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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조회수 | 2,792
작성일 | 04.07.08
루가 10, 25-37. 신명 30, 10-14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에 이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서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반문하셨고, 율법교사는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그를 반쯤 죽여 놓고 갔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드디어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강도 맞아 반쯤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하고,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 가 간호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간호를 부탁하였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이라는 율법 교사의 말에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 교사는 자기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는 성전에서 제물 봉헌 업무를 하는 사람이고, 레위는 사제를 도와서 성전의 여러 가지 잡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성전과 율법이 중요합니다. 원래 성전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인간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지침 조항들입니다. 성전과 율법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것들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그들 상상의 산물입니다. 세상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이 상상하여 만든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은 모든 일을 주제하고 사람들을 엄하게 벌하면서 군립하는 분입니다. 그 하느님은 사람이 성전에 제물을 잘 바치고 율법을 잘 지킬 것을 원합니다. 그 하느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사제와 레위가 강도 맞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느님은 사람이 성전에 바치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만 예의주시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사마리아 사람은 지켜야 하는 율법과 바쳐야 하는 성전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강도 맞은 사람을 보고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는 반쯤 죽게 된 이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 끝에 율법 교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인간이 만든 성전과 인간이 만든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유대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출애 33,19 참조)에 대한 이스라엘의 원초적 체험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사람들이 깨닫도록 가르친 분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입니다. 성전과 율법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성전과 율법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현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살아계시는 우리의 삶입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34).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려준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35절).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부모는 최선을 다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문자의 계약이 아니라 영의 계약입니다.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립니다”(2고린 3,6). 사랑은 문자인 율법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일이고 사랑은 사람을 살린다는 뜻입니다.

문자는 죽입니다. 성전과 율법에 충실한 사제와 레위는 강도 맞은 사람을 버려두고 길을 갔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고 살리라는 말은 율법의 문자에 없습니다. 이렇게 문자는 죽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 해 그를 살렸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영은 살립니다. 하느님은 살리십니다. 하느님은 율법이나 신심행위와 같은 우리의 계획에 살아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자비로운 마음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살아계십니다. 자비와 가엾이 여김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신명기는 말합니다. “법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다.” 불쌍히 여김과 가엾이 여김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도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면 영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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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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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

사랑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그 사람이 「장미」라면 「장미」가 되게 하고, 그 사람이 「호박」이라면 「호박」이 되게 하는 것. 「장미」에게 「호박의 열매」를 요구하지 않고, 「호박」 에게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찾지 않는 것. 「장미의 가시」를 받아들이고, 「호박의 추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네. 왜냐하면 사랑은 「결심하는 의지의 행위」이기 때문이라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너무나 쉽게 일러 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 인물 중 사제와 레위는 예수님 당시 백성의 지도자로 불리던 사람이었고, 또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몇 대를 걸쳐 세습처럼 내려오던 냉대와 핍박, 설움을 경험하면서 사랑보다는 미움의 골이 마음깊이 패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인물 중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고 그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오히려 사랑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받기를 원했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믿고 가르쳤던 바를 실제로 실천해야 했던 사제와 레위가 무관심하고 외면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은 말이 아니라 결심하는 의지의 행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서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오늘날,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들이 점점 우리 주위에서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갈수록 비유 속에 등장하는 사제나 레위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자신들조차 그러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심지어 그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가족 간에도 무관심과 미움의 싹은 자라고 있습니다.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할 가정이 무관심과 미움을 먹고 자란다면 우리는 분명 우리의 삶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겐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 돌아가고 싶다”라고 외치는 어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 역시 비유 속 사마리아인의 삶으로 돌아갑시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의 “노자와 시간까지도 아낌없이 나누어줄” 줄 아는 마음을 찾도록 합시다. 나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하도록 합시다.

