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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그리스도의 평화
조회수 | 1,860
작성일 | 10.07.03
제가 살고 있는 이곳 요셉수도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분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단순히 경치를 구경하러, 건물이 아름다워서, 수사님들이 좋아서, 강론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밖에도 많습니다.

그분들이 수도원을 찾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우리들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향기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향기가 점점 진하게 발산됩니다. 나 자신을 안팎으로 비워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평화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는 사제의 권고에 따라 서로 돌아보며 복음 말씀대로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그러나 평화를 비는 인사보다 더 좋은 것은 내 존재 자체가 평화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말없이 고요히 평화를 선사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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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수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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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길

수녀회 초창기 시절 창설자 신부님은 수녀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당신이 먼저 그 지역을 방문하셨다. 그런 후에 일정 지역을 선택해 수녀들을 둘씩 파견하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일일이 방문하게 하셨다.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여 실질적인 도움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라고 말씀하셨다.

새로운 사도직을 준비할 때도 신부님은 가정 방문을 통해 사람들의 현실을 파악하도록 하셨다. 회원들은 지역을 정한 다음 짝지어 각 가정을 방문했다. 1980년대에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과 부산 700여 곳의 산부인과를 방문하여 낙태 직전에 있는 고귀한 생명을 구했다.

신부님은 굶주리는 이들에게 수예품 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하셨고,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공민학교를 설립하시고 신문팔이나 폐지를 줍는 청년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셨다. 아파도 가난해서 병원에 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무료진료소와 자선병원을 설립하셨다. 회원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찾아 판잣집 마을 곳곳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1970년에 외국 은인들의 도움으로 지은 자선병원은 수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 이제 건물 수명이 다 되어 다시 지어야 하는 무거운 숙제가 남아 있지만 가난한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하신 창설자의 정신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예수께서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보내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감실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찾아 나서야 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를 주어야 합니다.”라는 창설자의 말씀이 오늘따라 새록새록 생각난다.

김경숙 수녀
  |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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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나그네

2세기 중엽 한 익명의 신앙인에 의해 쓰인 글귀는 ‘진정한 나그네’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은 참아 받습니다. 타향 땅이 고향 같고 고향이 다 타향과 같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란 사명을 제자들을 부여하고 나서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파견에 앞서 간단한 당부를 하시는데, 그 핵심이 어느 한 곳에 연연해하지 말고 ‘무심한 나그네’처럼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저희 수도자들을 보고 ‘부럽다’고 하십니다. 왜 부럽냐고 여쭈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수사님들은 세상 걱정 하나도 하지 않고, 매일 기도 속에 거룩하게 지내시고, 부양해야할 가족도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런 면도 없지 않으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수도생활, 적당히 기도나 하고, 적당히 봉사하고, 놀고먹는 그런 삶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연마해나가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자신과 투쟁해야 합니다. 같은 길을 걷는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 안에서 한없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때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머리 터지게 싸우기도 합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인해 정말 자존심 ‘팍’ 상하기도 하고, 엄청 속이 상해 욕이 입까지 치밀어 오를 때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부럽다, 얼마나 좋으냐?’는 말씀에 수긍이 갑니다.

때로 홀가분하게 모든 것 떨쳐버리고 홀연히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갈 기회가 가끔씩 주어지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세상살이 하는 분들, 어쩔 수 없이 잔뜩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그 ‘인연의 무게’에 대한 압박감이 조금은 덜하며, 그 대신에 더 깊이 또 다른 가치관을 추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본격적인 복음 선포에 매진하려는 제자들에게 세상 그 어느 것에로도 묶이지 말기를 당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무소유’,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버림’, ‘떠남’을 강조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보다 영원한 가치관, 보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대상, 그래서 한번 투신해볼 가치가 충분한 목적인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작고 부차적인 것을 포기하라는 말씀이겠지요.

다시금 덕지덕지 붙어있는 제 영혼의 군더더기들을 바라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영혼의 장애물들을 바라봅니다.

