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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세상의 거짓에 ‘아니’라고 해야
조회수 | 663
작성일 | 16.08.12
[춘천] 세상의 거짓에 ‘아니’라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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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같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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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이자 과학자인 프랑스의 ‘떼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 신부님은 학문적 탐사를 위해 오르도스 사막 한 가운데에 있어서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라는 글을 통하여 이렇게 쓰셨습니다.

“주님, 이번에는 앤 숲 속이 아니라 아시아의 대초원 안에 들어와 있지만, 또다시 저는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이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들을 뛰어넘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순수 실재를 향해 저 자신을 들어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저쪽 지평선에서는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동쪽 하늘 끝자락을 비추고 있습니다. 존재가 발원한 샘, 그것은 불입니다. 태초에 차가움이나 어두움이 아니라 ‘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 속에서 빛이 서서히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빛’이 있어서, 끈질기게 그러나 어김없이 저희의 어두움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영이시여, 불이시여, 다시 한 번 내려오시어 새로 만들어진 이 가냘픈 물질 덩어리에 혼을 불어넣어 주소서. 세상은 오늘 이 새로운 피조물로 새 단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김진태 신부 옮김)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도 오늘날 미사성제를 드리신다면, 온 우주를 통째로 들어올리시며 불같이 기도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묵시 3, 15 참조) 우리의 신앙에 진정 뜨거운 열정의 불을 쏟아 부어주시고 싶으실 것입니다.

신앙은 시들어 버리고, 열정은 차가워졌으며, 진실로 주님을 찾는 마음 또한 사라져 버린 오늘, 그래도 염치없이 주님께서 주실 평화를 바라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 49; 51)

예전에 어느 신부님께서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고 말하면서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한번도 천주교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가짜 신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진실한 신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참 신앙이 아닌 세상의 거짓된 것에 단호히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면 정말 미쳤다는 소리,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때론 가정의 분열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뜨거운 열정의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실로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히브리서의 격려를 기억합시다.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니다.”(히브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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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얻기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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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신 ‘임옥상’님은 이 같은 멋진 글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그 사람 숟가락 놓았어’ 하면, 그가 죽었다는 의미로 안다. 반면 ‘숟가락 하나 더 놓자’고 하면, 식사에 초대한다는 뜻이고, 초대에 부담을 갖지 말라는 의미도 붙어있다.

숟가락 공동체로 우리의 전통 사회는 대동 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서양과는 달리 유목 사회가 아니라 농업 사회였던 우리는 유토피아를 대동 사회로 보았던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현세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던, 지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낙원-유토피아를 우리는 현세, 즉 이 땅에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한국 초대교회 당시 신앙의 선조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낙원을 이 지상에서 스스로 만들며 살아가셨습니다.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평화를 살고자 하는 사람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얻고자 하는 평화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평화는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분명한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들은 언제나 말씀에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으셨기에 세상의 것을 다 잃었어도 기쁨과 평화로 사실 수 있었습니다. 진정 신앙 때문에 가정에 분열이 일어났어도 불같은 신앙으로 평화를 지켜내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 2)

오늘날에도 신앙 안에서 참된 평화를 찾아 불같은 믿음 생활을 하는 교우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의 시련과 고통은 이제 그들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드디어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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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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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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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불을 발견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어둠을 물리칠 수 있었고,추위를 견뎌낼 수 있었으며, 날 것을 익혀 먹게 되어 인류의 삶은 한층 더 윤택해졌습니다. 하지만 불을 잘못 사용하였을 때는 모든 것이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은 모든 것을 다 삼켜 버리는 분노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은 이 세상의 더러운 모든 것을 다 태워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천년 전 유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의롭지 못한 권력과 제도에 맞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그런데 이 불은 모든 것을 다 삼켜 버리는 분노의 상징이 아니라, 온갖 더러운 것을 다 태우는 정화의 불로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이 활활 타오르기를 간절히 원하셨기에, 하느님께로 향한 당신의 열정을 세상에 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거짓 평화와 사랑으로 위장된 세상의 모든 불의를 깨끗하게 태워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미지근하고 나태한 믿음, 편하고 적당한 신앙생활, 지금의 평화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성당을 위로의 장소로 생각하고 달콤한 신앙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타성에 젖어버리거나, 코앞에 닥친 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우리의 불이, 우리의 열정이 식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세상에 불을 지르셨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나도 모르게 꺼져 가는 마음의 불씨를 다시 지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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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수창 루도비코 신부 - 2016년 8월 14일
  |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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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성령 안에서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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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더 큰 일치와 사랑으로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 안에서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가족과 분열을 해야만 했던 분들이 계십니다.바로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이십니다. 순교자들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여러 가지 고문과 죽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순교자들이 죽기보다 힘들었던 것은 바로 가족과의 이별이라고 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을 두고 순교의 길로 들어선 부모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순교자들은 가족들에 대한 사랑보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했고 용감하게 순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물론 이별의 순간에는 참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천국의 영원한 영광과 사랑 속에서 함께 계심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가 가끔씩 하느님 없이도 사랑할 수 있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 할 때도 나 혼자의 힘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을 때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참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때 비로소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사랑이 되고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보다 더 좋아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을 잊고 내가 무엇인가를 더 좋아한다면 나에게 분명히 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오로지 하느님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러면 안되겠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 이웃들을 사랑할 때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성령 안에서의 사랑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힘들고 많은 유혹도 있지만 우리도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가장 먼저 사랑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가족과 이웃들과 진정으로 사랑하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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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서성민 파스칼 신부 : 2019년 8월 18일
  |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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