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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예수, 기쁜 소식으로 오시는 분
조회수 | 2,217
작성일 | 07.01.19
몇 십년 전, 이땅에 TV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의 어느 이른 봄날, 한 공동체의 몇 사람이 뜻을 모아 깊은 산골 작은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전기도, TV도 없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그곳엔 한센병 환우가정 몇 집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방문자들은 TV 한 대와 전기를 생산하는 소형 발전기를 짊어진 채 개울을 건너고 험한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 마을에 닿았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은 어둠에 버려졌던 마을에 전기를 일으켜 환한 천지로 바꾸어 주었고, TV를 켜주어 온 세상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가난하고 볼 수 없는 이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성탄 축제를 지내고, 새해를 맞은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습니다. 연중 제3주일을 지내는 오늘, 예수님은 해방의 기쁜 소식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 고을로 가시는데, 나자렛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공생활을 위하여 떠나실 때까지 머물러 사셨던 고향입니다.

안식일에는 늘 해오던 대로 마을 공동체가 회당에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봉독하며 기도를 드리곤 하였는데, 그날은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오셔서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을 읽으셨습니다. 바로 이 내용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한 마디로 요약해 주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며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자유를 누리고 잘 볼 수 있고, 굶주리지 않고 편안히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중의 대부분은 겉으로 큰 불편없이, 묶여 있거나 굶주리거나 하지 않고, 잘 보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살펴보면 우리의 속마음은 내면의 삶까지, 영육이 다 건강하고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마태 13, 13) 우리는, 자주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죄악에 매여 삽니다. 자신의 주장이나 교만에 묶여 살고 있습니다. 눈이 가리워져 하느님의 사랑도, 이웃의 아픔도 보지 못합니다. 주님의 길도 목자의 손짓도 못 본 채, 다른 길로 빠져듭니다. 속된 유혹에 빠져 악의 세력에 눌려 살며, 닫혀진 마음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잃고 초라하게 살아가곤 합니다. 이러한 가난하고 묶이고, 눈 멀고 억눌려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말씀과 행동으로 구원을 이루시며 보지 못함과 가난에서 구원해 주시고 억눌림과 죄악으로부터 해방을 이루어주십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을 내세우며 자만하는 닫힌 마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지만, 물질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자신의 부족함과 비참함을 솔직히 고백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리고 신뢰하며, 하느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억눌리고 눈먼 우리 많은 지체가 해방을 맞아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었으니, 성령의 사랑으로 서로를 존중해주며 따뜻한 배려로 일치와 사랑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님 앞에 다같이 소중한 우리 모두는, 높고 낮음도 없는, 아무런 차별도 없는, 다만 한 몸입니다. 따라서 고통도 함께 나누고 영광도 함께 누리며,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행여나 내가 더 잘났다는 우월감과 자만에 빠져 "나는 네가 필요없다"고 남을 배척하거나, 약자라고 무시함으로써 또 다시 우리 이웃을 억압하고, 묶어두고, 눈 멀게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바깥 세상의 많은 가난하고 눈 멀고 묶인 이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모든 이가 해방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은총의 해'를 노래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 이성길(바오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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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려면 생명의 청지기가 되어야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은 금세기가 지나면 지구온도는 5.8도 오를 것이고 해수면은 최고 88cm까지 올라 갈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농경지 토양 속으로 해수가 침투하게 되고 일시적 또는 영구적 범람으로 인하여 전 세계 농업 지대의 30%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남극 내륙빙의 2차 용해, 북극, 그리고 그린란드 빙상 용해가 훨씬 더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대양의 염도를 낮추고 그것은 다시 멕시코만류와 같은 해류들의 해양순환시스템을 붕괴시킬 것이고, 그런 현상이 지속되면 겨울에도 온화한 북미와 북유럽은 꽁꽁 얼려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온난화는 냉각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화석연료의 사용을 중단한다 해도 지구는 최소 150년 동안은 계속 가열 될 것이고, 해양은 적어도 1,000년은 온난화가 지속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기 중에 존재하는 온실가스의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잔류기간 때문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다양한 현상은 결국 식량대난으로 이어져 인류 생존에 까지 위협을 줄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헤들리 센터(영국 기상관계 기관)는 2100년까지 지구의 3분의 1이 사막화될 가능성이 높고, 수백만명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뭄이 22세기로 넘어가면 지구표면 절반 이상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경제 개발 정책으로 인해 심각할 정도로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아시아 전체 면적 43억ha 중 17억ha가 이미 사막화로 황폐화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사실적으로 말하면 지구온난화 때문입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물들어 지나치게 화석연료를 많이 사용하고 물건을 함부로 소비하고 내다버리고 마구잡이로 허물고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난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살아야 덜 소비하고 덜 버리고 덜 허물면서 자연과 사람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나없이 부자로 살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는 지금 언제 촉발할지 모를 정도로 아주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종말의 시간을 24시로 볼 때 1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지구에서 우리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삶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말대로 10년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이 10년 안에 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을 만들어 내야만 인류와 이 지구의 미래가 있습니다.