크신 하느님, 자유로우신 하느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저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또 다시 모든 것 훌훌 털어버리고, 홀로 떠나는 ‘무심한 나그네’를 꿈꿉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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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루가 10,1-12)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다. "가거라.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파견되어 가야할 곳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많은 사나운 것들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하셨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 양들을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 보내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는 것일까? 양들이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에서 살아남을 무기는 물질적인 돈 주머니나 여행 보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무기인가? 그것은 제자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이 그 무기이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필요한 무기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에게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 세상의 돈 주머니나 여행 보따리에 의존해 가지고서는 절대로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며 그것들에게서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것들에 의해 먹히고 갇히고 힘을 빼앗길 것이다. 복음을 전하려면 그런 것들에게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어디를 가나 먹을 수 있는 보따리 즉 예수님을 가지고 가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건물을 짓고 좋은 차를 가져야 하고 경제적으로 보장이 되어야 하고 안전한 거처지를 마련해야 하고 최신식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것들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어야 한다.

즉 복음은 어떤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복음화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아무리 좋은 매체를 가지고 있고 좋은 시설을 갖춘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람이 복음화 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화 되어있다면 그 사람이 어디에 가나 또 어느 도구를 사용하든 모든 것은 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복음은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나 신발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달려 있고 그 사람이 사나운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위험한 장소에 파견되었다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화 되어 있으면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우리의 가장 큰 취약점은 복음을 전하는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나 신발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복음화된 복음의 사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경씨의 "미래에서 온 편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병'이라는 메타포를 써서 표현하자면 '중독'과 '에이즈'의 세상이야. 이 지구화 과정을 일으키는 초국적 자본주의는 'BM2'로 인간 세상을 망치고 있지. 'BM2'는 이모가 만들어낸 Buiness, Money, Many, 즉 B.M.M 의 약자야. 세상을 큰 시장터로 만들고 온 땅을 비즈니스 게임터로 만드는 초국적 자본주의는 우리를 정신 없이 바쁜 사람들로 만들어 가고 있어. 모두 "바쁘다, 바뻐" 하고 아우성을 치지. 너무 바빠 자신과 가족, 이웃을 돌볼 시간이 없는, 정신 없고 분열된 개인을 만드는 것이 이 자본주의의 음모야. 정신 없는 인간을 지배하기는 참 쉬운 거니까. 그리고 이 정신 없는 개인들이 숭배하게끔 하는 신은 돈이지.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파하며 "돈교"에 입교시키는 거야. 그리고 뭐든지 많이많이 무한정 불려 나가야 해. 생산도 늘리고, 섹스도 더 진하게 많이 해야 하고, 차도 더 빨리 몰아야 하고, 뭐든지 더 많이, 더 진하게, 더 빨리 해지 않으면 실패고 퇴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것이 바로 중독의 과정이지. 중독된 사람은 그 중독을 야기시킨 대상 없이는 살 수 없게 돼. 그리고 중독의 정도를 더욱 더 심화시키다가 죽음까지 몰아가는 거야. '무엇 없이는 살 수 없다.' 라고 느낄 때, 우리는 이미 중독에 들어가 있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사회를 표현하는 메타포를 들자면, 그것은 '에이즈'야. 에이즈란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지. 우리의 면역체계는 몸 안에 균이 들어왔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세포가 아니라는 걸 발견하고 백혈구를 동원시켜 죽이게 되어 있어. 그렇게 해서 몸의 온전성을 지켜갈 수 있지. 그런데 에이즈에 걸리면, 다른 균이 들어와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세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낼 능력이 없어져 버려. 때문에 무엇이 들어오든 상태가 되고 결국은 이물질 세포에 잡아먹혀 죽게 되는 거지.

이것은 영적으로 말하자면 '거짓자아'가 '참자아'를 잡아먹는 병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고도로 이름답게 포장된 거짓자아들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지. 대중매체의 광고들은 많은 경우 이 거짓자아 바이러스로 현혹시키고 있어. 이걸 먹으면, 이걸 바르면, 이걸 입으면, 이걸 타면....이런 식의 미사여구로 말이야. 이걸 쫓아가다 보면 참자아를 찾기는커녕 잡아먹히게 되는 거지.

