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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조회수 | 1,504
작성일 | 13.11.10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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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느님 안에 삶과 죽음이 있습니다. 생사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라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소유할 수 없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함께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합니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가치롭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안에서 삶과 죽음을 맡겨 드리는 봉헌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침내 다시 우리 또한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입니다.

위령성월은 다시금 삶과 죽음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믿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죽음을 거쳐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 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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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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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루카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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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두가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부활의 유무에 대한 논쟁을 위해 준비된 질문을 던진다. 그 내용이 참 재미있고 슬프다. 형이 대를 잇지 못하고 죽게 되면 그 밑 동생이 형수와 함께 지내며 형의 대를 이어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전통이라는 이야기를 들추어가며, 말도 안 되지만 가능한 일곱 형제와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아이를 못 낳고 죽었을 때, 부활이 있다면, 그 여인의 남편은 누가 되느냐는 질문이다.

전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전통은 백 퍼센트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공감을 얻고 합의가 이루어지면 세월과 함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강제성마저 발휘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종교와 연결이 되면 더욱 큰 힘을 가지게 된다.

인간이 만든 전통을 하느님의 뜻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어왔던 규범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이 문화가 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들인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이슬람 국가들이 일부다처제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예다.

이러한 전통에는 늘 식별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복음을 삶의 기준으로 삶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복음은 사실 많은 전통들과 문화들과 충돌을 감수해야만 했다.

복음적 상식이나 기준은 추할 수가 없다. 식별을 할 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도덕성에 어긋나는 것은 결코 복음적 상식이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아름다운 전통은 복음과 통한다. 잘못된 전통이나 관습은 복음과 부딪힌다. 늘 복음적 상식으로 식별하려는 우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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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모두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우리는 영원한 삶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한 어떤 형태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영원한 삶을 살아갈 지는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어렸을 때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는 부분에서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육신의 부활이라면, 어떤 상태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죽기 전의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말인가?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모습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인가? 어린 아이로 죽으면 어린 아이로 부활하게 되는 것인가?

어린 아이 때의 의문이었지만, 이 답은 어른이 되어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우리의 상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부활에 대한 바람직한 믿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완벽한 선의 세계에서 완벽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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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 선교 수도회 김대열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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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부활, 큰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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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란 것, 인류 역사 안에서 전무후무한 것이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기에 그게 과연 내게 해당이나 되는 일이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이자 믿을 교리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교의 근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교회의 기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부활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최초로 영원히 풀리지 않았던 숙제였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삶 안에 적용시켜야할 부활 신앙입니다. 그로 인해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떠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힘든 순간이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했고 분노로 치가 떨렸습니다.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다보니 몸과 마음도 점점 병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게 마음먹고 내가 먼저 뒤로 물러났습니다. 내가 먼저 용서했습니다. 내가 먼저 자세를 낮췄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죽었습니다. 일종의 작은 죽음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죽기보다 지기 싫어 죽지 않았는데, 내가 죽으니 그때에 내가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여유가 생겼고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일상 안에서도 죽음을 통한 부활이 지속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에 부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우리네 일상 안에서 부활을 체험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 숨 쉬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때 우리가 죽어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순간입니다. 누군가와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우울과 낙담, 절망 속을 헤맬 때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져 죄 속에서 방황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만 찾을 때입니다. 그 순간은 어떤 면에서 목숨이 붙어있지만 죽어있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부활신앙이 꼭 필요할 때입니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남을 통해 가능합니다. 죄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설 때 가능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헤아릴 때 가능합니다. 죽기보다 힘든 용서지만 죽을 각오로 내가 먼저 용서할 때 가능합니다.

때로 완벽해 보이는 이승의 삶이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이승의 삶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맞이하게 될 또 다른 삶에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한낱 서곡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정과 평화 기쁨이 무척이나 커 보이지만 언젠가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맞보게 될 영원한 삶, 부활의 삶에 비교하면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자질구레한 우리들의 일상사 안에서도 작은 부활을 맛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 언젠가 또 다른 생을 맞이한 때 다가올 결정적인 부활에서도 제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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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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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죽음의 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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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아 지금 사는 것처럼 잠자고 일어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참으로 알 수 없는 상태인가? 아니면 허무하게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리는가? 세상의 인연이 계속될 것인가? 오늘 복음을 통해 현세에서 인연은 없는 것으로 단정하게 합니다. 저 세상에서는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윤회설을 따르지 않아도 “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할 것이다.” 나는 다시 태어 나도 사제로 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없습니다. 두 번 이 세상에 사는 이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일은 죽어야 할 운명에 놓인 사람들이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지금 살아서 어떻게 실천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람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마침입니다. 죽은 다음 세상에서 못 다한 것을 행하고 부족한 인연을 다시 이어지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사람은 “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죽은 사람은 세상과 완전한 단절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것 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에서 사라져 갑니다.

