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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교회가 맞습니까?
조회수 | 2,385
작성일 | 07.01.19
각계의 지도자와 지식인 그리고 종교인들이 양극화를 걱정하는 모습은 너무나 자주 보지만, 정작 기득권을 양보하거나 포기하며 그 간극을 메우려 행동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한 편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은 그 무력함에 절망하며 빈곤의 대물림을 숙명처럼 받아들입니다. 양극화는 두 세상, 사람이 사람인 세상과 사람이 아닌 세상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게다가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교묘하게 조작된 세상살이의 상식은 인간의 공동체 삶을 거리낌 없이 파괴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나 있음직한 적자생존과 무한 경쟁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낙오자를 양산하고, 그도 모자라 그들을 보잘것없는 사람, 쓸모 없는 사람으로 철저하게 짓밟습니다. 겉보기는 인류요 공동체(人類, 共同體)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닌 세상이라면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자주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으며…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헌장 1항)로서,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하나의 목적을 추구한다”(사목헌장 3항).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이 무엇인지 교우라면 모를 리 없습니다. 혹시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분이 하신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서 그분이 주실 복(福)만을 마음에 담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혹세무민(惑世誣民)한 탓일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은 진리를 증언하고 구원하고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으며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벗으로 삼아 그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포와 가르침과 행적은 바로 지상에서의 하느님 나라 실현이었으며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1,18-19)”하는 그 일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을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십자가가 야경을 장식하는 세상은 결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아버지의 뜻도, 예수님께서 실현한 아버지의 나라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것은 고사하고 화려한 성전에서 거룩한 목소리로 주님을 노래한다면 겉은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여 교회의 본래 모습을 밝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 서울대교구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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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루가 15,7)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 비애를 느낍니다. 그것이 귀한 것일수록, 공을 많이 드린 물건일수록, 또한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 비애의 비중은 더 크게 마련입니다. 아담은 잃은 데서 오는 설움과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애통함, 그리고 후손들이 자기 탓으로 고생할 것 등을 생각하고 애통해 했을 것이며 예수님이 사랑하던 나자로가 죽고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보시고 흘리신 눈물도 잃은 까닭이었습니다. 죽는다는 것, 멸망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잃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 물건을 되찾고, 잃었던 사람이나 물건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내하려 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러한데 정신적, 영적 손실이나 분실에 대해서는 왜 그렇지 못할까요? 죄로 자신의 영혼을 잃거나 자녀들이 손해를 보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욕심과 이기심 때문인가요? 어떤 것이 정말 이기적입니까? 정말 잃어서는 안될 것에는 무심하고 잃어도 좋은 것에는 그토록 관심이 크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자 요한도, 예수님 자신도, 첫 강론에 <회개하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가 13,3)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유로써 또 말씀하시길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 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 쓸데 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루가 13,6-9)고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 즉 선행을 해야 할 사람, 다시 말씀드려서 회개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열매를 맺는 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미루지 맙시다. 죄인이 회개하면 천상의 성부와 그 천사들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를 우리는 복음에서 밝히 볼 수가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잃은 것을 찾은 기쁨을 알려 주셨고,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 등은 정말로 우리를 감동케 하는 신적 자비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읊은 예수님의 노래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말 안 듣고 언제나 속을 썩히는 자식이 밉다 밉다 하다가도 막상 그 자식이 병들었거나 집을 뛰쳐나가 몇 일이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불안과 괴로움으로 견딜 수 없어질 것입니다. 병든 자식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며 돌보게 될 것이고, 집 나간 자식을 찾기 위해선 온갖 방법을 다 하게 될 것입니다. 찾다 찾다 지쳐서 절망 상태에 빠져 주저앉아 있을 때, 그 자식이 느닷없이 나타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그 잘못을 나무랄까요? 아마 정신없이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퍼부으며 오히려 애비가 잘못했노라고 하겠지요? 이렇듯 우리에게 회개한 영혼에 대한 기쁨과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시니 진정으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죄인의 회개를 고대하시는 주께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러 주시고 그 기회를 몇 번이고 만들어 주시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시며 혹 잃게 되면 악착같이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거나 찾을 수 없을 때 자기의 존재 의식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도 죽는 것입니다. 찾는 정도로 사랑을 측량할 수 있고 또 찾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 이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놔 두신 채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신 주이십니다.