이 문화적인 중독과 후천성 면역 결핍증을 치료하는 기도와 명상법은 , 중단하기, 숨쉬기, 깊이 들여다보기야. 그래서 시커들은 도시를 떠나 숲으로 가고, 수도원에 들어가고, 동굴에 숨는 거야. 이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람의 수레바퀴에서 잠시 내리는 거지. 그리고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신의 목소리를 듣고, 존재로 충만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거야. 우선은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는 거야.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네 존재가 잔잔해질 때까지. 그런 다음 그 잔잔해진 영혼의 수면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바라보는 거지. 이것을 생활화하면 진짜 너의 삶을 살 수 있어.

이 가능성으로 임신한 침묵의 시간이 없다면, 그 홀로 있음의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위대한 창조도, 진정한 친밀함도 얻을 수 없어. 어떠한 큰 슬픔이나 고통도, 분노나 외로움도, 그리고 의미 없음도 기도와 명상에 의해 치유될 수 있지.

▶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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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주머니도”(루가 10, 1-12)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는 것은 그것도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돈주머니도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마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이다. 슈퍼 맨이라면 몰라도 아니면 요술 방맹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매일 복음 묵상을 해야하기 때문에 오늘 복음 묵상을 대강 끝내고 나면 곧 다음 날 복음을 읽는다. 그리고 말씀 중에서 느낌으로 와 닿는 한 말씀을 선택하여 그 말씀을 지니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하루 종일 내가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항상 내가 선택한 말씀을 지니고 살아가려고 한다. 길을 갈 때에도 말씀을 지니고 가고 일을 할 때에도 말씀을 지니고 한다. 늘 말씀을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어떤 책을 읽어도 아니면 광고물을 보아도 라디오를 들어도 텔레비젼을 보아도 항상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은 말씀이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한다.

따라서 나의 묵상은 어느 한 자리에 앉아서 묵상한 것이 아니라 오며 가며 보고 들은 것이 모두 내 묵상의 소재요 말씀 묵상의 연장이다. 책을 읽다가 내 묵상에 도움이 되는 글을 읽게 되면 그 글을 취하고, 또 묵상을 하다가 라디오에서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나 뉴스 또는 전해주는 소리 중에서 묵상과 관련이 되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들으면서 또 묵상한다. 나에게 있어서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나의 묵상의 재료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고 내 삶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하느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도 밤 하늘을 수놓은 별님과 달님도 아름다운 단풍도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작품이요, 하느님의 말씀이요, 하느님의 세계이다. 따라서 복음을 묵상하는 것이 꼭 어떤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성당에서만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어떤 말씀을 지니고 있느냐이다.

내 안에 아무 말씀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나는 무엇을 보든 무슨 소리를 듣든 다만 내가 듣고 보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내 안에 말씀을 지니고 있다면 단순히 외적으로 보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내 안에 있는 말씀과 연관시켜서 보고 듣게 되기 때문에 말씀에서 빛을 받아 보고 듣게 된다.

즉 말씀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이 내 밖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끝나버리지만 내 안에 말씀을 지니고 있으면 내가 밖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내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말씀에서부터 다시 보고 듣게 되니까 전혀 새로운 것을 보게 되고 듣게 되는 것이다.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식을 둔 부모는 늘 마음에 자식의 병을 지니고 산다. 따라서 어디에 가든 무엇을 보든 항상 자식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과 관련하여 듣고 보게 된다. 혹시 조금이라도 자식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용한 의사가 어디에 있다고 하면 아무리 멀어도 그 용한 의사를 찾아가고 무슨 약이 좋더라고 누가 이야기 하거나 라디에서 들으면 그 약을 구해 보려고 가진 애를 다 쓴다. 즉 부모는 자기를 위해서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나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고 죽어가고 있는 자식의 병을 지니고 다닌다.