부산교구 최요섭 요셉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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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선포의 첫걸음 : 진정한 이웃사랑

지난 연중 제14주일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루가 10,1-12.17-20)에 관한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각자가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로서 선교의 결과보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자체를 기쁨으로 여길 수 있음을 묵상하였다. 아울러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선 파견되어 간 곳에 ‘하느님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하느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였음을 전하는 일임을 알았다. 병자치유와 구마(驅魔)를 통하여 세상에 평화를 심는 일이 바로 도래한 하느님나라의 직접적인 표징인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갈수록 병자의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좀처럼 우리들 안에 없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물러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복음선포는 모든 신자들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이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에게 병자치유도 구마의 능력도 없는 것일까? 필자는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의 시대에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적이나 이변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일의 결과만 보려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원인과 과정 없이 결과만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기적적인 결과는 통상 그 원인이 아주 평범한 원칙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병자를 치유하고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어 하느님나라를 세우고 그분의 평화를 심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병자의 치유는 병자를 돌보는 데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일은 내가 악을 근절하는 데서 시작하기 않겠는가.

그러므로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일 중요한 가르침을 손꼽으라면 ‘많은 일 중에 가장 요긴한 하느님 말씀의 경청’(10,38-42), ‘주님의 기도와 옳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과 함께 단연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참된 이웃사랑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공관복음 전체에 나타나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12,28-34)이나 이를 참고한 마태오복음(22,34-40)에서는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사랑’(신명 6,4-5)을, 둘째가는 계명으로 ‘이웃사랑’(레위 19,18)을 제시하면서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며, 가장 큰 계명이라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복음에서는 ‘계명’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루가가 원전을 각색하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곁들여 고유자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나라의 모든 시작을 볼 수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의 같은 대목을 살펴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직접 사랑의 이중계명을 설파하신다. 그런데 루가복음에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절) 하고 묻는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신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모세의 율법서에서 읽은 대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답으로 제시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28절) 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루가가 계획하는 편집의도가 들어 있다. 루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행동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고맙게도 루가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추가하여 참된 사랑의 실천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직접 수고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누가 나의 이웃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신다.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 즉 나의 도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이다. 물리적으로나 장소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이웃사랑이 실천되지는 않는다. 물론 함께 있어주는 것도 사랑실천이 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사랑을 베푸는 것을 예수께서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신다.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인물인 사제는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기까지 하여 반쯤 죽어 있는 사람의 제일 가까운 이웃이 되었으나,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사제의 머릿속에는 위급에 처한 사람보다는 ‘시체에 몸이 닿은 사람은 칠 일간 부정하다’(민수 19,11)는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둘째 인물인 레위 사람은 성전제사의식에서 제사장을 돕거나 종교적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로서 육체적이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괜한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길이었으니, 그 사람은 유다인임이 틀림없다. 유다교의 정통성을 상실한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유다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순간이었다. 비유에서 보듯이 사마리아 사람은 심하게 다친 유대인에게 기대이상의 사랑을 베풀어준다.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게 된 사람에게 이웃이 된 자는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다.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긴 했겠지만, 피해서 지나가 버림으로써, 즉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 가버림으로써 이웃이 되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이웃사랑의 실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유다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사랑은 바로 이렇게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가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기적의 시작이요, 하느님나라와 그분의 평화를 이 땅에 심는 것이다.

▶ 박상대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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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많은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청빈의 삶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비바람 몰아치던 날 밤, 낯선 거지 한 사람이 프란치스코에게 와서 추위에 벌벌 떨며 먹을 것을 구걸했습니다.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불빛 아래에서 보니, 그 거지는 나병으로 온몸에 고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자신도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으나 있는 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룻밤 재워 달라고 청했습니다. 낯선 거지를 위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더니, 그는 굳이 프란치스코와 같이 자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프란치스코는 망설였으나 예수님을 생각하며, 피고름이 흘러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냄새가 나는 낯선 거지를 자기 침대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팔로 그 거지를 끌어안고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함께 잠을 잤던 거지는 온데간데없고, 향기 가득한 커다란 십자가가 그의 침대 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어느 한 쪽 구석에라도 자기 것을 남겨 두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 주는 행위, 미련을 두지 않고 나누는 행위입니다.

복음의 율법 교사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그렇게 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사는 일입니다.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만큼 실천할 때, 그것을 ‘덕행’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도 요한은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 20) 하였고, 야고보 사도는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 14)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기준으로 제시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자기 일을 마다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가엾은 마음”으로 다가서는, 여러분 모두가 복음의 주인공, 오늘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원합니다.

