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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눈높이 사랑을 향한 버림
조회수 | 53
작성일 | 19.09.07
[군종] 눈높이 사랑을 향한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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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TV광고를 보던 도중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던 카피 문구가 있었습니다. ‘눈높이 교육’. 이 말은 교육자가 피교육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교육을 한다는 뜻으로서 교육자는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교육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눈높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충분히 적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언젠가 어느 대기업의 간부시험 중에는 신세대의 노래 세곡을 불러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기업간부와 일반사원과의 관계가 아무런 연계성 없는 상하 명령 전달 체계에 머물 것이 아니라 보다 밀접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다양한 정보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함을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눈높이’라는 말은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연인은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하고 그것에 맞추어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외에도 연인들은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 서로에게 시선을 맞추려고 하고 자신이 버릴 건 버리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배울 것은 배우면서 결국은 부분적으로 닮은꼴이 되어 갑니다.

이처럼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하는 노력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과 하느님과의 눈높이입니다. 우리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남녀 간의 사랑보다도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통해 이어져 있습니다. 그 사랑의 관계는 이 세상 창조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 왔고 그 사랑의 가장 확실한 징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 미사 안에서 그분의 살과 피를 모심으로서 그 사랑의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은 이런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 있는데 그 관계를 방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과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매우 미미하다는데 있습니다. 아마 자신의 부족함은 살펴보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이런 투정을 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 시선이 너무 높아 우리가 맞추기 어려우니 당신의 시선 좀 많이 낮춰주시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무지한 질문입니다. 이미 그분께서는 우리와 시선을 같이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보다 더 큰 낮춤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과 시선을 맞추기 힘들어하는 것은 하느님의 시선이 높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강렬한 그분의 시선을 계속해서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당신 아들을 통해 가르쳐주신 말씀과 그 행동들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는 것,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따르는 모습이 그분과 눈높이를 같이 하는 길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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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김태완(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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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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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려고 하면 언제나 부족해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이 글은 켄트 키스의 ‘위대한 역설’이라는 글로, 인도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본부 어린이집 벽에도 쓰여져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돌아가시고 그 분이 보내신 편지들이 공개되면서 마더 데레사의 신앙에 대한 고뇌와 번민들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50여 년간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를 하시면서도 편지에서 그 분은 아직도 하느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자 이 글이 떠오르며 ‘마더 데레사께서는 참으로 당신의 십자가를 잘 지신 분이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더 데레사께는 그 의구심이 덜어내고 싶은, 벗어버리고 싶은 자신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끝내 그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끊임없이 물어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이 문제를 온 마음으로 온 몸으로 지고 사셨습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 말이 가장 필요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 말이 가장 절실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그 분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서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 말에 의지하며 한평생을 살아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가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마더 데레사의 말씀에 이 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내 시간도 내 재물도 내 것 전부를 버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을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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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조완(리카르도) 신부
  |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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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안에는 여러 가지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인생의 피할 수 없는 한 부분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인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일 뿐입니다. 그러한 기대는 현재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더욱 무겁고 힘들게 느껴지도록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십자가가 너무도 힘겨울 때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살리시려고 또 구원하시려고 노심초사하시며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의 마음 한가운데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그분의 열렬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의 표현으로 십자가를 보내십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주님께 더 매달리고, 더 의지하며, 더 겸손해지게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우리를 당신께로 더 가까이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가장 강도가 센 애정표현입니다.

오늘 등에 얹힌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고생하시는 분들, 주님께서 주시는 아래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겪는 시련은 모두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시련들입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1고린 10,12-13)

“좋은 약은 입에 쓰다.” 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십자가가 주는 의미를 잘 깨닫고 끝까지 잘 견뎠을 때 십자가는 우리네 영적 성장의 가장 좋은 영약이 될 것입니다.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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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교구 윤원석 스테파노 신부
2016년 9월 4일
  |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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