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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좋은 몫
조회수 | 85
작성일 | 19.07.19
[군종] 좋은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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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태극전사들이 월드컵 첫승을 넘어 4강 신화를 이뤘기 때문입니다. 저는 ‘월드컵 신부’입니다.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6월 24일 사제서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002년 여름. 뜨거운 마음으로 대구, 안동, 왜관 베네딕도회의 27명이 하느님 제단 앞에 엎드려 제단의 봉사자로서 자신을 봉헌하여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지금껏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것들을 충실히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년 서품을 받는 각 동기들마다 특색이 있기 마련인데 대한민국 전체가 하나되어 뜨겁게 타올랐던 때라 그런지 우리 동기들은 동기애가 좋기로 교구에 소문이 나 있습니다. 처음 사제서품을 받고 모두 본당 보좌신부로 있을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본당뿐 아니라 여러 사목 현장에서 사제로서 하느님께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가지만, 그리고 만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 다름을 어색해 하기 보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로 바라보고 격려해 주면서 말썽(?) 없이 그렇게 아주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동기들이 각자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총임을 모두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주인공인 마르타와 마리아 이 두 자매 역시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두 자매가 함께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자매가 가지고 있던 차이점은 바로 마르타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시중드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두 자매의 이런 차이점은 ‘어느 것이 맞다, 어느 것이 틀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느 것이 좋다, 어느 것이 나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은총의 모습은 우리 각자에게 맞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 자신도 분명히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에 대해 부러워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를 인정해 주십니다. 마르타가 자기의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예수님을 섬길 줄 아는 부분도 인정해 주시고 또한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인정해 주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맞게 주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받은 은총은 무엇입니까? 우리들도 분명히 모두 각기 다른 자신만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것, 너의 것 할 것 없이 어느 것 하나 하찮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것이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은총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당신께서 주신 좋은 몫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키워가길 바라십니다. 그 좋은 몫들을 통해 우리가 구원의 길을 더욱 힘차게 걸어갈 수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좋은 몫을 받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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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김용한(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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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원에 이르는 두 가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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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Vermeer, 1632~1675)는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가톨릭신자인 카타리나를 만나 결혼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화가입니다. 그가 그린 <마르타와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는 루카복음 10장 38-42절의 말씀이 그 배경입니다.

지치고 힘들어 휴식이 필요하면 가장 편한 집을 찾아가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여행 중에 지쳐서 쉬어가려고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들렀습니다. 그곳엔 음식을 차려 줄 마르타와 이야기를 들어 줄 마리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모시느라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분의 말씀만 듣고 있지 않은가요? 순간, 그녀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하는데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그분께 이렇게 말하는 여인이라면 그 성질도 대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이 얼마나 야속한 말씀입니까? 그분은 평소에 무거운 짐 진 자 모두 내게 오라고 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분은 왜 무거운 짐을 진 자의 하소연을 무시한단 말인가요? 그 의문을 베르메르는 그림을 통해 풀어줍니다.

이 그림에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빵을 들고 있는 마르타와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마리아와 손가락으로 마리아를 가리키며 마르타를 바라보는 예수님입니다.

마르타의 모습은 동적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배고픔을 달래는 빵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발랄하고 밝은 노란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활동하는 사람을 대변해주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모습은 정적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예수님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눈빛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시선은 언니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분은 눈으로 마르타의 마음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도 어느새 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사랑의 색인 붉은색 상의와 차분한 색인 청록색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명상하는 사람을 대변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이끌고 계십니다. 마르타가 동생에 관해 예수님에게 불평을 늘어놓지만 그분은 그녀가 동생의 참모습을 이해하도록 손가락으로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마르타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슬프기까지 합니다. 그분은 마르타에게 간절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르타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느라 난 너무 지쳤어. 이런 나에게 필요한 게 뭘까? 빵일까? 그것보다는 힘들다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야. 마리아는 그 몫을 선택한 거야. 마르타가 나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것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래서일까요? 마르타는 서서히 감은 눈을 뜨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게 이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은 그림자가 전혀 드리워져 있지 않습니다.

이 그림은 예수님이 두 자매를 연결하는 삼각구도로 안정감을 줍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빵이 놓여 있습니다.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가톨릭 전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르메르는 그리스도의 몸인 빵을 중심으로 모두가 하나 되기를 갈망하며 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가톨릭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선행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베르메르는 그 고민을 이 그림을 통해 해결해 줍니다. 그림의 예수님은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고 했으니까요.

믿음과 선행, 기도와 활동으로 대변되는 모든 이중성은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조건입니다. 믿음의 증명은 선행이고, 선행의 결과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하며 일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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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손용환 신부
  |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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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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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두 모습에서 관상과 활동, 사랑과 봉사에 대한 묵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은 ‘활동 중의 관상’을 ‘관상 중의 활동’을 실현하며, 또한 ‘사랑 중의 봉사’를 ‘봉사 중의 사랑’을 실현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조화에 대한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가 사는 집에 방문하셨습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예수님께 다가가 마리아에게 자신을 도우라고 말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몫을 빼앗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는데, 요한복음 11장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자로가 죽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예수님께 갑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한 자매이면서도 참으로 다른 성향입니다. 마르타는 동적이고, 후에 마리아가 두 번이나 예수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발라 드리기는 하지만 마르타에 비하면 정적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한집에 살듯이 교회 공동체에도 참으로 많은 성향의 신자들이 모여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동적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정적이기도 합니다. 동적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정적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일까요? 미리 말씀을 드리자면 교회 공동체 안에는 모두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셨습니다.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1코린 12,17-1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때로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다른 성향 때문에 오늘 복음의 마르타처럼 미워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체는 서로 다르지만, 다름을 통해 더 조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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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이창현 사무엘 신부 : 2016년 7월 17일
  |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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