<부산교구 오창열 사도 요한 신부>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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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원한 생명을 받는 길

영원한 생명을 받고 싶으십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이러한 질문을 받고 그 해답을 알려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하였습니다.”율법 교사의 대답에“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도 필요함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누구나 신자라면“하느님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에“예,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에는“예, 사랑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어떤 이웃은 사랑하고 어떤 이웃은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이웃은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나의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리코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을 때, 사제와 레위인은 그를 보고서도 지나가 버립니다. 거룩한 사람들, 하느님으로부터 선별되고 선택받은 사람들이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갑니다. 하루 직무를 마치고 피곤해서, 혹은 당시 관습에 따라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서, 그 어떤 이유에서건 가엾은 사람을 두고 그들은 떠나갑니다. 하지만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주고 회복될 때까지 돈이 더 들더라도 돌보아달라고 여관주인에게 부탁합니다.“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율법 교사는 대답합니다.

즉, 그 누가 되었던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어려움과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다 나의 이웃입니다. 또한 신앙심이 깊어도, 열심히 본당 활동하더라도, 선택된 이라 하더라도 가엾은 이를 보고 모른 척 지나간다면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죄 중에 있고, 손가락질받는 이라 하더라도 가엾은 이, 도움이 필요한 이를 돌보아 주었다면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받는 길은 하느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누가 되었던 가엾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즉 믿음과 함께 실천(행동)하는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

▮▮ 부산교구 이영창 스테파노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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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대개 엄한 아버지 밑에서 큰 사람은 아버지 하느님을 엄한 하느님으로 이해하고, 자상한 아버지 밑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을 자비로운 하느님으로 받아들입니다. 간혹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하느님을 폭력적인 하느님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합니다.

인지학자들은 이런 것을 ‘프레임’, 곧 ‘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틀은 체험과 학습을 통해 습득되며, 문화나 환경,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틀을 나쁘게 표현하면 선입견이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틀은 우리가 대상을 짧은 시간 내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효율적 도구입니다. 틀을 이용하지 않으면 새로운 대상을 파악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틀이 올바른지 계속 점검하지 않으면 선입견에 따라서만 생각하는 편협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대화는 서로의 틀을 깨트리고 확장하는 작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지만, 누가 이웃인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예수님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에게는 율법에 충실한 유다인들만이 이웃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이웃 틀’에는 이방인, 죄인, 사마리아인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는 가르침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의 이웃 틀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은 오직 율법에 충실한 유다인들, 곧 자신과 같은 율법학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이웃 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이웃은 더 이상 출신성분, 율법 규정 준수 여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웃이었고, 자비를 베푸는 이는 누구나 이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원수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이웃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이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 이 점을 분명히 밝히심으로써 율법학자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이웃 개념, 곧 이웃 틀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그러면서 율법학자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명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누가 이웃인지 따지며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누가 이웃인지 논쟁하기 이전에 이웃이 되어주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 틀’을 받아들였는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에 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열린 결론’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이웃 틀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의 이웃은 누구이며, 나는 다른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지에 대해 묵상하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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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실천하는 사랑, 영원한 생명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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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어떤 휴가를 계획하셨는지요? 교우님 모두가 어디에서나 주님을 모시고 진정한 쉼의 시간을 가지시길 원하며 하나,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아무리 짐이 많아도 제발 매일미사 책이라도 꼭 챙겨가 주십시오! 교회는 매일미사 책에 무려 열 장이 넘는 지면을 할애하여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미사참례를 거르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느님께 찬미 드리기 원하는 이 간절한 원의를 팽개치지 말아주시길 바라고 바랍니다.

즈음이면 늘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쉼 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라는 고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과 조우하는 행복을 누리시는지 여쭙고 싶고 참으로 그리 살아주시길 원하는 마음이 큰 탓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삶에서 제일 어려운 것, 나아가 곤혹스러운 것은 매 순간순간의 생각과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사탄이 극악무도한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사탄과 맞설 것입니다. 단호히 거부하고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같은 범인에게 굉장한 것이나 대단한 것으로 시험하지 않습니다. 늘 우리가 일상 안에서 수시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할 선의 무게와 악의 무게를 비슷비슷한 중량감으로 위장합니다. 이래도 상관없고 저래도 괜찮아서 탈이 없을 것처럼 포장합니다. 모호하게 느껴서 불분명하게 인식하도록 마음에 올무를 놓습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문제는 언제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결과 또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기 일쑤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믿음의 문제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요. 믿음이 희미해질 때, 삶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빛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때문일까요? 오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추가해서 들려주십니다.

