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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리스도인은 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말씀 속에서 살아야”
조회수 | 496
작성일 | 16.07.15
[수원] “그리스도인은 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말씀 속에서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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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바쁘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내적, 외적 환경 모두 그러합니다. 외적 환경으로는 바쁜 일상과 많은 사람들, 경제지표, 소음, 그리고 공해로 인한 자연오염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 환경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내적 환경인데, 먹고 살기가 바빴던 과거에많은 사람들은 내적 환경을 외적 환경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내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을 보면, 사람들이 많은 욕심과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여러 가지 일들로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아가는 동안, 정신과 영혼에 관계된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또한 외적 환경만이 충족된 상태에서 오는 공허함은 다른 것들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분주한 마르타와 주님의 발치에 앉아 잠자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陸뗌岵都求? 때때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보통 언니가 바쁘게 일하면 동생으로서 언니를 도와주도록 타일러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오히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것은 우리의 내적 생활 즉, 영성 생활 혹은 말씀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것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우선적이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풀이나 나무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온전하지 못하면 보이는 잎과 나무는 시들고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우리가 내적인 평화가 없는 상태에서 외적 상황에만 집중한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내적인 평화가 뿌리내린 삶이야 말로 더 행복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듯이 여러 가지 분주한 일들과 온갖 걱정으로 가득 찬 현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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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백경태 요한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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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오직 그 한 가지 좋은 몫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을 때,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자매가 예수님을 자신들의 집으로 모십니다. 언니 마르타는 주님께서 자신의 누추한 집에 방문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영광이기에,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정성껏 주님을 영접하며 시중드는 일에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타의 분주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동생 마리아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그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에 더 열중입니다.

이에 마르타가 예수님께 정중히 부탁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작은 미소를 띠며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너는 참으로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진정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그 한 가지 좋은 몫을 선택하였고,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한 가지 좋은 몫’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할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 즉,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구원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로 하느님의 현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라는 굳건한 다짐으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야 한다는 데에 그 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현시대는 ‘마르타의 손과 마리아의 마음’이 모두 요청되는 시대이기에,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분명 언니 마르타 역시도 동생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원하고는 있지만, 마리아와는 다른 형태로 그분에게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마르타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선택한 그 ‘좋은 몫’에 신앙적으로 한층 더 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에는 정말로 할 일도 많고, 또한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그리 중요한 일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적극 투신해야 할 일은 정말로 ‘오직 그 한 가지 좋은 몫’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면, 앞으로는 세상의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내던져 버리고 다시는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추구하고 찾아야 할 것은 오로지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이를 매일의 삶 안에서 마음 속 깊이 되새긴 채 성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다함께 힘을 냅시다.

▮ 수원교구 이광휘 미카엘 신부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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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손님으로 오신다

지난 주일 주제 :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나 자신이 이웃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지난 1주일간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는 삶을 했는지 생각해 보자.

▪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손님으로 오신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손님을 우대하는 것이 신성한 일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이방인으로 있었던 것을 항상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고 사막을 횡단하고 홍해를 마른 발로 건넌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곳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나그네를 잘 대해 주며,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바로 어려운 처지에 있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박대하지 말고 잘 해 주라는 것이다.

▪ 제1독서: 창세 18,1-10r

오늘 제1독서에서 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행위를 생각해 보자. 세 남자를 보고 천막 문에서 뛰어나가 맞으며 땅에 엎드려 청을 드렸다. 세 남자 중의 한 분은 하느님이요, 둘은 그분의 천사였다. 우리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혀 다른 이방인이시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이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의 곁에 다가오시며,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아브라함과 같이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하느님을 맞이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즉 손님을 잘 후대함으로써, 복음을 또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잘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손님으로 등장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리였던 자캐오의 집에 초대를 받으시고(루가 19,5-10), 그들로부터 극진하고도 가식 없는 대우를 받으신다.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 사랑의 표시요 회개에로의 초대가 된다. 함께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친교의 표시이며 사랑을 나누는 행위이다. 한 상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한 가족이다. 가족 사이에는 항상 사랑이 있으며, 서로를 위해서 희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며, 또한 똑 같음을 의미한다. “맘먹어!”하는 표현을 쓴다. 맘먹는다는 것은 “맞먹는다”는 뜻이다. 즉, “마주 앉아 먹는다”는 뜻이다. 상을 가운데 놓고 같은 상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맘먹어?” 할 때는 어리거나 약한 녀석이 까불 때 하는 말이지만 본뜻은 이런 것이다. 어렸을 때 보면, 할아버지 잡숫는 상에 있는 반찬에 젓가락을 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무엇이든지 어른이 먼저 시작을 하셔야 식사도 시작할 수 있었다. 같은 식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죄인들은, 바로 사람들이 큰 예언자로 알고 있었던 그 어른에게 진정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받아들여짐을 체험한 그들에게는 더 없는 은총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심판의 표지가 되고 만다. 예수님은 그들도 사랑하시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 모함의 대상이며, 판단의 대상이며, 결국은 예수님을 죽음에로 이끌어 가고 만다.