형제 여러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오늘 이 땅에서 가난하고 소외되며 고통받는 이웃형제들에 다름이 아닙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웃형제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라 하신 말씀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고, 또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과 교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회개하는 길로 가는 일임을 다시금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이웃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자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좋으신 아버지께 우리도 사랑을 드립시다. 그리고 그분이 애타게 찾아 나서시는 잃은 양들을 찾는데 우리도 힘를 보탭시다. 그것은 그분께 기쁨이 되기 때문이며 사랑으로 응답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최익철 신부
  |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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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에서 해방되는 오늘

전도(顚倒)된 가치관, 비 윤리적인 도덕관으로 퇴락해 가는 인간들의 모습 안타깝도록 처절하기만 합니다. 약물, 행위, 대상에 중독된 사람들도 모두가 구원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를 온갖 스트레스와 불안에서 건져 주어 편안하고 즐겁고 더 강하게 해 줄 것이라는 착각과 호기심에서, 또 재미로 시작한 약물과 행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달콤한 미끼와 무서운 덫입니다. 사람이 어떤 물질이나 대상에 중독이 되면, 지능과 정서, 의지는 바닥에 떨어지고 영혼마저 병들고 맙니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다음에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결심은 하지만 어리석은 악순환만 계속됩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로마 7,19).

중독이란 병은 신분, 교육정도, 직업, 경제상태, 연령,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교우들과 관계를 돈독히 한답시고 술을 마셨고, 때로는 괴로움을 달랜다고, 잠시나마 편안한 마음을 가지겠다고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술이 제 삶의 중심이 되어버렸고, 마침내는 알코올 중독 치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술이 저에게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구속하고 불안한 생활로 몰아갔습니다.

중독자들은 자기만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신체나 정신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중독물질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타락했거나 의지가 박약해서가 아니라, 중독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직도 덜 맞아서 엇나가기만 하는가? 머리는 상처투성이이고 속은 온통 병이 들었으며 정수리까지 맞아 터졌는데 짜내고 싸매고 약을 발라주는 이도 없구나”(이사야 1,5-6). 중독자들은 자신에게 분명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중독 사실을 합리화하고 부정하며, 중독의 원인들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의지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중독으로부터 명백한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중독의 상태에서 진정으로 변화되어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중독으로 인해 와해된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의탁할 때 중독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

모든 중독에 빠져 있는 분들과 가족들이여! 오늘 주님의 말씀에 믿음과 희망을 가져 보십시오.

▶ 허근 신부
  |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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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보다 갈리래아를?

어느 날 새영세자가 "신부님! 저는 신부님이 공산주의자인줄 알았습니다. 예비신자 교리 시간 내내 나누며 살라는 말씀을 하도 많이 하시길래요!"하고 지나가는 말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웃으며 넘겼지만 천주교회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도 끊임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나눔의 삶을 강조합니다. 왜 그렇게 나눔의 삶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의 첫 출사표를 던지신 곳은 갈릴래아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갈릴래아보다 더 중요한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요, 이스라엘에서 가장 상징적인 곳인 예루살렘에서 첫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시고 변방인 갈릴래아를 택하셨을까요?

갈릴래아 지역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대단히 천대받던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고 멸시하며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로 단정지었지요.

