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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인간은 항상 자기를 중심으로
조회수 | 2,045
작성일 | 07.01.1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어느 안식일에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성서를 낭독하셨다고 말합니다. 읽으신 것은 이사야서(61,1-2; 58,6)의 몇 구절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복음은 이 독서를 들은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고’,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전합니다.

오늘 복음의 첫머리에서 복음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이 있었고, 저자는 그 기록과 자기 자신이 따로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자료를 ‘순서대로’ 엮어서 복음서를 집필하였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역사적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을 저자가 순서대로 정리하여 집필한 문서라는 것입니다.

루가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이 복음 선포를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시작하게 엮었습니다. 그는 나자렛에서도 유대교 회당을 첫 복음 선포의 장소로 택하였습니다. 유대교를 모태로 발생한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게 한 것은 그 예언서의 말씀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잘 요약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 곧 이 세상의 실패자들과 불행한 이들에게 메시아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선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야 말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강대국의 식민지로 전전하던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시면 그들의 국권을 먼저 회복해 주고, 그들의 적을 “질그릇 부수듯이...짓부수어서”(시편 2,9) 이스라엘이 세상 만방을 다스리게 할 것이라고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일상의 모든 일 안에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손길을 보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햇볕, 곡식을 자라게 하는 비, 들에 핀 꽃, 밭에 익어 가는 곡식, 이 모두가 그분에게는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들로 보였습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를 중심으로 하느님에 대해 상상합니다. 이스라엘은 식민지 신세를 면하게 해주는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시험에 합격시켜주고, 사업을 성공시켜주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강한 자 편에 서시는 하느님,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들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우리는 상상합니다. 이런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운 분도 아니고, 아버지라고 불릴 수도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고, 그것을 거절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하느님은 몇몇 사람에게 권위와 기적하는 능력을 주어서 그들만 데리고 노는 존재입니다. 그 하느님은 기득권층과 함께 있고, 우리 상상의 산물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으셨다는 이사야서의 구절들은 하느님의 영이 내리자 모든 불행한 이들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는 말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선포하는 예수님이 인류역사 안에 나타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은혜로우심을 알리고 스스로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은혜로운 실천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한 가지를 긍정하기 위해 그것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쉽게 부정합니다. 흔히 흑백 논리라 부릅니다. 유대교는 율법 지키기를 권장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단죄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은혜로움을 은폐하였습니다. 율법은 본시 인간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자각하며 그 은혜로우심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인간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제물 봉헌을 하지 못하는 이를 모두 죄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제물 봉헌은 본시 자기가 얻은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베푸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과 그것을 나누는 은혜로운 의례였습니다. 우리는 결혼을 신성한 것이라 말하기 위해 결혼 생활에 실패한 이를 모두 매도합니다. 우리는 주일 미사가 중요하다 생각하면, 그것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 모두를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관행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은폐하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의 흑백 논리 안에 갇혀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알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공과 실패에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자각하고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기준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 이 세상의 부모도 성공과 실패를 기준으로 자녀에 대해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낭독하셨다는 이사야서가 나열하는,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는 모두 실패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이 은혜로우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입입니다.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었고,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하셨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흑백 논리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논리가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논리를 벗어나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유일한 화두(話頭)가 있다면, 그것은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은혜로움을 실천하지 않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잊어버린 그만큼,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느님과 무관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잊어버린 유대교 기득권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마태 21,31). 세리와 창녀는 율법 준수에 실패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도 내리셔서 우리도 성공과 실패라는 우리의 논리에서 벗어나,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참으로 자유로운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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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질성의 삼단 논법 (가난한 이 = 주님 = 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으셨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고, 그 가르침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 루가 복음서에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란, (많은 재물이 있으면서 마음만 가난한 사람들과 대비하여) 실제로 궁핍하여 가난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도 힘도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기대나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또한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소위 ‘있는 자’들은 권력이나 재력에 의존할 수 있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주님 뿐 입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선포됩니다. 주님의 선포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참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 복음 말씀을 통해 사회복지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라고 하면, 간단하게 말해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힘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명에 따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아무도 차별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건설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사회복지 참여는 값 싼 동정이나 단순구호 활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대상화시키지 않고 ‘나 자신과 같다’는 동질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가난한 이에게 해주는 것이 곧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므로 가난한 이는 주님과 같고, 그 가난한 이는 바로 나 자신과 같으므로 나는 주님과 하나로 합일 됩니다. 즉 ‘가난한 이 = 주님 = 나’ 일견 말도 안 될 것 같은 이 논리야말로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우리는 곧잘 보고 싶은 현실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예수님은 보아야만 하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을 탈피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 박 혁 스테파노 신부
  |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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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시험을 치러가는 누나에게 동생이 “떨어지면 어떻게 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어머니가 역정을 내며 소리를 지릅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이 씨가 된다는 것도 몰라!” 말이 씨가 된다는 이 표현은 말이 단순한 의사 전달 수단이나 상징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힘을 갖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떨어진다’는 말이 씨앗이 될 때, 그 씨앗이 자라 실제로 열매를 맺으면 결국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말이 갖는 힘을 자연스럽게 터득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속담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최고라고들 말하지만, 말만 잘하면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을 만큼 말의 힘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이 대단한 힘을 가진 말을 매일 듣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조리한 일을 겪을 때, 곧잘 ‘이건 말도 안 돼!’라고 흥분하거나 한탄합니다. 이런 탄식 속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는 계시진리가 엿보입니다. 본시 말씀을 통해 창조된 존재가 말이 되지 않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되면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하게 마련이지요. 하느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오직 그 말씀에 순응할 때만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라, 말의 가치가 왜곡되고 부딪치고 상처를 입고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가 많은 세태를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어떠해야 진정한 말이 될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체험하도록 불린 사람들입니다. 이런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으로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기쁨과 해방을 주는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하느님 말씀의 씨는 우리 안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열매를 즐기며 이웃에게 나눠 줄 수 있을 것입니다.

