서, 다른 하나는 말씀 전례에서 수난 복음을 봉독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복음은 전혀 다른 상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두개의 복음을 행렬의 전과 후에 봉독하면서 우리의 삶이 바로 그 사이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과 나눠질 수 없는 두 개의 복음을 통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 성주간 전체를 알려주는 예고편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결코 영광의 순간을 위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기 위한 첫걸음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복음을 비교해 볼 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바로 군중의 태도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느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당신께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주간은 전례력이 가지는 의미들을 거론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 이 성주간만큼은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그분을 따라가서 바라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발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만나는 순간이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죽음 앞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주간을 가장 잘 지내는 방법이 됩니다. 성주간에 우리는 반드시 주님과 함께 죽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같이 두려움을 떨면서 우리의 모든 희망이 사라짐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온전하게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체험하는 순간이 됩니다. 아직 죽지 못하고 삶에 발버둥 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지혜로 바꾸어주시기를 청하며 성주간을 거룩하게 지내도록 합시다. 아멘.

▦ 의정부교구 문형균 클라로 신부 : 2016년 3월 20일
  | 03.18
447 92%
[의정부] 십자가를 잃으면 부활의 기쁨도 잃는다.

-----------------------------------------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시기는 예수님이 위대한 구원 사업을 이룩하신 때이며 교회전례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입니다. 성주간(聖週間)은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성주간 동안 우리는 또 다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고 기쁨의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의 길이 시작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른체 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께 등을 돌리며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을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주님을 등지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행렬에 동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길에서 그것이 뜻하는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이치와 달리, 주님의 용서는 증오하고 시기하며 단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당신의 희생적 사랑으로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주님이 사랑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식은 세상의 것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때는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사건이지만 그리스도 신앙인의 관점으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는 긍정적인 사건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으로 끝이 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님의 영광스러운 빛이 드러납니다. 죽음이라는 두렵고도 적막한 순간에 주님의 빛이 비로소 타오릅니다.

이는 우리 삶의 여정에서도 커다란 희망과 위로를 주는 사건입니다. 세상살이라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고통과 고난의 파도에 더 이상 숨쉬기도 어려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한다면 놀랍게도 주님 영광의 빛이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혼자서는 힘들지만 함께라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숭고한 용기를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수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이유가 나의 죄에 있고, 나에 대한 사랑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거룩하고 성대하게 거행되는 성주간의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 생의 마지막 한 주간에 깊이 동참하여 그리스도 부활의 축제를 큰 기쁨으로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

의정부교구 안종환 나보르 신부 : 2019년 4월 14일
  | 04.13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마산] 활동은 기도의 힘으로  [1]
!   [청주] 말씀은 신앙생활의 지도  [2]
!   [서울]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8]
!   [수도회]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2]
!   [수원] “그리스도인은 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말씀 속에서 살아야”  [4]
!   [인천] 나의 관심은 어디에?  [10]
!   [대구]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5]
731   [부산]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이야기  [6] 2661
730   [대전] ‘마르타의 손’에 ‘마리아의 마음’이 밀려선 안 된다.  463
729   [안동] “필요한 한 가지”  [2] 402
728   [춘천] 예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  2352
727   [원주] ‘정말 필요한 것’을 행하는 용기  [1] 53
726   [광주] 복 받는 길  [1] 2366
725   [전주]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  40
724   [의정부] 남과 똑같이…  [2] 2425
723   [군종] 좋은 몫  [2] 47
722   (녹) 연중 제16주일 독서와 복음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4] 1692
721   [서울] 보답을 바라지 않는 '풀코스 서비스'  [10] 2445
720   [인천] 새벽을 사는 사람  [9] 2431
719   [마산] 구원을 얻는 길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  [5] 2323
718   [안동]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가 10, 29)  [4] 2268
717   [부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5] 2721
716   [대구] 너희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라!  [4] 2280
715   [원주] "이웃을 의도적으로 바라보자"  [1] 2229
714   [수도회] 항구함, 충실성, 지속적인 신뢰  [3] 65
713   [광주]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자  37
712   [청주] 이웃이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1] 40
711   [수원] 착한 사마리아 사람 : 그리스도  [5] 2552
710   [의정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2] 42
709   [전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5] 2546
708   [춘천]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3] 57
707   [군종] 이웃 사랑은 두 팔로!  [3] 2382
706   [대전] "흘러가는 것과 흘러가지 않는 것"  [2] 75
705   (녹) 연중 제15주일 독서와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2] 1639
704   [대구] 농부이신 하느님의 마음  122
703   [마산] 참된 거처에로의 초대, 평화의 인사  115
702   [수도회] 그리스도의 평화  [6] 1828
701   [춘천]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110
700   [부산]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5] 2274
699   [의정부] 파견받아 떠나는 길에서  [1] 1553
1 [2][3][4][5][6][7][8][9][10]..[19]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