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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감사합시다, 그리고 찬미합시다.
조회수 | 2,056
작성일 | 07.01.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은 보게 하며, 억눌린 이들에게는 자유를 주는 은총의 해를 선포하셨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 졌다."라고 단정 지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2000년 전에 일회성으로 그쳐서야 어디 복음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루어지는 말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복음말씀이 어느 특정인만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면 지금 우리를 억누르고, 눈을 멀게 하며, 묶어놓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를 억누르고, 눈멀게 하며 묶어놓는 것들이 어떤 것인가?

저는 매주 토요일 정신 지체 장애인들이 있는 곳으로 미사를 나갑니다. 그분들이 보호 작업장에서 한 달 일하고 받는 수당은 2만원도 채 안되지만 토요 특전 미사에 헌금을 하기로 했습니다. 간혹 1000원을 내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이 100원 동전 한 닢을 내던가 아니면 일회용 커피믹스(mix-coffee) 한 봉을 봉헌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아주 귀하게 생각하는 돈에 대한 개념이 없는 분들이십니다.

지난해 저는 그곳에서 짐을 풀고 쉬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문을 얼어놓고 어디를 다녀왔는데, 그곳 가족 중 저의 방을 방문한 분이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텔레비전 위에는 동전을 넣어두는 통이 있었고, 그 통 옆에는 천원짜리 지쳬도 있었는데, 지폐는 그곳에 고스란히 있었고 동전만이 없어졌습니다. 아마 그분은 동전으로 현관 앞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보고 배운 것은 가진 것은 없지만 매일이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마음과 정신이 편안하고 즐거우면 삶이 행복하게 여겨지지 않을까?'하는 것.

정신의 세계를 물질로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삶을 다할때까지 정신적으로 만족함을 느낄 수 없지 않을까 합니다. 아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은 정신을 충족시키는 것이며, 정신적으로 만족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삶 속에서 콧노래가 나올 수 있을 때, 우리는 나의 삶을 억압하고 묶어 놓고, 눈이 멀게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요.

▶ 배종호 토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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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 신, 구약 성경의 주제

구약성경은 총 46권입니다.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로부터 구약성경의 끝인 말라키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구약성경의 그 방대한 양이 한결같이 기억하고 있는 구약의 위대한 사건이 있으니 ‘탈출기’가 그것입니다.

구약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 노예였다가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과 은총으로 그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구약의 모든 성경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약의 주제를 말하라면 단연코 ‘탈출기(출애굽)’입니다.

신약성경은 총 27권입니다. 그리스어로 쓰여졌습니다. 신약성경 역시 마태오 복음서로부터 요한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잊지 않고 있는 유일한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부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을 신약성경 모두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약의 주제는 ‘부활’이 됩니다.

그런데 구약의 ‘탈출’을 ‘파스카’라고 부르고, 신약의 ‘부활’ 역시 ‘파스카’라고 부릅니다.

‘구약의 탈출=파스카’는 육체의 노예로부터의 해방, 자유며, ‘신약의 부활=파스카’는 죄의 노예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신,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는 파스카, 곧 자유와 해방인 것입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육체와 죄의 종살이에서 허덕이는 모습에 견딜 수 없으시어 당신이 친히 이 세상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을 오늘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 18~19)

이 말씀에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사명이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가로막는 그 어떤 체제와 권력, 이념과 사상, 국가와 종교에 과감히 맞서시어 자유와 해방을 되찾아 주시겠다는 선언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기쁜 소식이며 또한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정신인 것입니다.

▶ 자유와 해방을 살아야 할 우리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 숨막히던 식민지 시대에, 왕족과 귀족, 평민과 노예가 뚜렷했던 계급화 시대에, 남자와 여자의 불평등이 극심했던 시대에 폭탄과도 같은 혁명적인 선언이 선포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6~27)

2천년 전 당시 이 같은 자유와 해방을 사도께서 자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예수님께서 일찍이 선포하셨던 자유와 해방의 가르침이 그 밑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공동체는 진실로 그 가르침에 충실히 살았습니다.

실로 그리스도교가 2천년 역사 동안 그토록 숱한 박해를 받았던 까닭도 이 자유와 해방을 만민 안에 끝까지 살고자 노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뚜렷한 계급사회 안에서 그 모든 계급과 차별의 장벽을 걷어 내고자 애썼던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도 이 같은 신앙의 참된 정신을 알았기에 양반과 상민의 구분을 없앴으며, 남자와 여자의 차별화된 사회에서도 서로 형제요, 자매로 인정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려고 했었기 때문에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들의 표적이 되어 그 같은 심한 박해를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 같은 자유와 해방을 살았는데, 신분 계급이 철폐된 오늘날 교회가 이 정신을 살지 못한다면 하느님 인간 창조의 정신은 물론,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의 정신에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심판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또다시 그리스도 강생의 정신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참된 자유와 해방을 교회가 먼저 충실히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지고 교회안의 구성원들이 끼리끼리 어울려, 있는 사람들끼리, 배운 사람들끼리만 모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안에 자유와 해방을 살아야 하는 한 형제인 것입니다.