이스라엘 국경 부근에 있는 갈릴래아는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 외적의 침입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자연 이민족들과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대다수가 혼혈인으로서 종교적으로 순수하지 못했던 곳이었기에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또 갈릴래아는 경제적으로도 착취 받던 곳이었습니다.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였기에 땅이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했던 곳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가장 착취가 심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땅에서 나는 생산물이나 물고기 어획량의 대부분을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몇몇 기득권층이 수탈해 갔기 때문입니다. 땅의 소유주도 대부분 이들 예루살렘의 지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착취 받고 멸시 받으며 힘겹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이 갈릴래아였던 것이지요. 이곳은 억압의 땅, 고통의 땅, 시련의 땅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여러 지방에서 가르치셨고 고향인 나자렛 회당에서는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고 당신의 관심이 가난한 이들에게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이셨기에 복음 선포의 장소로 갈릴래아를 택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시선은 기득권층이 아니라 소외계층,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성한 사람들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외된 이들에게만 관심을 쏟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반발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왜 죄인들과만 어울리느냐고 따져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답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 9,12).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사목자로서의 보람은 역시 예수님 말씀을 실천할 때입니다. 1998년 'IMF'가 시작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 홀몸노인들에게 무료급식을 시작했습니다. 목요일마다 150~200명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넉넉하지도 않은 작은 성당에서 그 많은 식구들을 어떻게 다 먹일 수 있겠느냐고 신자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랑의 쌀통'과 '사랑의 헌금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밥 할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 숟가락씩 쌀을 떠놓고, 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1000원씩만이라도 모아서 '사랑의 쌀통과 헌금함'에 넣어주십시오"하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랑의 식사는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4년이 지나 본당을 떠날 때는 통장에 수천만원의 잔고가 쌓였을 정도였습니다. 사목자로서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지요. 이렇게 예수님 말씀을 실천할 때 주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고, 또 그 체험이 우리 믿음을 더욱 탄탄히 이끌어줌을 알기에 신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제일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골이 깊어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더 살기 힘든 세상이 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들 노력이 더욱 절실한 시대입니다. 주님의 몸을 모시고 예수님과 일체가 된 신자들은 그분의 삶을 사는 제2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이기양 신부
  |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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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오늘 유다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서에 나타난 예언을 주님의 사명 삼아 선포해주셨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의 성령은 왜 예수님을 가난한 이들에게 보내셨을까? 부자들에게 보내서 부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면 부자들이 많은 돈을 내 놓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할 수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기회를 제공하거나 특혜를 베풀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가시지 않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신다.

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고 소박해 보인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저 오늘 하루 먹고살고 자기 가족이 별일 없이 단란하게 하루를 마치기를 바란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어서 빨리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지 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정직하게 열심히 일할 뿐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이나 일하기 싫어하고 꾀를 부리는 사람들만이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아 가기 위해 꾀를 부리고 범죄를 저지른다.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저 그날 하루를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더 주님을 기다린다. 주님께서 자기를 건강하게 해 주셔야만 자기가 일하면서 살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자기를 생각해주지 않고 돌봐주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고 또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주님만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자기를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부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인다. 자기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하기 위해 많은 신경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자기 돈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돈 때문에 다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 말고도 자신들을 기쁘게 해주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얼핏 보면, 예수님 보다 자기 재산과 그 재산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헛것과 허상의 것들에게서 위안을 느끼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외롭고 깊은 공허감 속에서 방황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된 것인양 기뻐하고 감사드리지만,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돈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데 혹시나 주님께서 자기의 것을 내놓으라고 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듯하다. 어떤 사람은 가난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성서 자체가 읽기 부담스러워 하는 것도 본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비참한 사람이다. 현세에서 자기가 의지하고 믿는 것이 결국은 다 없어지고 사라져 버리게 되거나 아니면, 자기가 먼저 그것들을 다 두고 외롭고 쓸쓸하게 죽음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고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서 도우실 수밖에 없는 것이고, 주님에게서만 희망을 이룰 수 있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가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우리가 재산을 가졌다면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눈다. 그리고 재산을 많이 가지지 못했다면 우리의 삶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어 예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전하고 주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사도들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빌자면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는"(골로 1, 24) 주님의 제자들이 걷는 길이다.

우리는 우리도 예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웃과 함께 우리를 나누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시고 나누어 주셨기에 우리가 구원되었고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나누는 것의 몇 십 배 몇 백 배로 주님께로부터 되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또 바라기에 주저없이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알기에 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증거해야만 우리가 함께 다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예수님의 오른팔로서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가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의 구조와 굴레 속에 갇히고 묶인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사랑의 포로가 되어 세상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의 이득에 눈멀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눈 뜬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회의 자리와 권력과 재물에 눌려 지치고 힘들게 하루 하루를 마치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꺼이 일하며 살아가는 자유인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채움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서 이루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까?

주님 은총의 해가 올 한 해 여러분의 삶을 뒤덮길 바랍니다. 아멘.

▶ 심흥보 신부
  |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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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먼 이에게 눈을!

루카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였는지를 오늘 대희년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실현해주신 분이십니다. 특별히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에 관하여 예언한 두 본문을 루카는 선택해서 하나의 본문으로 엮어서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한 본문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이고, 다른 한 본문은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이사 58,6)입니다.

