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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천국행 네비게이션
조회수 | 64
작성일 | 19.09.07
[원주] 천국행 네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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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에게 차를 가지고 서울에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도시 분들의 끼어들기, 빵빵 소리에 쫒기다 보면 "이놈들이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러한 촌놈들에게 하늘에서 큰 선물이 떨어졌습니다. 그 이름하여 '네비게이션' 얼마나 고맙게 쓰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서울,대구, 부산이 두렵지 않습니다. 목표 설정과 믿음, 이 두가지만 가지고 가면 모세가 백성들을 인도하여 축복의 땅까지 가듯이 정확하게 인도 하니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승의 삶을 끝내고 마지막 가야 할 곳은 천국입니다. 그 먼길을, 보이지도 않는 안개의 길을 누가 안내 할까 걱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국행 네비게이션이 있는데 이름 하여 하느님의 말씀, 즉 성경입니다. 성경을 한자로 본다면 聖經인데, 經자는 아주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높은 집이나 축대를 쌓을 때 정확하고 똑바로 쌓기 위해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긴 실을 이에 묶고 밑에 원추형 쇠를 달아서 건축물을 쌓아 올렸는데, 이 도구의 이름이 經이라고 합니다. 經은 높은 건축물을 쌓을 때 없어서는 아니 될 좌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신 목적지를 천국으로 설정한 신앙인의 좌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두가지의 좌표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비움'이요, 또 하나는 '신앙인의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움의 좌표를 주시기 위하여 예를 드시는 데 "나에게 오려면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당신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인연, 심지어는 목숨 마저 끊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진정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가족을 파괴 시키고 산자를 죽이려고 오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산자에게 삶의 의미와 인간의 가치,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기 자신의 소중함 등을 주시려고 오셨고 마지막에는 우리 개개인을 영원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인 즉, 제자가 되는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내 가족에, 내 재산에 종처럼 메이지 않은 자유인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결단의 문제입니다. 복음에서의 '탑'은 포도밭을 감시하기 위하여 짓는 망대입니다. 즉 내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소유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 망대가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기 위한, 하느님의 소유가 되기 위한 영적인 망대를 의미합니다. 또 다른 비유인 임금의 싸움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영적인 투쟁을 의미 합니다. 하느님 나라와 권력의 유혹 앞에서의 인간의 신중한 생각과 현명하고도 결단력 있는 선택을 요구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게는 소유욕에서, 크게는 권력의 아성사이에서 하느님 나라의 선택은 어렵지만은 이것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서 성 요한 카시아노는 세 가지 포기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물질 즉 부요함과 재산에서의 포기를 통한 자유를 두 번째는, 옛 삶의 포기를 통하여 악행과 병든 영혼의 차유를 세 번째는, 미래적 희망을 관조하고 보이는 각종 유혹에서 우리의 정신을 단절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의 의 정신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는 곳에 또 보이지 않는 곳에 하느님이 항상 위에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우산 밑에 한치 앞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선택하기에 도움이 되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파스칼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신이 계시고 안계시고 이런 것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는데, 나는 신이 계신 쪽으로 믿고 내가 만약 죽어서 안계시다고 하면 내가 맑고 양심적으로 살아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안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살고 났을 때 죽어서 그분이 안계셨다고 해도 억울할 것은 없다. 그러니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계신 곳에다가 한 표를 던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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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박영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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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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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흔들리는 연약한 신앙 반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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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에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합니다만 여기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들이 본능 감정 기분 습관이란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그 자체로는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만 실제 쓰여 질 때는 긍정적인 경우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 말들입니다.