▪ 복음: 루카 10,38-42: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당신의 인격에 주의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즉 그분에게 무엇을 드리는 것 외에 따뜻이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취하면 된다. 무엇을 드리는 것에 더욱 급급한 사람은 그분과 대화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보다는 관심이 적다. 본당 신부로서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하러 갔는데 무엇을 먹을 것을 준비하느라 급급해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대화가 중단되고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예수님은 손님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또 손님으로 그의 민족 가운데 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분은 특히 모든 이로부터 배척받는 손님이시다. 이 손님이 부활하신 후, 엠마우스로 가는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그분에게 손님 대접을 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어 사랑이 서로 통할 때에야 비로소 알게된다(루가 24,28-32).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손님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분임을 느끼며, 그분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우리가 맞이하는 그분을 이제는 바울로 사도와 같이 모든 이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분을 맞이하고 그분을 사랑해 드리는 것은 바로 나에게 오는 이웃을 통해서이다. 좁게는 바로 나의 가족들을 통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통하여, 그리고 공동체를 통하여서이다. 주님을 알아 뵙고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선교의 사명을 다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갖고 전할 수 있을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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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참다운 접대는 말씀과 함께하는 좋은 몫!!!

교회는 오늘 전례력으로 연중 제16주일과 더불어 농민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의 수고와 땀방울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사랑의 행위이기에, 우리는 그러한 농민들의 수고와 땀방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을 깨닫고 하느님의 창조질서 보존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묵상하는 주일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복음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의 방문에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게 보내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경청(루카 10,39-40 참조)합니다. 유대인들의 생활 풍습 안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랑의 실천이었고, 그들은 그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한 사람이 혹 집안의 물건을 훔쳐가더라도,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을 쫓아가 잡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접대를 하며 함께했던 소중함과 친교를 적어도 하루라는 시간만큼은 간직하려 한 나름의 배려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접대를 통한 사랑의 실천은 오늘 제1독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세 사람 곧, 주님께 한 접대는(창세 18,2-8 참조) 아브라함과 사라가 많은 나이에도 아들을 낳을 수 있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나타났으며(창세 18,10. 참조, 가톨릭교회교리서 706항, 2571항 참조), 소돔과 고모라의 그 유명한 주님과 아브라함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결과로도 나타났습니다(창세 18,23-33 참조).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예수님께서는 진정 참다운 접대는 이러한 물질적인 접대보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친교의 시간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말씀과 함께 하는 참다운 사랑의 접대를 보여준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마리아의 좋은 몫을 칭찬하시며 그 소중함을 깨닫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루카 10,42 참조). 마르타는 유대의 전통에 따라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물질적인 부분에서 채우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물질적인 접대보다 더 중요한 말씀의 친교 안에서의 참다운 접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비이며,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므로(가톨릭교회교리서 772항 참조), 우리는 그말씀을 선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일치를 이루는 ‘참다운 접대’가 물질적인 친교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사명을 통해 서 주님과 진정한 친교를 이루어 나가야 함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소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이재현 신부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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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내가 받은 몫이 얼마나 큰데--”

‘갓등 축전’(신학교 축제)을 치를 때마다 ‘신앙의 신비’(?)를 체험한다. 200명 남짓한 신학생들이 수천 명이 넘는 일반대학에서나 치러질법한 규모의 행사를 무난하게 소화하는 것을 보면서 신학생들의 놀라운 능력(?)을 확인하게 된다. 신학생들은 매일매일 규칙적이고 촘촘한 시간표에 따라 기도와 학업을 병행해야하기에 취미활동과 행사 준비를 위한 시간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학생들이 다양한 행사를 별 어려움 없이 치러내는 것은 신학생들 모두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나누며 맡은 역할을 충실히 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가 나온다. 흔히 신자들은 이 복음을 읽을 때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갈등 구조’를 떠올리게 된다. 마리아처럼 주님 발치에 머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지, 마르타처럼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원의와 도움에 응답하는 역할이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편이 더 바람직한가하는 기준으로 복음을 해석하자면 혼란스럽기만 하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라는 구절은 특히 열심한(?) 신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이 불편함의 이유는 아마도 마리아와 마르타의 처신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는 차원으로 생각하기에 그럴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속뜻은 마리아가 선택한 것의 소중함을 역설한 것이지, 비교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달란트를 다양하게 받았고, 그 다양함은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때 그 개별적인 것들이 전체로서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보다는 타인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역할을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감사하며 성심성의껏 완수해 나갈 때 우리의 존재가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상대와의 비교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 중요하다.

마르타가 마리아의 태도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행복한 마음으로 했다면, 예수님께 칭찬받았음은 물론 스스로도 행복하였을 것이다. 자신의 봉사가 예수님과 마리아가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더라면 그녀는 무척 행복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선 우리는 하느님께 고유하고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인식해야 한다. 나의 부족은 상대가 채워주고 상대의 부족은 내가 채운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세상은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교회의 일꾼이”(콜로 1,25) 된 바오로처럼 주님이 주신 능력을 잘 발휘하며 아름다운세상을 구현하는 데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이기에…

▮ 수원교구 노희철 베드로 신부 : 2016년 7월 17일
  |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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