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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조회수 | 494
작성일 | 16.10.02
[수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와 함께
+ 마음을 드높이
@ 주님께 올립니다.
+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미사를 봉헌하며 성찬전례 때 드리는 감사송의 시작부분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기에, 우리는 그 은혜와 축복에 감사드리면서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천상 잔치에서 우리는 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가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말입니다. 감사라는 것은 참으로 많은 축복을 또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 줍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서로 감사의 정을 나누게 되면, 하나의 축복은 바로 그 안에서 끝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새로운 축복을 가져다주면서 웃음을 선사해 주고, 한 형제라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다른 민족들의 삶은 차치해 두더라도 우리 조상들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늘 감사가 배어있었습니다. 뉘 한 톨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느끼면서 하찮게 여기는 것을 삼갔고, 늘 풍요로운 수확을 선물해 주시는 하늘을 향해 마음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신밟기를 하면서 주술적 연희를 했고, 보름달의 사방이 두터워지게 되면 올해는 반드시 풍년이 들 것임을 믿으면서 서로 격려하기도 했으며, 가물 때는 기우제를 지내면서 비를 내려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다는 마음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햇곡식이 나오면 어김없이 안택고사를 지내면서 수확을 주심에 감사를 드렸고, 농악대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각종 신명나는 농경유희를 펼치면서, 하늘과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생하는 세상 속에서 감사와 기쁨을 함께 나눴던 분들이 바로 우리 조상님들이셨지요.

감사는 우리의 삶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내가 받아 누릴 만한 것으로 여겨져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내 삶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며, 마땅히 내가 표현해야 할 것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에게 내려졌던 아홉 가지 축복에 대해서는 당연시하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섭섭하게 대했던 한 가지 실수만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원망과 증오로 변해 표출된다면 이는 축복을 받고 살아가는 자의 참된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에 처했던 열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똑같은 축복을 받았는데도 감사의 정을 표하기 위해서 다시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고작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 아홉 명이 우리 자신은 아니었을까요? 아닐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바로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던 바로 그 이방인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교우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 수원교구 노성호(요한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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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평범한 일상에서의 감사

오늘 복음은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할 줄 아는 한 사람을 등장시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보내는지를 또한 알려준다.

마태오복음 5장 4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전해준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 똑같은 배려와 똑같은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그러나 이에 감사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리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병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이 치유되었다면 몸의 변화를 매우 크게 체험했을 것이다. 문드러지던 몸이 낫는다는 것은 매우 큰 변화이다. 그뿐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비참한 삶에서 정상인의 삶으로의 변화 또한 매우 큰 변화이다. 나병환자들은 숨어서 생활해야 했고, 정상인의 삶의 터로 내려와 거리를 다닐 때에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쳐야 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쳤던 그들의 신세는 주님을 만나면서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이런 매우 큰 변화를 체험했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얼마나 그들의 삶이 무감각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묵상할 수 있는 내용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듯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신다. 오늘 복음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이방인을 부각시킴으로 신앙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시는 것이다. 이웃을 이웃으로 받아들였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감사할 줄 알았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신앙을 가졌다는 신앙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감사의 생활에서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더 뛰어났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이웃 사랑에서도 그들이 더 모범적이었다. 이런 내용을 알려주면서 신앙인인 우리들에게 더 분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이제 신앙적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주 큰 변화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 수원교구 이강건(빈첸시오)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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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나를 구원할 믿음’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 계속 봐야 할 사람, 나를 행복하게 하거나 반대로 더 없이 힘들게 만드는 사람,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 내 옆에 있어서 고맙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저 마지못해 끊어내지 않고 근근이 이어가는 사람,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리 잡아서 사랑이든 상처든 주고받으며 삶을 이루어 가는 사람….

그중에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행복할 때나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 사람은 그만큼 나와 친밀한 관계일 것입니다. 내게 생긴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존재만으로도 내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더더욱 소중할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자식 간이든 형제자매 간이든 친구 간이든 어떤 관계이든 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소통이 되는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요? ‘나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라고 말은 하지만, 진지하게 돌아봅시다. 나와 그분은 어떤 사이일까요?

오늘 1독서에서, 나아만은 깨끗해진 자신의 몸을 보고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복음에서 병이 나은 후에 돌아와 “이분이시구나! 나를 구원해주시는 분이 바로 이분이시구나!”라고 감사를 올린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은,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오히려 충실하신 하느님께 향한 신뢰로 굳어집니다. 이에 예수님의 응답이 따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나를 구원하는 것은 멀리 있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오셔서 내 손을 잡고 일으키시는 기적이기 이전에, 이미 나와 함께 하시며 행복과 고통을 모두 나누시길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 아는 믿음이라는 복음의 초대가 아닐까요? 나에게도 주님께로 향한 믿음, 신뢰하는 마음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신하며 선포합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독서, 2티모2,11-12).”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합시다. 성실하지 못한 우리도 언제나 성실하신 주님과 함께라면(2티모 2,13참조), 기쁨과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지지고 볶더라도 끝까지 주님과 같이 살기, 그것이 신뢰를 바탕으로 주님과 친해지는 비결일 것입니다.

▮ 수원교구 김유곤(테오필로)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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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또 다른 기적(신비)을 만드는 감사

신학생들은 인사를 참 잘한다. 하루에 몇 번을 만나더라도 그 만나는 순간마다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물론 신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신학교 신부들이 양성책임자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의무(?)라서…’라고 부정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들의 행동이 의무적인 예절행위에 따른 인사라고 하더라도 신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통해 예절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학교의 사제들 또한 신학생들의 인사를 통해 전해오는 따사로운 마음을 느끼며 그들이 사제직에 어울리는 품성을 체득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울러 나 자신도그들에게 존중과 인정을 받고 있다는 느낌에 마음이 뿌듯해진다. 그 결과 나는 신학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내면에서부터 피어오르게 된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 이방인으로 치부되는 ‘사마리아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 감사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온 사마리아 사람이 ‘치유의 기쁨’(15절)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구원’(19절)이라는 놀라운 신비를 체험한 것이다. 그의 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은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참다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전환기요, 새로운 탄생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병이 치유되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다른 질병에 걸릴 수도 있다. 주님의 은총으로 일생을 병고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께 돌아감으로서 육체의 치유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는,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치유에 대한 감사를 통해 그는 영원한 삶으로 새롭게 초대받는다. 제1독서에서도 이방인인 나아만은 엘리사로부터 나병을 치유 받고 돌아가면서 흙을 청하며 ‘주님 말고는 다른 신에게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2열왕 5,17)을 고백한다. 그 역시 병의 치유를 통해서 육신적인 치유만이 아니라 영적인 치유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개 기쁨보다는 고통을 더 쉽게 감지하여 마치 우리 삶 속에서 주님께 감사할 것이 없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필립 4,6)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신비를 체험할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께서 주시는 수많은 은총을 매 순간 발견하고 감사할 수만 있다면….

▮ 수원교구 노희철 베드로 신부 : 2016년 10월 9일
  |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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