▶ 배광하 신부
  |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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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빚진 자이며 죄인.

세상의 어머니 초모랑마-에베레스트는 1953년에야 인간의 발길을 허락했습니다. 진정한 영웅 셰르파 텐징의 도움으로 영광의 자리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경. 그는 산을 사랑했고 평생 빚을 갚으며 텐징의 고향인 네팔을 위해 여생을 바쳤습니다. 산악인 조지 말로니는 “산이 있어 그곳에 간다.” 는 명언과 함께, “정상은 내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그 전에는 진정으로 오른 것이 아니다. ”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장한 빌게이츠도 기업은 단순한 이윤추구와 소극적인 사회적 책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킬 때 글로벌 시대에 맞는 기업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세례를 받은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각자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 때 진정한 하느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잠시 지난해를 되돌아봅니다.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수많은 대출을 받았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주는 대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평생 다 갚을 수 없는 큰 빚을졌으며, 동시에 갚을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출을 받았기에 죄인입니다. 저희 진부본당 성전과 봉평공소 성전을 함께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사랑으로 도와주신 모든 교우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힘을 주신 진부본당 출신 故 주영덕 비오 사제께도 감사드립니다.

저같은 빚진 자이자 죄인에 대한 여러분의 용서와 이해는 기쁜소식 ⁃ 은혜로운 해 ⁃ 희년입니다. 주님과 여러분께서 베푸시는 기쁨이기에 저같은 죄인에게 힘이 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에서 처음 선포하는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그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기쁨과 감격 그리고 감동은 새롭게 신앙과 삶에 대한 도전을 촉구합니다. 금년은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희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대한민국 천주교 신앙인이 되도록 다 함께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는 주님말씀처럼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자리에서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 시대의 징표를 읽고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일하며 사는 것입니다. 변화가 심하고 다양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중심을 잡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일치를 향해야 합니다. 일치와 조화를 요구하는 오늘 이 시대는 교회와 우리 신앙인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로마 5,20).

2010년 호랑이 해에 평화와 해방의 기쁜 소식이 온 누리에 선포되길 희망합니다.

▶ 김학수 베드로 신부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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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희년을 지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 하게 하셨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선언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졌음을 알게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언제나 자비의 신비’ 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 신비는 기쁨과 고요와 평화의 샘이며,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있으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궁극적인 최고의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자비는 인생길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를 진실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근본 법칙이며,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에도 영원히 사랑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이 오늘 이뤄짐을 믿습니다.

우리들은 나의 부족함과 죄인임에도 오늘 당신께서 이루시는 자비의 신비, 주님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희생으로 죄의 용서와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러기 에 우리는 오늘을 ‘주 하느님의 거룩한 날’ 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역설적으로 이 기쁨은 ‘우리의 죄’ 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이 죄를 ‘복된 탓(죄)’ 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나를 향하고 나를 변화시킬 힘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그 자비를,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새롭게 변하고 새로운 희망을 갖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스러움은 우리의 발목을 잡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죄에 있지 않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짓과 죄에 물든 추하고 부끄러움에 주님의 빛이 스며들게 됩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과 이 세상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희망의 상한선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희망은 주님의 자비와 우리의 죄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죄스러움’ 을 ‘부정적인 것’ 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나의 죄스러움과 부정정인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와 부정적인 것도 사랑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마저도 사랑하시고 우리의 새로운 변화에 희망을 가지셨듯이 우리의 신앙은 다른 이들의 죄스러움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남들이 더럽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들, 못난 것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여기는 것마저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거룩한 주님의 날이니’

▥ 춘천교구 이영주 타대오 신부
▥ 2016년 1월 24일
  |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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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새해가 시작되고 벌써 연중 제3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올해는 “황금돼지해” 라고 해서 뭇 사람들이 매우 좋아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들의 탐욕스러운 마음을 표출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경계하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특히 빈부격차로 인한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고,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지만 오히려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갈등은 점점 더 고조되어 극단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콩 한쪽이라도 이웃과 나누는 정겨운 풍습이 있었다면 오늘 날에는 상대의 콩 한쪽이라도 빼앗아 제 잇속을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험악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큰 깨달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에즈라 사제는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주십시오.” (느헤 8,10)

현실적으로 우리 모두가 경제적으로 넉넉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웃의 고통과 어려움을 공감하고 그들에 대한 몫을 기꺼이 나누어 준다면 적어도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고통이 조금은 감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2독서인 코린토 1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모두 한 지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 없고,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회적으로 약자들이, 가난한 이들이 오히려 더 존중받고 보호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가난한 이웃을 향해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웃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가 아닐까요?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공감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이웃의 어려움과 고통과 가난을 외면하면서 진정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해외원조주일” 입니다. 우리도 한 때는 이름도 모르고 나라도 모르는 은인들로부터 원조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못 살고 못 먹고 힘들었던 시절, 이들의 원조는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해외원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라고 선언하시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공감! 배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밝혀진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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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광근 도미니코 신부 - 2019년 1월 27일
  |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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