▶ 노영찬 신부
  |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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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의 길을 가신 스승님!(루카 4, 14∼21)

저는 응접실에 늘 추가 달린 시계를 걸어두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 추는 한편으론 좌우로 얼마만큼 움직이지만 결코 지나침이 없이 늘 중심을 한 곳에 두고 움직이게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고착된 중심만을 고집해서 양쪽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루카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묶인 이들에겐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이들에겐 보게 하고, 억눌린 이들에게는 자유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 시대의 유다교 지도층들은 당시 더러운 사람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죄인들을 없애버림으로써 그네들 마음에 드는 사람들끼리만 잘 살려는 경향이 아주 강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수님은 마음에 드는 사람들끼리만 사랑하던 전통을 보완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마태 5, 44). 예수께서 이렇게 사신 이유는 그 분의 하느님은 강한 이들만 아니라 약한 이들도 골고루 햇볕을 내려주시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마태 5, 45). 그런데도 우리 문화는 도처에서 끼리끼리만 만나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웅을 추앙한다고 내 자신이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미인을 우상화한다고 내가 미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복음은 영웅이나 미인만 숭상하고 앉았을 것이 아니라 늘 세상의 뒷전으로 밀려난 사람도 섬겨서 균형을 잡으라고 합니다.

최근엔 가난한 달동네에서 그곳의 아이들과 살아 온 이야기가 담긴 ‘산동네 공부방’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알 듯 말 듯 한 지식이 아니라 별이 빛나는 밤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피땀을 쏟아놓은 이야기도 박수만 치고 앉은 채 내가 해야 할 일을 도피해버리면 균형감각을 잃게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세상살이에는 분명한 방향이나 목표가 있는 것도 좋지만 삶의 보람에서 오는 재미나 즐거움도 있어야 균형 있게 산다고 봅니다. 왜냐면 이 귀한 일생을 남의 흉내나 내고 하품이나 하다가 속절없이 시들어가다가 죽어갈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왕자가 수많은 장미꽃이 피어있는 꽃밭에서 자기가 두고 온 장미꽃을 더 귀하게 여긴 이유는 왕자 자신이 그 꽃에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자가 ‘장미꽃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그 시간’이라고 한 대목을 기억하면서 내 삶을 위해 더 고민하고 진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며 비틀거리며 살아야겠다 싶습니다. 아멘.

