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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조회수 | 101
작성일 | 19.04.05
[전주]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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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 가르치시고 계시는 예수님 앞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끌려 왔습니다. 간음한 남자는 줄행랑을 쳤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 사건에 엮어서 곤경에 처하려고 계획적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 (4절).

그들은 흥분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실까? 그들은 예수님에게 눈과 귀를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외로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소한 행동에 그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시간을 끌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흥분하고 있는 순간에는 무슨 말을 해도 큰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한테는 흥분을 가라앉히는데 잠시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줄곧 물어댔습니다. 이제 흥분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조용해진 군중을 향해서 핵폭탄 같은 말씀을 날리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예수님의 행동은 ‘위대한 침묵’을 끌어냈습니다. 폭탄이 터진 후 사방이 고요해지듯, 예수님이 앉아계시는 동안,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침묵의 시간이 온 군중 속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쌍날칼이 되어 군중 속을 날아다니며 그들의 마음심장을 꿰뚫고 그 속에 박혀버렸습니다’(히브 4,12-13). 한 방의 말씀의 칼, 거기에 맞은 그들은 한 순간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 침묵의 시간 속에서 무서운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말씀의 칼에 맞은 그들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게 하려다 자기들이 그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손에 돌을 든 심판자로 왔다가 이제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죄인들이 되어 흩어져 갔습니다.

죄녀로 끌려온 여자에게 예수님은 일어나시어 한 말씀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1절) 하셨습니다. 그 한 말씀에 그녀는 깨끗해졌습니다. 이번의 말씀은 죄를 씻는 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녀로 끌려왔다가 의인이 되어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면 단 한번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모진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온 인류의 죄를 씻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죄녀에게 해 주신 똑같은 말씀을 해 주실 것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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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왕수해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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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용서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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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는, 모세 오경(토라)의 율법 규정에 따르면, 돌을 던져 죽여야 했습니다(신명 22,22-24 참조). 왜 그래야 하는지는, 이 규정을 말하는 대목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너희는 이스라엘에서 악을 치워 버려야 한다”(신명 22,22.24)

공동체 안에서 악을 치워 버리는 것, 이것은 하느님 백성의 지당한 의무였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자신을 선택하신 하느님처럼 똑같이 거룩하게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기 때 문 이 지 요 ( 레 위11,45 참조). 온 백성이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 이를 위해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에서 악을 치워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악을 치워 버리는 것, 또는 사회 안에서 그야말로 악을 근절하는 것이 말처럼 쉽나요? 역사를 보면, 악을 뿌리째 뽑겠다고 나섰던 사람이나 세력은 흔히 그보다도 더 끔찍한 악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독재나 전체주의가 그러합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워 놓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런 역사의 일반적인 법칙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울러 이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사수해야한다는 사명감과 믿음에 불타는 사람들이기도 했고요.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진퇴양난의 함정에 밀어 넣으려는 속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방식을 택하십니다.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길을 가십니다. 악을 치워 버리고 공동체 또는 사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 그것은 오직 당신이 가신 길이 어쩌면 최상의 해법임을 보여 주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용서와 사랑! 사실 이것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나에 대한 다른 이들의 용서와 사랑, 결정적으로는 하느님의용서와 사랑, 이것 없이 제대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자비의 해’입니다. 이 세상에, 나는 악을 다 이해했으며 따라서 자신 있게 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쩌면 세상 끝날까지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와 사랑, 자비가 우리 모두에게 매일, 그리고 끝까지 필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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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김혁태 베드로 신부 : 2016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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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소음과 침묵

“대도시는 거대한 소란의 저수지 같다”. 막스삐까르는 ‘침묵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는 대형 TV가 설치되어 있고 종일 켜져 있다. 심지어 보는이 없어도 종편 TV앵커 사회자 패널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밖에 나와서도 심지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선동투의 소란은 진동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막스삐까르는 “기계가 정지해 있을 때의 조용함은 결코 침묵이 아니라 실은 진공이다. 그러므로 노동을 마친 노동자들은 진공 속에 있다. 기계의 진공이 그들 뒤를 따라온다.”라고 말한다.

오늘 복음은 서로 상반된 상황을 그려준다. 소란과 침묵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붙잡아 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돌을 손에 들고 소리를 지르며 여인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간음한 여인은 돌을 던져 죽이라’는 율법에서 폭력만 보이고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협박하고 있다. 소란과 폭력으로 사랑을 죽이려 하고 있다.

영화 ‘위대한 침묵’은 프랑스의 해발 1300미터에 있는 남자 봉쇄 수도원의 일상을 보여 주는 영화이다. 162분 동안 스토리도, 음악도, 자막도, 대화도 거의 없는 ‘침묵 영화’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한 번씩 졸기도 했다. 영화 속의 수도자들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소란과 협박의 중심에 혼자 앉아 ‘침묵’을 지키고 계신다. 사람들의 소란과 협박이 거세져도 그분은 침묵을 지키신다. 그들의 소란과 협박이 극에 달할 무렵 그분은 몸을 일으키시어 마침내 말씀을 하신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의 이 침묵 말씀은 사람들의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았다(히브 4,12 참조).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요한6,9).

예수님은 자주 산에서 침묵 속에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 22,39 참조) 막스 삐까르는 “침묵은 신의 본질이며, 신의 침묵은 사랑이다. 침묵의 상실만큼 인간의 본질을 변모시킨 것은 아무것도없다.”라고 말한다. 침묵 속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만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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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명재 베네딕토 신부 : 2019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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