지구를 살리고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화석 연료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태양, 풍력, 조력, 생체, 지열, 수소(바닷물 1리터에 30만원어치의 에너지화가 가능) 등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껴 써야 합니다. 자동차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에어컨과 냉장고 사용을 자제하고, 보일러 온도를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외국 여행도 자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행기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3%가 항공기 운항 때문입니다. 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해가 태평양보다 40배 오염이 많이 되었다고 합니다.

셋째, 쓴 자원을 재활용해야 합니다. 고물장수가 고물을 수집해서 재활용하듯이 가능한 한 자원을 재활용해야 합니다. 소비는 미덕이 아닙니다. 소비는 죄악입니다. 자본주의의 병폐는 쓰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국 이 논리가 지금과 같은 생명의 위기를 가져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넷째, 친환경 농산물 구입하는 것입니다. 동해나 남해의 적조현상과 석화 현상의 주범이 바로 농약과 비료입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환경용량도 한정되어 있기에 1차적으로 농민들이 앞장서서 화학비료 농약의 의존도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소비자들 또한 농약과 비료로 지은 관생농산물을 멀리하고 가격이 비싸더라도 친환경 농산물을 구입해 먹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난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믿고 가난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덜 먹고 덜 입고 덜 쓰는 가난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 지구는 우리만 살고 끝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후손들이 자자손손이 살아야 될 텃밭이며, 뭍생명들의 보금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텃밭과 뭍생명들의 보금자리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직면하는 것을 막고 이 지구에서 살려면 지구의 생명체를 지키는 청지기로서의 우리 인간의 역할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인간과 지구의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김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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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명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루카 복음의 시작 부분을 소개하고 있는데, 복음의 도입 부분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복음이 테오필로스에게 쓴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를 위해 열려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한 개인을 위해 쓰였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이에 대해 암브로시오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루카 복음은 ‘테오필로스’, 곧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를 위해 기록된 복음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 복음은 여러분을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기록된 복음일진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임무를 다하십시오. 성령의 신비 안에서 맺은 친구의 서약을 부지런히 지키십시오.”

성인의 말씀인즉 복음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접하는 우리 모두는 복음에 기록된 대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완수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이야기 속에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시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우리가 완수해야 할 사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가난이 무엇입니까?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라고 하셨는데 잡혀간 이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라고 하셨는데 눈이 멀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셨다는데 억압받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인으로서의 우리 삶의 기준은 하느님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하더라도 하느님을 모른다면 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내가 두 눈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다면 나는 눈이 먼 사람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하더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복음적 가치를 무시하며 살아간다면 나는 억압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우리는 진짜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복음적 가치를 사는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며 새로운 한 주를 힘차게 살아갑시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안동교구 사공균 알로이시오 신부
▥ 2016년 1월 24일
  |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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