▶ 석찬귀 스테파노 신부
  |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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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프로그램

우리는 주님세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연중시기를 시작하였다. 그 주간이 연중시기 제1주간이었고, 이어진 주일이 바로 연중 제2주일이었다. 그런데 연중시기 제2주일의 복음은 가해, 나해, 다해 모두 요한복음이다. 복음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가해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를 가리켜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지적한 내용이다.(요한 1,29-34) 나해는 요한의 제자 둘이 예수와 함께 하루를 묵고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다’고 고백하는 내용을 복음으로 택했다.(요한 1,35-42) 다해의 복음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푸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에 관한 내용이다.(요한 2,1-11) 이들 복음의 내용은 주님세례축일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공현(公顯)과 상당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주일로 따질 때, 연중시기의 첫 주일인 연중 제2주일의 복음은 그 내용상 모두가 주님 공현의 연장이고, 연중 제3주일부터 연중시기의 고유한 신비인 ’예수님 공생활 따라잡기’가 연출된다는 결론이다. 연중시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신비를 그 공생활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포괄적으로 묵상하는 시기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연중주일의 시작은 연중 제3주일부터이다. 이 결론이 마냥 추측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 연중 제3주일에 봉독되는 복음으로 증명된다.(가해: 마태 4,12-23/ 나해: 마르 1,14-20/ 다해: 루가 1,1-4; 4,14-21) 이 복음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보도하고 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이 투옥된 후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에서 개시(開始)한 예수님의 공생활을 보도하고 있으며, 루가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 자라나신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회당에서 테이프를 끊은 공생활의 시작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다해 연중 제3주일은 루가복음의 서문과 예수님의 첫 공생활 활동내역을 복음으로 삼고 있다.

이미 논하였던 바이지만, 루가복음에서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느 장소와 시점에 두고 말하기가 어렵다. 이 점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다. 루가는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 루가가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다"(3,23)고 하지만, 이것을 공생활 시작의 시점으로 볼 수는 없다. 세례자 요한의 활약과 예수의 세례장면 사이에 요한의 투옥사건을 삽입한 것, 예수의 세례에서 요한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것 등은 문맥상 매끄럽지 못한 편집으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이유들로 루가의 심오한 시간과 공간 개념을 무시할 수 없다. 루가는 마르코나 마태오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세례자 요한이 투옥된 후부터라는 시간적 서술에 묶어두지 않았다. 루가는 새계약의 복음선포가 시작된 시간적 서술보다 복음이 선포되는 원동력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동력은 바로 예수님의 정신을 가득히 채운 하느님 성령의 능력이다.(14절)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의 근거와 내용을 밝히는데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18절)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인용(61,1-2)도 그런 이유로 알아들을 수 있다.

루가가 생각하는 심오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루가가 파악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는 말씀에 담겨있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의 모든 것이 집중된 바로 ’오늘’, 그리고 ’이 자리’를 말한다. 루가가 말하는 시간은 ’오늘’이고, 장소는 ’이 자리’인 것이다. 따라서 루가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느 시점과 어느 장소에 국한하여 보지 않고 언제나 ’지금과 여기’로 보는 것이다. 하느님 성령의 능력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바로 지금과 여기에 예수님의 공적인 복음선포와 활동은 실존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적인 복음선포와 활동은 교회의 봉사를 통하여 오늘, 그리고 여기에 또한 실현되어 실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루가복음 전체가 지향하는 바이며, 바로 예수께서 계획하시는 프로그램이다.

▶ 박상대 신부
  |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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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자비의 도구가 되어...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사명이 분명히 밝혀졌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 18~19) 이 말씀이 일회성으로 그쳐서야 어디 복음 말씀이겠는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루어지는 말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에“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라고 하신다. 따라서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살펴보자.

이스라엘 백성은 7년마다 안식년을 지냈고 안식년이 일곱 번 돌아오는 50년째에는‘희년’이라고 이름 붙인 큰 축제를 성대하게 지냈다.(레위 25장 참조) 희년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 백성으로 부르시고,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기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희년은 모든 사람이 해방을 체험하고 모든 것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해였다. 이 희년 법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칙서『자비의 얼굴』을 통해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하신다. 자비의 특별 희년은 말 그대로‘사랑과 용서를 베풀기 위한’기간이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이란 문구가 쓰여 있고, 예수님의 어깨에 사람을 얹은 모습으로 제작된 로고가 그 의미를 잘 표현해 준다. 그 핵심은‘아버지처럼 자비로워져라’는 권고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교황님은 신자 개개인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체험하는 참회와 고해성사를 그 출발점으로 하여 교구마다 지정된 ‘자비의 문’을 순례하고, 은총과 자비의 선물인 전대사의 은총을 받기를 희망하신다. 이로써 스스로 자비의 도구가 되어 이웃 사랑 실천의 길을 걸어가자 권고하신다.