그날 하느님의 율법을 앞세우면서도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던 “어떤 사제”와 레위인들은 주님께서 날린 강속구에 뒤통수가 얼얼했을 것 같은데요.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대상에서 탈락될 것이라는 주님의 ‘돌직구’가 매섭지 않았을 리가 만무하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경고 메시지는 분명하고 명료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똑 부러지게 말씀해 주시니까요.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주님께서는 아픔을 지닌 이웃을 향한 연민,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가엾은 마음”만 잃지 않아도 몸소 끝까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하십니다. “가엾은 마음”만 있다면 기꺼이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 아니라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소홀함이 없도록 조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밝혀주십니다.

사랑은 끝까지 마음을 쏟는 최선의 배려임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희생이란 기꺼운 사랑의 결과일 뿐임을 알려주십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측은하다는 감성적 ‘생각’이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면서 끝까지 보살피는 ‘행동’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새기게 됩니다. 이웃의 곤고함을 “가엾다” 여기는 생각만으로는 사랑에 미치지 못하기에 겨우 간단한 응급조치만 해주고서 돌아선다면 완성된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라 헤아립니다.

때문에 나의 일이 급해서 “반대쪽으로”가 버렸던 사제나 자신의 정결한 믿음이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여 “반대쪽으로” 지나쳤던 레위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지 않은지, 꼼꼼히 살피라는 당부로 듣습니다.

그날 사마리아인처럼 소중한 “두 데나리온”을 일면식조차 없는 가엾은 이를 위해 흔쾌히 사용하는 마음 폭을 지녔는지, 이웃의 나중까지도 무한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통 큰 배포를 가졌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의미라 싶습니다. 단지 “가엾다”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 자신이 매우 선하고 엄청 착하게 살아가는 양 여기진 않는지, 심중을 꼼꼼히 뜯어보라는 말씀이라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고쳐서 살아갈 것을 강권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갖은 핑계를 대며 ‘생각’으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자비를 베풀려는 우리의 인색함을 슬퍼하신다는 고백이십니다. 아픈 이웃을 위해서 내 노새를 내어주고 터벅터벅 두 발로 걷기를 마다지 않는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서 보고 싶다는 고백이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넘어야 할 가장 험한 난관은 “최선의 방법을 알면서도 최선의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처지”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를테면 “이번 휴가 기간에는 성경을 꼭 읽어야지”라고 다짐했으면서도 성경은 무겁다는 이유로 부피가 작은 매일미사 책으로 바꿔 넣거나 “기도를 많이 바치겠다”라고 다짐했으면서도 그저 더 먹고 더 떠들고 더 흥분하느라 손에 묵주 한 번 쥐어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구체적으로 행하는 사랑만이 영원한 생명의 열쇠입니다. 더딘 듯 보여도 주님의 방법이 가장 힘이 셉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처럼 말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려는 의지가 소중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허세이며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상대를 좋다 하고 내가 받은 사랑만큼만 응대하는 세상의 방법으로는 주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친절에 따라 내 마음과 행동이 적절히 반응하는 꼼수는 복음인이 사용할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크고 웅대한 업적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 살아주기만 원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마음이 세상을 살리고 움직이고 변화시켜서 모두가 함께 더불어 밝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맺은 사랑을 변함없이 지켜달라고 간청하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과 마음을 합하여 예배드릴 것을 원하십니다.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은혜를 선물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침내 주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이웃으로부터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듣게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여름의 한 가운데, 주님의 심정이 고스란한 복음의 이정표를 놓치지 말아 주십시오. 믿음의 나침반이 알려주는 올바른 방향을 선택해 나아가 주십시오. 하여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주님의 권고를 기억하여 ‘하지 않고’ 물러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살아내 주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기쁨과 행복을 살아가시길 두 팔 벌려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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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가톨릭신문 2019년 7월 14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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