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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이웃이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조회수 | 72
작성일 | 19.07.12
[청주] 이웃이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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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성탄절 날 성당에서 산타 선생님으로부터 선물보따리를 받고 신나게 집으로 오는 길에 거지 할아버지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지저분하고 무섭기도 해서 저는 피해 가는데, 저의 누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과자를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의 그 광경은 어른이 된 지금도 왠지 생생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그런 분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성당에 있으면 그런 분들이 정기적으로 자주 찾아오는데 그들이 반갑지 만은 않습니다. 술 드시고 와서 항상 같은 소리를 하시는 그 분들을 보며 ‘돈을 많이 드리는 것이 이 분들을 도와주는 것은 아니야’ 하면서 제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또 지하철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분들을 보며 의지적으로 무관심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오늘의 복음은 참으로 부담스럽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다가 갑자기 강도를 만납니다. 그리고 강도 맞아 신음하는 사람 곁을 세 사람이 지나가게 되는데, 그 중 첫 번째 사람인 사제와 두 번째 사람인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가고, 반면 사마리아 사람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치유를 도와줍니다.

왜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갔을까요? 사제나 레위 사람은 하느님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귀찮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 사람 역시 자신의 할 일 즉 급한 볼일이 있는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자신의 여행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상처입고 신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과연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 중 누구입니까? 내 갈 길이, 내 살 길이 급하고 중요한 사제나 레위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위의 상처 입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더 나아가 우리는 레위 사람도, 사마리아 사람도 아니고, 내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상처받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IMF’라는 강도로부터 두들겨 맞고 신음하고 있다면, ‘경기침체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상처로 고통 받고 있다면, 커 가는 자식들의 교육비와 생활비 때문에 한숨짓고 있다면 바로 우리 자신이 강도 받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바로 치유 받아야 할 이웃일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이 바로 상처입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할 이웃입니다. 우리는 결코 내 갈 길만이 중요한 사람일 수 없으며, 상처입고 신음하는 사람이 나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해야 하는, 가야 하는 나만의 길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오늘 “신음하고 있는 이웃에게 가서 사랑을 베풀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 안으로, 우리 주위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 안으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들과 늘 함께 해 주시는 하느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제 자신의 신음소리를 제 스스로 외면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소서. 제 주위 사람들의 가슴 아파하는 소리를 외면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소서. 또 무엇보다 이런 저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 당신을 외면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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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민광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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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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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율법교사는 다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여기에서 율법교사의 물음을 다시 들어 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는 이웃을 결정하는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서 묻고 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말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이웃을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시고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가는 사제와 유다의 특권층인 레위사람 그리고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응급치료를 하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봐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이냐?’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나의 이웃이 누구냐”를 묻지 말고, 남을 중심으로 해서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를 먼저 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이 누구인가를 따지지 말고,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누구인지 따지지 않습니다. 이웃이 누구냐고 따지는 사람은 실상 사랑에 깊이 들어가 있지 못합니다.

교회가 꽃동네나 여러 복지사업 등에 힘을 쏟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있어 윤리적인 평가에 앞서서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도덕, 윤리, 법, 종교, 국가, 이념, 민족 등 그 어떤 것도 ‘사람의 가치’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여기에 맞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사람도 아무런 평가 없이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른바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도, 심지어 세리와 죄인, 창녀들조차도 ‘하느님의 자녀로’ 우리와 똑같은 사랑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주제와 연결시킨다면, 사람은 누구나 다 ‘이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 됩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의 손을 뿌리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우리는 인간 일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일반이란 현실적으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 동료를, 우리 동네 홀로 사시는 어르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당장에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억울하게 밀려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입니다. 멸시받는 사람입니다. 병든 사람입니다. 옳은 일을 위해 고난을 겪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도 특별히 사랑하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하신 주님 말씀을 사는 길…. 그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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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윤창호 도미니코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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