“저는 이 희년에 그리스도인들이 자비의 육체적 영적 활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주는 것입니다.”

▥ 부산교구 전열 사도요한 신부
▥ 2016년 1월 24일
  |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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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음 선포자로서의 삶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에 각각 떨어져 나오는 두 본문을 이어 놓은 것입니다. 먼저, 복음 시작 부분에 봉독한 대목은 루카 복음 서문(루카 1,1-4)입니다. 여기서 루카는 자신이 복음서를 왜 저술하였는지 설명합니다. 루카 자신은 예수님 사건을 직접 본 목격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목격했던 이들에게서 전해 듣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는데, 자신이 전해 들은 바를 꼼꼼히 살펴보고 테오필로스도 그 내용을 잘 알아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루카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지는 못 했던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전통적으로 루카는 사도 바오로의 제자였으며, 의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바오로와 다른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복음 선포 사업에 직접 동참합니다. 보지 못한 것을 믿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루카는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쳐 복음을 증거합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둘째, 루카는 자신이 살펴본 바를 나름대로의 순서로 적는다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일어난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루카는 전해 들은 바를 나름대로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다른 복음사가들과 다르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루카는 예수님만이 참된 구원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예수님 이야기를 소상히 엮어냅니다. 이런 루카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까지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또 마리아와 즈카르야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시메온과 한나가 아기 예수님을 두고 어떤 이야기들을 남겼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말로, 행동으로 증언해 주지 않으면 직접 보지 않은 이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직접 본 사람들에게 전해 듣고 우리에게까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해 준 루카 같은 복음사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대목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공생활을 시작하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루카 4,16-21).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 가시어 이사야 예언서를 읽은 뒤 그 말씀이 바로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바는 바로 주님의 영이 당신에게 내리시어,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 잡혀간 이들, 눈멀고 억압받는 이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으며, 드디어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막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입니다. 그리고 모든 예언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점을 선포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이미 임마누엘이신 당신이 직접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로운 해임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제 청중은 이 말씀을 듣고 믿든지, 무시하든지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는 우리 역시 예수님 말씀을 믿든지, 무시하든지 결정하라고 촉구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였는지 기억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쁜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 주님의 종이 되었는지 되새겨 봅시다. 아울러 주님의 종으로써 우리는 누구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만약, 그런 복음 선포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다면 왜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지 지금 우리의 모습을 깊이 되돌아봅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1월 24일
  |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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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나의 ‘테오필로스’를 찾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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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향한 루카 사도의 남다른 애정을 잘 드러내는데요.

더불어 독서 말씀에서 만나는 느헤미야의 동족 사랑의 깊이와 코린토 교우들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애타는 심정 또한 짙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필히 숙독해야 할 전교 여정의 완성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저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동족에게 에즈라 사제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는 구절에 마음이 설레는데요. 이야말로 교회가 오래도록 충실히 수행해 온 직무이니까요. 교회야말로 온 세상의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를 위해서 성경을 번역하고 매일매일 강론으로 해석하며 설명하는 일에 온 정열을 쏟고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루카 복음의 시작 또한 가슴 뭉클한데요. 우리가 접하는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이 바로 “테오필로스”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루카의 기록이었다는 사실에 감동하게 되는 겁니다. 루카 사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전교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고스란한 정성을 쏟아야 하는지, 어느 누군가에게 하느님께서 쏟아주신 구원의 은총을 전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큰 노력과 애정을 기울여야 할지 스스로 본을 보여준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루카 사도의 글에서 우리는 테오필로스가 이제 갓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새 신자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요. 테오필로스가 이미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적는다고 밝히고 있으니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루카 사도가 테오필로스를 전교한 후에도 꾸준히 복음을 설명하며 테오필로스의 영성이 자라도록 살뜰히 챙기고 보살폈다는 사실을 엿보게 되는데요. 이야말로 우리의 전교 모습의 모자람을 돌아보도록 합니다. 이웃에게 교리를 받도록 권하고 세례를 받게 하는 것으로 다 끝난 것처럼 여기고 이제는 ‘몰라라’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얼마나 큰 허물인지를 깨닫도록 합니다.

