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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종말 전의 재난
조회수 | 65
작성일 | 19.11.14
[전주] 종말 전의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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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대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무서운 전염병이 유행한다는 등의 소식이 들려오면, 혹시 종말이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그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마르 13,8)."

이 말씀 앞뒤로 거짓 그리스도들, 종말론자들, 전쟁, 반란, 큰 지진, 기근,전염병, 박해 등이 언급되어 있는데,'그러한 일'이라는 말은 이 모든 일들을 다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먼저' 라는 말은 그런 일들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뜻하는 말인데,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려고 그런 일들을 일으키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런 일들 자체가 종말의 재난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그런 재난들은 늘 있었던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종말 전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긴 하겠지만, 종말이 아니더라도 그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따라서 요즘에 우리가 듣고 보는 재난들이 종말 전의 재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짜 종말의 재난은 루카복음 21장 25절-28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종말의 재난과 종말 전의 재난이 구분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됩니다. 종말의 재난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심판이고, 사람이 뭔가를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 전의 재난은 회개하라는 경고입니다.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회개할 기회도 안 주시고 바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말의 재난은 미리 대비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고, 극복할 수도 있는 재난입니다.

언론에 가끔 '준비족'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대규모 재난이나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 놓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안전한 대피소와 식량과 의약품과 무기 같은 여러 가지 물품들을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어떤 재난이나 전쟁이 닥쳐도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만 살아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 인류가 멸망한 다음에 혼자서만 살아남는 것이 행복할까? 만일에 재난이 전지구적인(또는 전우주적인) 재난이라면 살아남는 것이 진짜로 살아남는 것이 될 수 있을까?그런 경우라면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회개하라고 미리 경고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것은 글자 그대로 회개를 하라는 뜻이지 살아남을 준비를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회개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몸의 생존과 영혼의 구원은 다릅니다.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생존만 생각하는 무신론자라면, 재난에서 살아남더라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하느님의 심판 때에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선 먼저, "남들은 다 죽어도 내 가족과 나는 생존해야겠다."라는 그 이기심부터 버려야 합니다.(자기만 살겠다는 이기심은 나쁜 것이고, 영혼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생존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 '준비족'들의 반대쪽에 무분별한 종말론자들과 광신자들이 있습니다.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주장하면서 생업과 학업을 포기하고 한 곳에 모여서 기도만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모습도 역시 어리석은 모습이 될 뿐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하는 것으로 종말을 대비할 수 있을까?사랑과 선행을 실천하지 않는 기도는 '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7,21).'아버지의 뜻' 가운데 첫 번째 뜻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종말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요즘에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재난의 소식들이종말의 전조인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뿐이지 안 오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과 재림을 준비하는 것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때를 준비하는 것과 사실상 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날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회개와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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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451 29.6%
[전주]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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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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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람들이 성전을 보면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성전이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감탄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보는 사람마다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웅장했다고 전해집니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고 웅장하더라도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라는 말씀은 ‘완전한 파괴’를 뜻합니다.

종말 후의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입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완전히 새롭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는데, 적어도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업적들, 문명과 문화 등은, 그게 하느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하나의 본보기가 됩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성전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건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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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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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라는 질문은, 겉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라는 질문이지만, 뜻으로는 “종말이 언제 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는 일을 ‘종말의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는 질문은, “종말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종말에 관한 질문은, 이미 앞의 17장 20절에서 나왔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이 말씀의 뜻은,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또 종말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은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종말의 날은 ‘종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마르 13,32). 또 그 날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시지 않는다는 말과그 날을 미리 예고하는 표징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어떤 표징을 보게 되면 그 날이 곧 종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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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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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흔히 ‘종말의 징조’ 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즉 가짜 그리스도,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박해 등을 언급하시면서(8절-17절), 그런 일들이 ‘종말이 완성되는 날’의 표징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라는 말씀은, “그 날이 마지막 날은 아니다.”,또는 “그런 일이 ‘종말이 완성되는 날’의 표징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재림 예수’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 종말이 완성되는 날의 날짜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옛날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이 있고, 앞으로도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또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칭 재림 예수’들과 종말의 날짜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사기꾼들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경우, 종말처럼 생각되는 대규모의 참혹한 전쟁들은 인류 역사에서 자주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종말의 재난이 전쟁의 모습으로 닥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전쟁이 혹시 종말의 재난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말의 재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재난은 누구나 그것이 종말의 재난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긴가민가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것은 종말의 재난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종말이 완성되기 전이나, 완성되는 그 날에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또는 일어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전쟁 자체가 종말의 표징은 아니지만, 신앙과 사랑을 증명하는 기회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심판 때에 어떤 선고를 받게 될지를 알게 해 주는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참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을 원하는 자들과 일으키는 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과 평화입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 언제인지, 그 날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즉 언제 그 날이 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가? 피하거나 숨지 않고 예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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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19년 11월 17일
  | 11.16
451 29.6%
[전주] 삶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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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인 삶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 진실을 담고 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제와 수도자가 독신생활을 하는 것은 혼인 생활과 부부간의 사랑을 기피하고 혐오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이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표시입니다. 이럴 때 매임 없이 더 사랑하게 되어 누구보다도 생산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청빈의 삶을 사는 것은 물질적으로 적게 소유하는 모습으로 비치지만, 물질적 욕구에서 초연한 만큼 풍요로운 자가 되어 다른 이들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내 뜻과 생각이 엄연히 있는데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를 때 진정 나 자신이 되며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 말씀이 이처럼 역설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차례나 걸쳐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꿈꿔왔던 스승의 모습과 상반되어 상당히 심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을 끝까지 들어보면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결국 부활에 이르신다는 희망의 예고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전쟁, 반란, 지진, 기근, 전염병, 박해와 같이 거부하고 싶은 내용의 연속이지만 끝까지 들어보면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박해로 인해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려갈 것이라 하였는데, 막상 준비하지 않아도 그들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있도록 언변과 지혜가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초남이의 유항검 복자 가정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우리를 진정 풍요롭게 하시고자 당신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처럼, 큰 부자였던 유항검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풍요롭게 만들고자 교리를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본인의 재산으로 가난한 이들을 힘껏 구제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세의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자 될 수 있도록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자신을 온전히 비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누구보다 부유하였던 복자의 이름인 항검(恒儉)은 ‘늘 검소하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처럼, 그들이 진정 풍요롭고 충만한 사람임이 드러나는 순간은 심문과 투옥과 치명의
순간이었습니다. 유항검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지식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모두가 아주 당당하고도 지혜롭게 묻는 질문에 답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유항검의 가족은 박해를 받고 치명하였지만, 그들의 종착지는 사형장이나 유배지가 아님을 믿기에, 실패한 듯한 그들을 이처럼 공경하고 있습니다.

당장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결국에 초라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지, 아니면 지금과 영원히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자 되어 살고 있는지 점검하면서 복된 삶을 다 함께 살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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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성봉 프레드릭 신부
2019년 11월 17일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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