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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가 묵는구나!”
조회수 | 2,084
작성일 | 04.10.29
오늘 복음에서는 인생역전을 드라마틱하게 전해주고 있다. 자캐오는 돈 많은 세관장이었다. 자캐오의 신체적 특징은 키가 유난히 작았다는 것이고, 한 곳에 몰입하는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한 때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 소원을 이루는데 있어 역시 성격이 한몫 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은 “군중에 가리워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말씀이다.

즉 자캐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고 한번 만나 뵙고 싶었던 것이다.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는 분,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어울리며 희망을 전해 주시는 분,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는 분, 종교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행동하시는 분, 유독 자선과 이웃 사랑을 강조하신 분이라는 소문을 들었고, 그 분을 만나뵙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자캐오는 신체적으로 키가 유난히 작았기 때문에 만나 뵙고 싶은 열정으로, 그리고 한 곳에 몰입하는 성격으로 인해 군중을 앞질러 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 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자캐오와 길을 가시던 예수님의 시선이 마주친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쳐다보시며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묵는구나!”하며 못마땅해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캐오를 죄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아브라함의 자손” 으로 선언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자캐오를 돈만을 밝히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구원을 얻은 사람”으로 선언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자캐오를 자기만을 아는 이기적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나눔에 대해서 적극 실천한 신앙인 중 의 신앙인”으로 선언하신다.

사실 자캐오는 나눔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을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할 만큼 나눔에 적극적이었다. 결국 자캐오는 인생역전을 맛본다. 많은 사람들의 규정을 반대한 예수님의 선언에서 인생역전을 맛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캐오를 죄인으로 규정했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언하신 예수님에 의해 인생역전을 맛본다. 신앙적으로 인생역전의 삶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회개의 삶이다.

루가 3장 8절 이하에서는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라고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라고도 쓰고 있다. 회개는 행실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인 사람이고, 이런 모습으로 인생역전을 맛본다. 그러니 회개의 삶을 살자.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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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강건(빈첸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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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멀리 있는 이들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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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만나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만난 하느님의 모습을 삶으로 드러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를 통해 하느님은벌주고 저주하는 분이 아니라, 살려주고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로 만납니다.

그러기에 오늘 1독서와 복음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사랑의 주님을 만나게 되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1독서 지혜서 저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분,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모두 소중히 여기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사랑해 주시는 분. 이를 강조하기 위해 지혜서 저자는 ‘모두’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복음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관장이든, 부자이든, 키가 작든 상관없이 인간이기에 사랑하십니다. 그가 어떤 모습의 사람인지는 예수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진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의 시선은 가까이 있는 이들뿐 아니라, 멀리 있는 잘 보이지 않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자캐오에게도 눈길을 두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눈에 띄는 거리에 머물고 가까이 있는 사람과 대면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야를 넓혀, 멀리 있는 비록 부자이지만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외면당하는 자캐오를 보시고 그를 먼저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자신에게 시선을 준 예수님,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바라봐주시고 다가와 주시는 예수님에게 자캐오는 이 세상에서 받아보지 못한 관심과 사랑을 느꼈기에, 그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의 가치가 있음을, 쓸모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나눕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은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큰 기쁨을 줍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멀리 있는 이들, 곧 외로운 이들, 외면당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찾아 나서 손잡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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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지철현 대건 안드레아 신부
2019년 11월 3일
  |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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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예수님은 ‘내어주는 기쁨 자체’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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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구두닦이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자 한 사람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와서 소년에게 구두를 닦았습니다. 소년은 구두를 닦으면서 그 승용차를 자꾸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소년은 부자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저 차는 아저씨가 산 거예요?”

부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우리 형이 사주었어.”

그러면서 부자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도 그런 형이 있으면 좋겠지?”

그러자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제가 그런 형이 되고 싶어요. 제 동생이 다리가 불편해서 걸을 수 없거든요.”

부자 어른은 받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구두닦이 소년은 내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출처: 심종미 수녀님 복음묵상 중]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예수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그 원하는 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향하십니다.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은 변화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자캐오는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집에 구원에 내린 것이 아니라 당신을 모신 자캐오에게 구원이 내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은 집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면 구원을 모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 특징이 어떠한지 잘 보여줍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모신 기쁨으로 가진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다면 그런 마음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만 알던 자캐오가 예수님 때문에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모시는 것과 가진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것과 결국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내어주는 것이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반대로 내어주는 것을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내어주라.’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기쁘게 내어주심’ 자체이십니다.