죽은 다음 부활의 삶을 살기위하여 살아서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며 그래서 죽은 다음 하느님 앞에 어떤 심판을 받게 될 가를 조심하며 이 세상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합니다. 어떤 이가 죽으면서 껄,껄,껄 하고 죽는 다고 합니다. 웃음이 아니라 좀 더 충실하게 살 껄, 좀 더 사랑하며 살 껄, 좀 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 껄, 그 외도 껄,껄,껄, 연속됩니다.

이는 사는 동안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한 후회의 말이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양심에 심어진 법을 따라 살고 살아있는 의미를 깨닫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모습을 따라 하느님을 사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여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임하시어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진, 선, 미로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 뒤에 삶이 어떤지를 생각하기 전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죽음 통해 각자가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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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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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부활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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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무아의 집 수녀원 피정집에서의 영적체험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제관 출입구 문을 열었을 때의 확트인 전망에 상쾌한 기분, 해방감입니다. 하여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도착한 다음날의 강론제목이었고, 11월 위령성월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 미사때도 이런 체험의 연장선상에서 ‘희망성월’이란 제목으로 강론을 했습니다.

위령성월은 음울하고 쓸쓸한 달이 아니라 희망으로 활짝 열린 희망 성월聖月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죽음의 문은 바로 천국의 문이며 죽음의 문, 천국의 문을 열었을 때 활짝 펼쳐지는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하여 저는 늘 죽음은 무無에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라 설명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 부활의 희망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 우리의 부활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입니다. 생명의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부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지금 여기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천국의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듯이 부활의 삶도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의 기쁨, 부활의 희망을 앞당겨 사는 복된 우리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요한복음의 주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부활의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부활의 기쁨을 노래한 화답송 후렴 시편은 얼마나 흥겹고 위로가 되었는지요. “주여 깨어나 당신을 뵈옴으로 내 흡족하오리다.”
어제 연중 32주일 저녁성무일도 성모후렴과 오늘 아침성무일도 즈가리야 후렴도 똑같이 오늘 복음을 근거로 부활의 기쁨을, 부활의 믿음을, 부활의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니 그분 앞에서는 모든 이가 살아 있는 도다.”

이런 부활의 기쁨의 빛이 우리 내면을 환히 비추고 위무慰撫합니다. 부활의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도 ‘부활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소제목 역시 ‘부활논쟁’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와 부활을 믿는 예수님과 바리사이들간의 논쟁입니다. 물론 결과는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하며 예수님의 압도적 승리를 말하지만 과연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승복하여 부활을 믿었을까요? 아마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정말 믿느냐?’ 묻는 다면 주저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오늘 사두가이들이 생각하는 바 부활은 현실의 연장선상에서의 부활입니다. 이들이 논쟁 의도는 순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망신주려는 의도가 역연합니다. 이들이 들은 예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억지스런 상상의 소산일뿐입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일 것입니다.”

정말 현실의 연장선상에서의 부활이라면 답이 없습니다. 이런 부활이라면 없는 것이 낫습니다. 살아 온 삶을 다시 사는 부활의 삶이라면 살고 싶어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부활의 희망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믿음은 순전히 은총입니다. 부활의 희망이 진짜 희망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마카오베기 하권의 순교자 일곱 형제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 희망하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한결같이 부활의 희망을 고백하고 부활을 믿으며 순교한 일곱 형제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희망을, 부활의 믿음을 살아야 합니다. 이 또한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살아서 이미 부활의 희망을 살지 못했다면 죽어서도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의 황당한 궤변에 예수님은 추호도 당황하거나 망설임 없이 정공법으로 이들을 제압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설명은 얼마나 명쾌한지요. 결코 현재의 연장선상에서의 부활이 아님을, 또 이런 부활의 삶은 은총임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복된 운명, 복된 미래입니다. 이의 생생한 예표가 결혼하지 않고 하늘나라를 위해 독신의 천사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아니 이미 세례를 통하여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되어 사는 우리 믿는 이들 역시 이미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추상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또 여기 있는 나의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다 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있음을 깨어 실감하는 이들이 진정 살아있는 것이며 이미 지금 여기서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어느 20대 후반 자매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어머니가 목숨을 끊으므로 고아가 되어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자매입니다.