예를 들면 「본능적인 행동」 혹은 「감정적인 반응」 「습관적인 행동」 등은 그 자체로는 윤리적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중립적 가치를 가지는 말들입니다만 이러한 말들이 어떤 대상에 적용될 때는 그 대상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 이유는 인간의 본능이 선보다는 악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일 것이고(원죄교리도 첫 인간 아담과 이브의 죄를 우리가 전해 받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본능이 악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임)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본능과 습관에 따른 행동들은 힘들여 배우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는 행동, 인간의 지고의 가치인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행동들은 행동할 당시에는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만 그 결과는 후회와 죄책감을 낳거나 아니면 우리가 소망하는 바람직한 결과와는 동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주의할 점은 본능과 감정 습관 등을 무조건 부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능과 습관 등 이러한 요소들은 육체적 생명을 위해서는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고 특히 가족과 같은 1차 공동체의 삶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본능과 감정을 넘어서는 행위가 본능에 따른 행동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의미에서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추종을 위한 2개의 단절어와 망대 구축과 전쟁 수행의 이중 비유를 들려줍니다.

먼저 예수 추종을 위한 두 개의 단절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들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먼저 「미워하다」란 말은 오늘의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나 히브리어에서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덜 사랑하다란 의미를 종종 「미워하다」란 말로 표현합니다. 때문에 여기서는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가족과 자기 자신을 덜 사랑해야 한다는 비교적인 의미로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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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십자가를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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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루가는 자기 십자가로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란 형벌의 도구이기에 목숨 바침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할 사실은 가족과 자신을 미워하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행동들, 이 모두는 우리의 본능이나 감정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아니 본능과는 정반대 편에 놓여 있는 행동들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본능은 가족과 자신에 대한 배타적이고 편파적인 애정을 추구하고 있고, 거기에 더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는 생명 있는 존재면 무엇이나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욕구인데 이를 예수님이 부정한다는 사실은 본능을 넘어서는 무엇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본능을 넘어서는 의지적인 선택과 같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후반부에 나오는 망대구축과 전쟁수행의 이중 비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망대를 세우거나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기분이나 감정에 얽매여 어떤 일을 시작한다면 결국 끝내지 못할 것이고, 끝내지 못한다면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비유가 주는 의미는 이것입니다. 제자됨의 길은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만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에 먼저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재물과 같은 가장 소중한 것들마저 포기할 용기가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당시 사람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에 휩싸여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본능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오늘의 또 다른 이스라엘인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경고가 이러한 말씀들이 가지는 의미인 것입니다. 감정과 기분, 본능에 흔들리는 나의 연약한 신앙을 반성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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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 09.07
449 52.4%
[원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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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공통점이 뭘까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것이 같습니다. 불교의 핵심교리 중에 사성제(四聖諦)가 있습니다. 사성제의 출발점은 고통입니다. 태어남도,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만남도, 헤어짐도, 성취하지 못함도 고통이요, 만사가 고통이란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입니다.

즐거움을 탐하고 추구하는 갈애(渴愛), 살아남으려는 갈애, 삶에서 떠나고자 하는 갈애 등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그래서 집착을 멸(滅) 하면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바른 수행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명을 유지하고, 바르게 정진하고, 바르게 기억하고, 바르게 집중하면 도(道)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도 예수님을 옳게 따르기 위해서는 바로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고통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의 출발점도 고통입니다. 고통의 극치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에서, 최고의 고통인 죽음에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구원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자기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자기 자신을 얽매게 하는 모든 집착을 버려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여기에 비움의 참 의미가 있습니다.

비움은 자기의 욕망과 소유를 모두 버리는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까지도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순히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기만 했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에서의 비움은 비우는 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한 비움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듯 자기를 완전히 비우면 깨달음을 얻게 되어 남에게 큰 도움을 주겠지만,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것이 그렇게 쉽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작은 부분이라도 지금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제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누고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리고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쉽게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분은 축복이 아니라 십자가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눔과 비움의 생활을 하지 않고 구원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작은 십자가라도 짊어져야 합니다.

좋게 보고, 좋게 생각하고, 좋게 말하고, 좋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짊어지는 작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생명을 좋게 살리고, 좋은 기도를 하고, 좋은 것을 기억하고, 좋은 것에만 모든 힘을 쓰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꽉 채우는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해 넉넉하게 비우는 십자가의 삶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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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손용환 신부
  |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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