루카가 위의 두 본문들을 하나로 엮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메시아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을 실천하시는 분이심을 루카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이란 값비싼 희생제물이 잔뜩 있는 그런 제사를 많이 바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서 기꺼이 가난과 억압과 구금을 감수한 이들을 위로해주고 해방시켜 주며, 병든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주는데에 있습니다. 이런 일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람이 되시어 오셨습니다.그런데 흥미롭게도 루카는 치유가 필요한 병든 이들의 대명사로 “눈먼 이들”을 내세웠습니다. 귀가 먹거나 팔다리가 마비된 사람, 암에 걸리거나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 아니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만 언급되고 있는데,

눈먼 사람은 치유가 되면 눈을 떠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눈먼 사람은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서 대부분 눈으로 보는 데에 불편을 겪지 않기 때문에 자기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자기 욕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자기가 한 행동 때문에 그들이 기쁜지 슬픈지 화가 나는지 알지 못하고, 또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도 않습니다. 또 다른 욕심이 발동할 때까지 자기 욕심만 채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자기 안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에 불의가 저질러지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그는 알지 못하고, 또 그런 것에 사실 관심도 없습니다. 일단 나만 괜찮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탐욕이나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영적인 눈을 뜬 사람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눈먼 이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기를 바라십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올 한 해 우리 모두 세상의 불의를 고발하고, 참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한해로 만들까요? 우리를 통해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완성될 수 있도록, 우리 올 한 해에도 힘을 냅시다.

▶ 신희준 신부
  |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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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587년.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 앗시리아에게 멸망한데 이어, 유다인들은 바빌론에 점령당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유다인들은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러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버리 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것처럼, BC 538년 이방인의 왕인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의 마음을 이끄시어, 나라를 잃고 유배생활을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나라를 잃고 신앙을 잃어버린 동족 유다를 보며 슬퍼했지만, 유배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에게 하느님께서 해주신 일(현존하는 하느님의 행동)을 깊이 깨닫고 성전복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유다인들과 함께 성전을 복구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통해, 기도하는 공동체, 주님의 삶을 사는 공동체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유다인들과 함께 회당에 들어가시어 성경, 이사야 예언서를 풀이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주님의 영이 내리셔서 그 말씀의 힘으로 회당에 함께 한 공동체의 구원이 그 자리에서 실현되었음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구원의 말씀은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실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주님을 박해했던 자신을 인정하며 굳건한 신앙으로 새롭게 태어난 바오로 사도, 그는 항구 도시이며 상업과 공업이 발달한 코린토 교회에서,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해주신 일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맡기고 살아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주님의 지체임을 깨달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의 행동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한 구원자는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삶에 주님의 영을 내리게 하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해서 윤리적으로 풍기문란 했던 코린토 교회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음을 간직했던 사람에게는 주님의 영이 내리시어 구원된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해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매일 기도 중에 예수님의(하느님이 하신 일) 현존을 체험합니다. 이때 두려움의 영이 아닌 하느님의 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정화, 조명, 일치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영의 움직임인 ‘사랑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그 사랑 안에 충분히 머문다면, 이것이 우리 마음에 의식화되어 주님과 함께 사랑의 움직임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삶의 원동력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기쁘고 의미 있는 일인지를 깨달아 더욱 보람 있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창훈 바오로 신부
▥ 2016년 1월 24일
  | 01.21
448 54%
[서울]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

▪ 참 구세주 예수님 사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누구이기에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요한 3,16). 비참한 상태에 놓인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하느님은 인간이 되셔서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참으로 구원하실 수 있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의문이고, 복음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특히 루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복음 선포 활동(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며 그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이제 펼쳐지는 예수님의 활동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고, 부활로써 완성됩니다. 그 활동 내용을 압축해 예수님 사명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사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사명과 동일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 사명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계속 해야 할 일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교회는 그런 일, 곧 예수님 사명을 오늘날 그대로 지속하는 일에 왜 이렇게 낯설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왜 교회를 찾아오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았으니 참 좋습니다. 그런데 힐링이 교회 사명까지 가로막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과 행동을 그대로 본받으려는 교황님의 말씀과 행동도 못마땅하게 여겨서는 안 되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씀하시며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평화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진짜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거치면서 많은 제자들이 떠나간 다음 남은 제자들을 찾아 선물로 주신 ‘영원한 평화’, ‘완전한 평화’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요청