전교란 내 이웃의 “테오필로스”를 찾아 나서는 일이며 그 이웃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에즈라 사제처럼 주님의 뜻을 잘 이해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하늘의 작업입니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복음의 기쁨과 사랑을 전하고 또 전해야 합니다. 루카 사도처럼 전교란 한 사람의 테오필로스를 찾아서 복음의 기쁨을 전한 후에도 더 깊이 교감하며 “진실”을 잘 깨닫도록 돕고 또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모습에 집중해 보고 싶은데요. 당시 예루살렘과 갈릴래아는 양극화 현상이 뚜렷했던 곳이었습니다. 특권층의 고장 예루살렘에 비해서 갈릴래아는 소외당한 사람들이 척박한 삶을 이어가던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낙후된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루카 사도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가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날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기록을 읽으신 것이 성령께서 골라주신 것임을 넌지시 일러주는데요.

그날 예수님께서는 그리도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변방으로 향하시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오직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걸음을 옮기며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틀림없이 배척당하며 비아냥거리는 수모까지 감수해야 할 상황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만큼 더더욱,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난관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이겨내리라 속 깊이 다짐했을 것도 같습니다. 그날 아버지의 뜻에 따라 회당에 가셔서 두루마리를 펼치실 때, 예수님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을 것도 같은 겁니다.

사실 자타가 공인하는 기득권층들에게 예수님의 존재 가치는 절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은 자기네 삶의 기반을 흔들어버리는 불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제거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던 이유일 터입니다.

때문일까요? 복음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낮고 어둡고 소외된 곳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빛이며 희망이며 기쁨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1독서 말씀이 “그 무렵”이라고 줄여놓은 부분이 많이 아쉽습니다. 그 안에는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요. 제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이 부분의 성경을 찾아 읽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수사 궁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의 “술시중을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왕에게 얼마나 큰 신임을 얻고 있었는지는 예루살렘 도성을 다시 세우겠다는 느헤미야의 계획을 흔쾌히 수락하고 필요한 재원까지 후히 제공할 것을 윤허한 임금의 처사에서 감지되는데요(느헤 2장 참조). 한마디로 특권층이었고 세상 영화에 부족함이 없었던 느헤미야가 “주저앉아 울며 여러 날을 슬퍼”하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청하는 일이 생깁니다.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족들이 “큰 불행과 수치”를 당하며 지낸다는 소식에 애간장이 녹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간구하는 못난 신앙인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특별히 저는 오늘 독서 말씀 중에서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물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느헤 8,1)라는 부분에 감동하는데요. 그날 백성들이 먼저, 주님의 말씀을 읽어 줄 것을 청했다는 사실,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마운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밭도 포도원도 집도 저당” 잡혀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딸들을 종으로 짓밟히게” 내어주어야 했던 엄청난 비극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타국의 포로생활을 접고 거의 맨손으로 귀국했던 그들이었기에 도무지 “손쓸 힘”조차 없는 비참한 상태와 마주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저 속수무책이어서 한탄하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비참한 상태에서도 그들은 누구의 명령이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간청했다니, 얼마나 감동인지요? 저는 그날 주님의 눈시울이 촉촉해졌으리라고 감히 짐작합니다. 그 고운 원의에 주님께서도 감동하셨을 것이 분명하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계명에 담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놓치지 않고 실천했던 느헤미야의 삶에서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를 배웁니다. 아울러 주님을 직접 뵙지 못했음에도 주님 사랑을 온 삶으로 이해하고 전했던 루카 사도의 글에서 전교의 적극적인 자세를 가르침 받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와 바오로 사도와 루카 사도와 똑같은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나아가 그날 그분처럼 “성령의 힘을 지니고” 살아가는 빛의 존재입니다.

이 자존감을 잃지 않는다면 죽음의 문화가 판치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처럼 구구절절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내처 루카 사도처럼 철저한 복음인의 사명감으로 ‘단 한 사람, 테오필로스’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 정성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꼭 그리되어서 우리 모두가 “성령의 힘”을 지니고 “하느님의 집과 그분을 섬기는 일을 위한 덕행”(느헤 13,14)을 온전히 살아내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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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가톨릭신문 2019년 1월 27일
  |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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