보슨톤에 가면 켄모어 스퀘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켄모어라고 하는 재봉틀 공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켄모어 회사에서 처음에는 재봉틀만 만들었었는데 지금은 냉장고, 세탁기, 전자제품들을 만드는 유명한 회사가 되었습니다.

켄모어 회사에서 재봉틀만 만들어 시판할 때의 일입니다. 외판 사원들 가운데 어느 외판사원은 남들보다 두세 곱절씩 성적이 좋았습니다. 매년 한 번씩 외판 성적이 좋은 사원을 불러서 공로를 치하해 주고 보너스도 주었는데 그 외판사원은 내리 3년 동안 일등을 했습니다.

사장이 그를 불러 좋은 성적을 올리는 성공의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 외판사원이 사장에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장님, 별다른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저는 상품을 팔기 위해 남의 집에 갈 때에는 그 집 문 앞에 서서 제가 결혼했을 때 그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생각해보며 기쁜 얼굴로 그 집 초인종을 누릅니다.”

기쁜 얼굴을 하면 보는 사람도 즐거운 것입니다. 상품 하나를 팔아서 기쁨이 넘쳐흐르는 사람의 상품을 사게 마련인 것입니다. 기쁨이 이미 내가 내어주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러니 기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도 전염되어 기쁘게 내어주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 않으니 내어줄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모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기쁘게 내어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본성상 기쁘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만약 기쁘게 내어주고 있다면 분명 하느님의 본성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내어줌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세관장 자캐오의 집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것이나 자녀가 성공하는 것 등의 모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것을 빼내어 가난하게 만들려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기쁘게 내어주려는 목적의식 없이 예수님께 다가간다면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나를 기쁘게 하여 이웃도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는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당신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기쁨의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그 기쁨의 힘은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당신 태중의 아드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에 모셔 기쁘게 재산을 내어주는 자캐오의 모습은 예수님을 잉태하여 당신을 기쁘게 내어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도 내어주는 기쁨을 배우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갑시다. 예수 그리스도만 함께 계시면 굳이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체가 나를 감염시켜 변화시키는 ‘기쁘게 내어주심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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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11월 3일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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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타인을 대하는 나의 태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타인을 대할 때 항상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이 긍정적일 때보다는 부정적일 때가 더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보여주는 긍정적인 태도와 부정적인 태도는 상대방에게도 큰 영향을 줍니다. 이에 대한 전문 용어로 ‘낙인효과(烙印效果, stigma effect)’와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낙인효과’는 과거의 좋지 않은 경력이 현재의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나쁜 사람으로 낙인 받으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나쁜 행동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타인에 의해 비행자로 낙인찍힌 자는 결국 비행을 저지르게 되고, 타인에 의해 바보로 낙인찍힌 자는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사회제도 등을 근거로 하여 특정인을 범죄자로 인식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이 범죄자가 된다는 낙인이론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와 반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기대를 받으면 이 기대에 부응하기위해 노력하게 되고, 실제로 긍정적인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러한 ‘낙인효과’와 ‘피그말리온 효과’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따르면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지나가는 길에 서서 예수님을 보면 되는 것을 굳이 왜 나무 위에 올라가서 봐야 했을까? 키가 작아서 그랬다고는 하는데 키가 작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앞에서 보면 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자캐오가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자캐오의 직업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캐오의 직업은 세관장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그 세금을 거둬들이는 사람들이 같은 동족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족 사람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착취나 부정부패가 비일비재(非一非再)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캐오 또한 사람들의 그러한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예수님을 보고 싶기는 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자신 있게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자캐오는 결국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자캐오를 보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자캐오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말하며 자신과 가까이 하지 않는데, 사람들의 말은 신경 쓰지 않으시고 자신의 집에서 식사까지 하시겠다고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뵙고 자캐오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 8).”라고 말합니다. 자캐오는 죄인이라 불리는 자신을 사랑으로 대하시고, 똑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인정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변화합니다. 이것이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의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캐오 이야기를 통해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도 자캐오를 아무런 선입견 없이 한 인간으로 대하신 예수님처럼,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부족함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은 참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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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석재 안드레아 신부
2016년 10월 30일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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