“말과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 안에 갇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존엄성을 빼앗긴 모든 이가 다시 그 존엄을 찾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해야 하는 신앙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 12,8). 사도의 이 말씀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16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온 세상에 단순한 복음적 말씀과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교황님이 단순히 브랜드 가치로만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현재 교황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 말씀, 교황님 말씀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생생하게 실천해야 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몫입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자신 안에 갇혀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세계 도처에서 평화신문을 읽고 있습니다. 같은 질문을, 여러 나라에 계신 독자들도 살고 있는 그곳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심각하게 성찰하고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이 일은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이끌어주셔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외칩니다. “오소서, 성령님!”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1월 24일
  | 01.22
448 54%
지난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하춘화 노래 55년’ 기념 공연을 보았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하춘화 씨가 교구장님을 초대하였고, 교구청에 있는 신부님들 중에서도 원하는 분들은 함께 하였습니다. 지난 55년 동안 하춘화 씨는 2,500여곡의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공연은 8,500회 이상을 하였다고 합니다. 공연도 재미있었지만 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춘화 씨는 모든 공연의 수익금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나누었다고 합니다. 사회를 보았던 이상벽 씨는 그간의 나눔은 200억 원은 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함께 나누고, 수익금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부하는 모습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하춘화 씨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기쁨과 위로를 주는 노래를 계속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을 ‘몸과 지체’로 설명하곤 합니다. 우리의 몸은 인격과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몸은 많은 지체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지체들이 원활한 활동을 하도록 산소, 영양분, 물을 공급해 줍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느끼고, 만지고, 걸을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통합된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이것은 지난 45억년 동안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낸 생명의 생존 방식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몸과 지체’의 지평을 확대시킨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정, 이웃, 사회, 국가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와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제 인류는 단순히 산소, 영양분, 물을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상, 이념, 교육, 철학, 예술, 신화’라는 자양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은 지평의 확대와 연대가 있었기에 독수리처럼 높이 날지 못해도, 사자처럼 용맹하지 못해도, 곰처럼 힘이 세지 못해도, 치타처럼 빨리 달리지 못해도 찬란한 문명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눈,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손, 예수님의 입, 예수님의 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들이 받아야 할 영양분은 예수님의 말씀, 삶, 표징이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오로 사도다운 통찰입니다.

중국의 한 대나무는 심으면 7년 동안은 거의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8년째 되면 크게 자란다고 합니다. 7년의 시간이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7년의 시간은 성장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준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준비는 소홀하게 됩니다. ‘건강, 가족들의 사랑, 친절, 자선’과 같은 것들의 성과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정말 필요한 것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전체성의 원리와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이런 점을 무시 할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지게 됩니다.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 지구촌의 전쟁은 바로 이런 오류에서 출발합니다. ‘나비 효과’라는 말이 있듯이 지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세워지는 성공과 발전은 결국 또 다른 아픔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균형 잡힌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말해주고 있고, 그런 균형 잡힌 삶은 말씀에 충실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에 앞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읽으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1월 24일
  | 01.24
448 54%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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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을 맞이하며 교회 공동체는 첫째 독서로 느헤미야기 8장을 읽습니다. 에즈라 사제가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율법서를 펴서 읽자 온 백성은 “아멘,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이 대목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자손들에게 하느님의 법규를 일러주자 온 백성이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탈출24장의 장면을 상기시킵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에게 (마치 시나이 산에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에즈라 사제는 율법을 읽어주고, (마치 시나이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백성은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나이 사건이 재현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금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를 회복합니다. 이는 그 백성에게 꼭 일어나야 할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전을 새로 세우는 것 못지않게, 그렇게 이스라엘을 외적으로 다시 세우는 것 못지않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유다전통의 영역을 넘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방세계에서도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 바오로는 코린토로부터 공동체의 분열에 대한 암울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코린토 공동체에 편지를 쓰게 됩니다. 오늘의 독서인 1코린 12장에서 바오로는 교회 공동체를 (한 성령을 받아 마신) 한 몸으로, 그리고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을 그 지체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콜로 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그 몸의 머리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지만, 그 다양한 지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함을,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함을 바오로는 역설하는 것입니다.

루카는 어느 안식일 나자렛의 회당에서 있었던 일을 감동적으로 전합니다. 회당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의 한 부분을 읽고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루카 신학의 핵심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예언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예언이 성취되는) 실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는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해방과 은혜로 특정되는 시대입니다.

연중 제3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이렇게 새로움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며, 이방세계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는 새로운 사건을 마주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며 에즈라와 바오로, 그리고 루카는 단지 그 새로움을 기뻐할 뿐 아니라, 그 새로움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함께 읽은 하느님 말씀은 2019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서두에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교회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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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 2019년 1월 27일
  |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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