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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무언의 가르침
조회수 | 2,006
작성일 | 10.03.26
오늘 우리는 상반된 내용의 두 개의 복음을 읽게 된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복음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수난 복음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복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노래한다. 그리고 수난 복음에서는 많은 군중이 목청을 돋우며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쳐댄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리 높여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쳐대니 말이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이중적인 내면을 보게 된다. 이런 양극단의 모습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은 모순으로 뒤범벅이 된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 가실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야속하고 섭섭하다고 하실까? 아니면 야단을 치실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으신다. 예수님은 이중적인 우리에게 아무런 말씀도 없이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무언의 말씀으로 우리를 스스로 성찰하게 하신다.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해서 못 알아들을 일도 아니고, 깨닫지 못할 일도 아니다. 이미 우리는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무언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다. ‘敎育’(교육)(educatio, 라틴어)이란 말은 본디 ‘사람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것을 끌어내도록 돕는 일’이라고 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무언의 말씀으로 우리가 상실한 것을 회복하고,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에 주신 선물을 이끌어내도록 도와주신다. 예수님은 ‘죽이시오’하는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십자가의 길에서,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조차도 무언으로, 침묵으로 우리 내면에 호소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언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의 침묵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 내면을 성찰하여 상실한 인간성을 회복하고 우리 내면에 지니고 있는 것을 끌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 예수님의 수난이 절정에 다다른 성주간이다. 우리도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무언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우리가 상실하고 훼손시킨 인간성을 회복하고 이끌어 내는 한 주간이 되기 바란다. 모든 교우 여러분이 기쁨에 찬 부활을 맞이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한다.

▶ 김태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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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당신의 길을 걸어가세요.
하느님께서는 그 길을 좋아하십니다.

당신의 길을 걸어가세요. 두려워하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당신의 그 길을 걸어가세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길을 누구보다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을 떠올리세요.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다하고 열성을 다하여 십자가를 따르면 부활과 생명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인생길 한 편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환호에 찬 칭찬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칭찬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인생길 다른 편에는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저주에 찬 악담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악담 소리에 의기소침해지지 않으셨습니다.

진실로 칭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자신의 상속 재산이 하늘에 있음을 믿고 있기에 그의 믿음이 그를 하늘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참된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악담에 의기소침해지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그의 길을 축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얼마나 선한 사람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그 선택 안에 담겨 있는 당신의 선한 본성을 알고 계십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모를 수 있는 그 선한 본성을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세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길을 여전히 함께 걷고 계십니다.

“젊은이야,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코헬렛 11, 9ㄴ-10)
“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말 한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공동번역 전도서 12, 13)

▦ 인천교구 김태영 사도 요한 신부 : 2016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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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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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난 복음은 인류 구원사의 정점이며,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극치인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던 군중들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폭도들로 바뀝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의 올가미에 의해 법정에 서게 됩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법정에 서셨고, 인간이 하느님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법정의 판결은 ‘유죄’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가난한 이, 병자들, 죄인들. 그렇게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것이 ‘죄’, 그들을 사랑한 것이 ‘죄’, 진리를 함부로 얘기한 것이 ‘죄’, 바보같이 겸손한 것이 ‘죄’, 아픈 사람을 대가 없이낫게 해준 것이 ‘죄’, 하늘나라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죄’. 그리고 진짜 죄, 그분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죄’는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죄’입니다.

간교하고, 사악하고, 진리를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 사랑할 줄 모르고 교만에 사로잡힌 사람들, 권력에 눈이 멀고,재물에 온갖 정신이 팔려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죄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분은 매우 위험한 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된 그들에게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예수님은 세상에 의해, 십자기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 참조)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무엇이 그리 가엽고, 가련하게 느끼셨는지, 숨이 끊어지고 옆구리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바보’라고 얘기합니다. 인간들의 속셈을 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속고, 당하고, 교활한 인간들조차 내치지 못하는 ‘바보 하느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바보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아보고 싶어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제2, 제3의 그리스도로서 용기 있게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수난의 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로마 8,35) 진정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는 것은 그 어떤 외부의 환난이 아닌 우리 내부의 욕심입니다.

성주간은 예수님과 다시 한번 회개의 눈물로 만나는 시간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께 용기 있게 돌아가게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낸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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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성제현 루카 신부 : 2019년 4월 14일
  |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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