내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느냐? 또는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사느냐? 에 따라서 각자 지니고 다니는 것은 다를 것이다. 시인은 늘 시적인 관점에서 보고 들을 것이며 작곡가는 늘 새로운 곡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골프광은 그린 필드를, 바둑 기사는 바둑판을, 이발사는 뒷통수만 볼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여행을 떠날 때 지니고 다니는 것은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아니라 각자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지니고 떠나는 법이다.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된 제자들의 관심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떠나야지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을 수 있을까? 무엇을 좀 더 챙길까? 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어디에 가든 어느 집에 들어가든 그 장소나 사람에 의해 자기의 사명이 흔들리거나 소홀해서는 안되고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 선포자가 지니고 다녀야 하는 것은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이 아니라 복음을 지니고 다니다가 어떤 장소나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가더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 선포자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그는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내가 유다인들을 대할 때에는 나 자신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실상은 하느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1고린 9,19-23)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한테 파견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항상 복음을 말해야하고 복음의 관점에서 보고 들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지니고 살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지고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일에 미사 참례하는 것, 아니면 아침 저녁 기도하는 것, 아니면 봉헌금이나 교무금을 내는 것, 아니면 세례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신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복음이 없는 텅 빈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과연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돈주머니나 여행보따리나 신발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 56-5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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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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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그을린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삶의 가장 충실한 모습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흐린 날도 맑은 날도 불안한 날도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욱 주님을 믿게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기때문입니다.

남을 제대로 보기위해서는 나를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름의 여정은 자기를 만나는 여정입니다.

하나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만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르는 것이 더많기 때문입니다.

알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때문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뛰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쁜소식을 전하기에 세상의 모든 집들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를 일꾼으로 데리고 떠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주님과 함께하면 됩니다.

미리 걱정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주님의 평화를 나누는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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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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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72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양들 같다고 하셨다. 이리와 양의 관계는 ‘싸움이라는 말이 허락되는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먹고 먹히는 관계’이다. 그런 곳으로 양들과 같은 제자들을 보내신다고 한다.

무슨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또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하신다.

이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세상의 악과 부딪히고 싸워야 할 상황이 주어졌을 때, 스스로의 힘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스스로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옳음을 위한 용기와 하느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시작도 과정도 끝도 기도가 절대적이다.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와 신발을 지니고 말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의 기준, 세상의 방법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옳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방법이 아닌 당신의 방법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만일 사목자가 자신의 얄팍한 능력이나 재주가 중심이 된 사목을 꿈꾸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패한다.

교만하지 말고 자신은 하느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겸손한 마음을 지니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길에서 아무에게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자신의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라는 말씀이다.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것인지를 알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악마는 교활하고 잔인하다. 그리고 똑똑하다. 쓰러뜨리려는데 주저함이 없고 폭력적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상대할 존재가 아니다.

양이 이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리보다 강한 힘이 양을 지켜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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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호수
  |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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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위협과 두려움, 그러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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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입시 경쟁에 지쳐있던 시절, 감당하기 어려운 소임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던 때, 총원에 들어와 책임을 맡고 있는 현재까지도, 이 책을 만난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언제나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싸우지 않아도 되고’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를 성경은 ‘평화’라고 표현합니다. 전쟁과 싸움은 무언가를 획득하고 소유하기 위해 발생하는데, 이미 충분히 흡족한 상태에 있어서 더 무엇을 소유할 필요도 꼭 이기려는 마음도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연중 제14주일의 본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평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문은 선교와 사목의 궁극적 목적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한 것임을 표명하고 있고, 제1독서에서는 버려져 황폐해졌던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드는 상황이 묘사되고 있으며, 제2독서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결과가 평화와 자비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 복음의 맥락

지난 3주간의 복음들은 마치 3부작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연중 제12주일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소개되었다면 제13주일에는 그 소개된 분을 따르라고 촉구한 바 있으며 제14주인 이번 주일에는 이 부르심의 목적이 ‘파견’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다만 오늘 복음의 특이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12사도의 파견이 아니라 72제자의 파견을 묘사한다는 점인데(루카복음서에만 등장) 이는 본문이 집필될 당시 이민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루카복음서는 이미 9장에 12사도의 파견을 서술한 적이 있고,(9,1-6) 이어서 10장에 72제자의 파견을 배치합니다.(10,1-12) 12사도의 파견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면 72제자의 파견은 전 세계를 향한 것이고 이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강조하려는 루카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 보내심