“어머니가 목숨을 끊었던 다음 날, 어머니가 꿈에 나타났어요. 나체로 등뒤에서 볼 때는 어머니 모습이었는데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엄마가 아니라 악마였어요. 그리고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네가 나를 죽였다.’고 부르짖었어요. 너무 생생한 꿈이 었어요. 꿈에서 깨어나자 즉시 울면서 신심깊은 외할머니께 전화했어요. 악마의 유혹이니 걱정말고 이제 냉담풀고 성당에 나가 기도하라고. 다음날부터 성당에 가서 간절히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어요. 어머니를 구해 달라고. 3일후에 또 꿈을 꿨어요. 어머니께서 환한 빛으로 나타나셨고 딱 세 말씀하셨어요. ‘됐다!’ ‘믿는다!’ ‘잘해!’. 그리고 여기 수도원에 일주 피정왔어요. 너무나 편안하고 위로 받았어요. 여기서 살고 싶어요.”

요지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또한 자매에게는 하느님의 선물 같은 부활 체험입니다. 부활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되어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백한 후 즉시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는 쪽지에 적어 온 성서귀절을 보여주었고 성서를 펼치어 카톡으로 찍었습니다.

코린토 1서 15,12-34절 까지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자매가 지적한 것은 다음 구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 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1코린15,17-20ㄱ)

미사 시 성찬전례중 다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얼마나 감사하고 위로가 되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악에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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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수철 신
2016년 11월 6일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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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32 주일입니다. 위령성월의 첫 주일에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말해줍니다. 곧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제1독서>의 <2마카베오>에서는 의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곧 율법으로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임금에게 맞서서 일곱 형제는 부활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며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께서는~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요.”(2마카 7,9)또,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2마카 7,1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서 있었던 ‘반대자들과의 논쟁’을 모아놓은 부분(20,1-21,4) 안에 들어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는, 먼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제기한 질문이 길게 나오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먼저, 사두가이파의 질문(루카 20,28-33)은 한 부인이 과부가 되어 다른 시동생 여섯 명과 차례대로 결혼하여 살다가 모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경우,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라는 가상적인 예를 통해, 죽은 자들의 부활이 신명기 25장 5-6절에 나오는 ‘수숙혼’의 율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수숙혼법>이란 신명기 25,5-6에 따르면,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살아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 질문에서 그들은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들은 부활한 사람들의 삶을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 지상 삶의 연장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20,34-36)은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혀주십니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답변(20,37-38)은 사두가이파들이 존중하는 모세의 율법서인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고 밝히십니다. 곧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계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조들이 부활하여 하느님 가까이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 모든 이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루카 20,38)

이는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하신 약속, 곧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신 약속의 실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야훼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사실, 죽음은 결정적 단절이요 파괴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우리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죽음으로 인생이 허무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으로 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삭은 씨앗이 죽은 것이 아니라, 씨앗이 더 아름답고 더 크게 발전한 것이듯이, 인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움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지 되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주는 몸은 주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15,51-53).

그러니, 오늘 우리는 파스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두가이가 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현대판 사두가이는 누구인가?

그는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갇혀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곧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지니고 있는 현재의 틀(패러다임)을 과감히 깨야만 할 일입니다. 과감하게 바리사이적인 고착과 완고함을 깨고,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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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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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   [서울] 진정한 왕직은 봉사직  [5] 2943
781   [인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입니다.  [3] 3361
780   [수원] "천국 왕의 고난과 죽음"  [6] 2948
779   [춘천]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3] 3032
778   [대구] 왕이신 예수님과 부활  [2] 2866
777   [마산] 왕이신 그리스도  [4] 3048
776   [안동] 봉사의 삶  [4] 2840
775   [부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신다는 것의 의미  [6] 3433
774   [광주] 예수, 왕중의 왕  3092
773   [전주] 예수님은 왕이신가?  93
772   [대전] 우리의 왕은 이렇다.  [2] 3080
771   [청주] 감사의 생활  [1] 74
770   [원주]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3] 2854
769   [의정부] 감동을 주시는 왕  [1] 71
768   [군종] 왕 - 섬기는 사람  [1] 75
767   (백)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독서와 복음  [4] 2653
766   [수원] 정해진 시간과 일들 안에서  [4] 2520
765   [대구] “희망의 징조"  [3] 2020
764   [의정부] “예수님 한 분만 이상하다”  [3] 665
763   [인천] “예수님은 ‘보스(boss)’인가 ‘리더(leader)’인가?”  [5] 2547
762   [수도회] 보라, 내가 곧 간다. ...(묵시 22,12)  [10] 2872
761   [부산]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4] 2757
760   [마산] 교회의 생명력은 평신도에게 있다.  [3] 2508
759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  [3] 2339
758   [안동]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  [1] 1186
757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152
756   [춘천] 신념  [3] 2328
755   [원주] 재난의 시작  64
754   [대전] 착한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1] 2643
753   [전주] 종말 전의 재난  [2] 66
752   [청주]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1] 72
751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1] 2127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5] 1504
749   [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2] 2364
748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 2310
747   [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1] 2289
746   [대구] 부활의 삶,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513
745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845
744   [부산] 알 수 없는, 그래도 좋은 하느님 나라  [2] 2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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