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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조회수 | 63
작성일 | 19.08.23
[청주]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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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는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서 말씀을 경청하고 이 성서 말씀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강론을 듣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말씀의 전례는 예수님의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공부시간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전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최후의 만찬처럼 미사에 참여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빵을 나누어 먹는 식사시간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서로를 잘 알고 친교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런 대화시간과 식사시간을 이용해서 가장 중요한 성사인 성체성사를 만드신 것입니다. 미사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친교를 돈독히 하기 위해 마련하신 자리입니다.

그렇지만 대화와 식사를 통해 서로를 알고 친교를 돈독히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공부를 하고 유익한 대화를 했더라도 기억하지 못하고 생활에 적용하지 못한다거나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었어도 잘 소화시켜서 살과 피가 되게 하지 못하고 바로 몸 밖으로 내보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복음 말씀은 마치 이런 미사와 이 미사에 참여한 우리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닫힌 문 밖에 서서 예수님께 이렇게 따집니다.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은 마치 미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저희가 성찬의 전례에서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 말씀의 전례 시간에 저희에게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미사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과 함께 생명의 빵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이 다시 자신들의 일상생활로 돌아와 배운 대로 그리고 예수님을 모신 사람답게 그렇게 사는 데서 완성됩니다. 미사는 마침성가를 부르는 순간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파견성가를 부르고 세상 속으로 파견되어 돌아가, 우리들 매일 매일의 삶에서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고 또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낼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 생활로 돌아가 미사를 완성할 것인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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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신범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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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거짓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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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점심 약속이 있어 옆 본당 L신부님께 가는 길이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 성당 마당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맞은편에서 너댓 명 낯선 중년 여인들이 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형제님, 예수님 믿으세요. 그리고 저희 교회 오셔서 은혜로운 말씀 들으시고, 꼭 구원 받으세요. 지옥 가시면 안 됩니다.” 아마도 근 처 개신교에 다니는 ‘열심한’ 분들 같았습니다. 물론 사제복을 입고 있었고 성당 정문으로 들어서는 길이었기에 너무 어이없었습니다. 그냥 무례한 사람들의 소리라 귓등으로 들었지만 ‘저들이 말하는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에 대한 자만은 어디서 오는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구원에 대해 깊게 성찰하도록 이끕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어지는 종말론적 비유는 구원이라는 좁은 문을, 더군다나 누구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비유에서 집주인은 의로운 심판관이신 하느님을, 닫혀버린 문 은 번복할 수 없는 생명과 죽음의 길을 의미합니다. 외면당한 이들은 주님 가까이서 먹고 마시며 친분을 쌓은 이들, 주님께서 자기들 동네에서 가르치셨기에 누구보다 그 가르침을 잘 알고 있는 이들입니다(루카 13,25 참조).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주님과 가까운 무리입니다.

이 비유의 병행구절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할 것이다(마태 7,21-22).” 여기서 주인에게 내침을 받은 이들은 한층 대단한 인물들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말씀 은사로 수많은 이들을 쥐락펴락하는 사람, 구마와 치유의 은사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렇듯 내로라하는 이들이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 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그들의 ‘불의함’에 답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을 빙자한 ‘거짓의 사람’이라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제멋대로 주님의 말씀을 악용하여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이들, 희생과 봉헌을 강조하며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이들, 몽매한 이들을 기복신앙으로 이끌며 자신을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은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맥락에서 구원을 ‘좁은 문’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계십니까? 구원 받았다 확신하십니까? 마치 이렇게 들립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그리고 저희 교회 오셔서 은혜로운 말씀 들으시고, 꼭 구원 받으세요. 지옥 가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다른 교회(교단)에는 예수님도, 말씀도, 구원도 없는 듯 말합니다. 어찌 보면, 자기들만의 예수님과 자기들만의 천국에 도취되어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도 당신을 알고 계시냐는 것입니다(P. 워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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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주영길 토마스 신부 : 2016년 8월 21일
  |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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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고통없이 영광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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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행복은 외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옵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얼마나 마음에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집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던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행복하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 거미ㆍ개미ㆍ꿀벌의 세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놓고 기다리다가 어떤 먹잇감이 걸리면 피를 빨아 먹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이기주의 인간'입니다.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 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개인주의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 없고, 도움을 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합니다. 열심히 꿀을 따다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주는 삶을 삽니다. 이런 사람은 ‘이타주의 인간’입니다. 사회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유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인은 바로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합니다. 꿀벌 유형을 희망합니다.

인간의 삶을 네 가지로 구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 둘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그대로 살지 않는 사람, 살고자 애쓰지 않는 사람. 셋째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알지만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넷째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사람. 아니,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람은 하늘을 차지해서 행복한 사람이고, 둘째는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며, 셋째와 넷째는 매를 맞아도 덜 맞을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7-48).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함으로써 천상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환상에 잠겨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상을 차지하는 것은 ‘따논당상’이라고 생각하고 특권을 휘두를 뿐 신앙 안에서 ‘내면의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뽑힌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둠속에 던져지고 오히려 이교백성들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안전감에 빠져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나는 구교신자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했다고 자만한다면 공든 탑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방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캐지 않는 유일한 보석은 ‘진주’라고 합니다.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있는 이물질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분비물로 감싸서 생기는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저항과 고뇌’의 과정을 극복해서 탄생한 강함을 가진 보석입니다.

‘조개나 굴’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은 ‘나카’(Nacre)라고 불리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비싸집니다. 그런데 이 나카는 아주 적은 양이 천천히 생기기 때문에 작은 진주도 수개월이 걸리고 큰 진주는 몇 년에 걸려서 만들어 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굴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다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들어오면 굴에게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카를 생산해서 코팅작업을 하든지 아니면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래알을 무시해 버리면 나카를 생산하는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모래 때문에 상처가 나고 대부분의 굴은 아주 죽어버립니다.

이 굴의 선택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여러 종류의 모래알이 자주 들어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성장의 발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회피하여 차차 곪아 스스로 파멸을 가져오고 맙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며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12,11-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나카를 생산하고 코팅작업을 하여 진주를 만들라는 권고입니다. 분명 시련은 더 없이 귀한 은총의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 답은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다. 정말 장차 구원 받을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해 살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느냐? 내가 알고 있잖아요! 물론 개중에는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자기는 잘산다고 하는데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하면 여러분 뭘 생각하십니까? 이건 베드로 얘기하는 거야, 마리아 얘기하는 거야! 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건 네 말이다.”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궁금증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13,2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 속에 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투신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사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힘을 다 쏟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희생 봉사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환호하며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

세상은 지금 당장 편하고 쉬운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그것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있는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바 대로,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문은 결코 요행이나 잔재주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실과 인내로, 사랑으로 통과하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친분을 내세워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13,26). 하였지만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13,27) 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과 친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악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을 잘 알고 믿음의 생활을 오래도록 충실히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꼴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신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가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터에서 상황이나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배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시는 첫째와 세상이 인정하는 첫째가 같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덜 성공한 사람이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희망을 줍니다. 지금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천국문은 바르게 살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가운데 행복을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깨어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준비를 하려는 체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의 처신 때문에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마음의 의지를 굳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슬러 행하려 하느냐에 구원과 저주의 판결이 달려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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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19년 8월 25일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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