선교의 대상: 제자들의 파견은 “모든 고을과 고장”(루카 10,1)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는 매우 큰 시사점을 전해줍니다. 중세와 근대 그리스도교가 선교에 대하여 가졌던 인식은, 주로 사제와 수도자들을 먼 곳으로 보내어 그곳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다 본질적으로 깨닫게 되는데, 선교의 대상은 멀리 있는 변방의 국가들이 아니라 도시와 가까운 마을, 내 주변의 사람들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낸 바 있는 프랑스 교회는 선교를 명분으로 자행되었던 과거의 식민지 정책에서 돌아선다는 의미로, 프랑스야말로 우선적으로 선교되어야 할 땅임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복음화와 사목, 선교를 위한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은 나 자신과 우리 가정, 우리 주변인 것입니다.

선교의 방법

다음으로 본문은 진정한 사목과 선교가 적용해야 할 방법을 ‘수확’의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씨를 뿌리고 열매가 무르익기까지 키우고 보호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72제자는 그저 열매를 거두어들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교가 인간의 전략이나 치밀한 실행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주도하시고 구현하시는 사건임을 표명합니다. 그런데 이 ‘수확’을 위해 명심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3-4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변 보호와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가야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여유조차 없이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도직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므로, 인사하는 일에조차 깊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실 ‘사도’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는 ‘파견된 자’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사도직’은 ‘파견하신 분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도직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일을 지상에서 구현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개인적 성실과 열성으로 최선을 다한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와 열성에만 의지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 일’이지 ‘사도직’이 될 수 없습니다.

선교의 내용

전해야 할 가르침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9절) 왔음을 알리는 것이고 이 하느님 나라의 특징은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5절)라고 인사하라고 하시는데 이 인사는 ‘샬롬’이라는 전형적인 유다인들의 인사이며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평화는, 정치적 협상과 교섭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쟁 중지와는 구별됩니다.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이 주시는 사랑과 자비가 너무나 충만하고 흡족해서, 아무리 주변에서 싸움을 조장하고 딴지를 걸어 억울함과 불안, 분노를 유발시킨다하더라도 도무지 싸울 의지나 마음이 안 생기는 평정의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 예루살렘의 평화

복음화와 선교의 결과를 제1독서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구원신탁으로 제시합니다.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는 이들”(이사 66,10)에게 이제 구원된 기쁨의 상황이 ‘물’과 ‘모성’에 대한 은유로 선언되는데 “평화를 강물처럼, 평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인다는 표현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위로를 받으리라”(12-14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물’과 ‘어머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황폐해졌던 예루살렘에 이제 생명과 삶의 필수적 요소들이 공급됨으로써 평화와 구원의 도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하느님 백성의 평화

제2독서는 바오로의 선교 전략을 소개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자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갈라 6,14) 구원과 은총은 매일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역설을 강조하면서, 진정한 교회의 사목과 선교는 “새로운 창조물”로 사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15절) 할례는 하느님의 백성이 됨을 상징하는 전례적 행위였습니다. 이는 유다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분 짓고 남성을 여성과 구분 짓는 표식이었으나 이제 ‘새 창조’를 통해 하느님 백성이 됨은 더 이상 할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16절)라고 인사합니다. 새 창조의 열매는 하느님의 평화와 자비인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누구도 내편이 아니고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온전히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양심과 신념, 지켜내야 할 존엄과 열정, 용기와 지혜 같은 것들입니다. 돈주머니나 보따리, 신발도 없이 맨몸으로 낯선 땅을 통과해 가야하지만 그 위협과 두려움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온전한 동행에 집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평화야말로 세상과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궁극적이며 강력한 힘입니다. 누구도 뺏을 수 없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진정한 평화를 사는 것,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복음화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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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가톨릭신문 2019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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