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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예언자의 사명과 그 증거
조회수 | 2,340
작성일 | 07.01.24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언자의 사명과 그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당신의 예언적 사명을 천명하신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예언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구태의연한 삶을, 즉 안일주의에 빠져있는 삶을 들쑤셔 피곤하게도 다른 삶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길로 방향전환을 시키러 오는 ‘불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것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항상 박해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고 침묵을 강요받기도 한다. 참된 예언자는 항상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나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변화되어야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어렵다고들 한다. 때문에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를 제거하거나 침묵케 함으로써 이미 자신 안에 일어나기 시작한 자신의 의식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다고 여긴다.

제1독서: 예레 1,4-5.17-19: 나는 너를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예언자는 항상 ‘불편한 존재’이다. 항상 하느님의 새롭고도 어려운 요구를 사람들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에게 폭력을 가하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예언자는 이러한 종교적 사회적 한계성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과 함께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아가 그런 경우이다. 하느님께 소명을 받고 그는 심리적으로 약화되고 불안하여 처음부터 그 소명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용기를 주신다.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나의 백성에게 일러주어라. 내가 시키는 말을 모두 전하여라. 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다가 그들 앞에서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리라.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사제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담처럼 세우리니,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17-19절).

복음: 루카 4,21-30: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 오신 분이시다

이렇게 예언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에 나오는 나자렛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그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자렛의 이야기에서 우선 조금 전까지도 별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던 한 사람, 예수가 너무나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된다는 것에 질투심 같은 것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두 가지 사실, 즉 예수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비천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자신을 이사야서 61,1-2의 말씀을 실현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21절)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눈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과 또 당신의 생활과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 이상의 어떤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게된다. 인간이시면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 신비 앞에 혼란을 거듭할 것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께 적개심을 갖는 것이  지방색을 드러내는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 같다.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23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나자렛에서는 하지 않으시고 가파르나움에서 행하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있는 듯 하다. 그러나 기적은 무슨 광고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신앙을 갖고 있거나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하나의 표징으로 보여주시는 절대로 자유로운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다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다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며, 더 이상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1고린 12,31-13,13: 사랑의 찬가

바로 이 예언적 증거가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에서 말하고 있듯이 모든 은총 중의 가장 위대한 은총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은총인 ‘사랑’을 통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12,31)라고 하면서 사랑의 찬가를 노래하신다(13,1-13).

우리들이 세상에 선포해야할 사명이 있는 그 ‘불편한’ 예언적 사명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사랑이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불 속에 우리 몸을 던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투쟁과 묵상은 다만 하나의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기도를 한다면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당신이 착취당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투쟁한다면 그것도 역시 사랑 때문이다”(1974. 8. 30. 떼제의 둘째 편지).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분의 변화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해야할 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힘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힘과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단단히 방비된 놋담 처럼’ 우리 자신을 세울 힘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용기를 갖고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은폐될 위기에 처해있는 가치들을 재확인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예언적’ 능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법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태아의 생명에 관한 권리, 혼인의 비신성화, 외설 문학, 보편화된 폭력, 쾌락과 돈에 대한 발작적인 추구로 생명을 경시하는 세태를 생각하며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항상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이루어 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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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신 그 길

삶의 소명(召命)을 갖고 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란 참으로 어렵다. 길을 가다 칭찬을 받을 때도 있지만, 비난도 그에 못지않게 듣게 된다. 또 가는 길에 외로움과 두려움도 엄습해 오고, 오해와 반대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한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면서도 ‘과연’이라는 단어와 ‘정말’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많이 떠올리게 된다.

오늘 1독서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소명 사화’ 를 듣게 된다. 자신이 있기도 전에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존재와 삶을 성별하신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불러 명하신다.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예레1,7).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고 무엇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말해야 하는 소명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자기 혀에 단것만 좋아하고 자기 귀에 듣기 좋은 것만 들으려 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소명은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희년(禧年)을 선포하신 직후, 사람들이 마음속에 숨겨둔 악하고 그릇된 생각과 행동들을 들추어내신다. 사람들은 칭찬에 이어 분노와 화를 내며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시메온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2,34)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장차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 소명을 완성하시게 될 것이다.

참으로 예수님은 칭찬과 보람의 길이 아닌, 반대와 시기로 힘겹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셨다.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뜻이나 마음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하셨을 뿐이다. 자신의 뜻대로 행하다가 받는 반대와 시기라면 그 힘겨움이 덜하겠지만, 소명으로서 주어진 ‘그 길’에서 받게 되는 반대와 시기는 견디기 힘들고 두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소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실 수 있으셨을까? 팔자, 운명으로 받아들였을까? 오늘 2독서에서 소명 안에서 어려움을 이겨낸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한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 사랑이 그 힘이었다. 사랑은 곧 하느님이시다. 성경에서 전하듯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람들에 대하여 참고 기다리신 그 사랑으로 예언자들과 예수님도 끝까지 그 길을 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받은 부부, 부모, 자녀, 신앙인, 성직자, 수도자로서의 소명은 모두 사랑의 소 명, 길이다. 이 소명, 이 길에 많은 반대와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소명과 길은 오직 그리고 반드시 사랑으로 완성될 것이며 그 사랑은 모든 반대와 시기와 두려움을 쫓아내며 모든 것을 견디어 내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며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 강희재(요셉) 신부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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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에 불과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거만한 마음으로 그렇게도 ‘기쁜 소식’에 대해 마음의 문을 척하고 닫아 걸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복음의 말씀에 획을 그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그 복음 말씀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고 귀찮게 하는 소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주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가 더는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초라한 목수의 아들에게서 시기심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계속해서 무시하고 싶어했는지 모릅니다. 그저 그런 카파르나움에서나 좋은 일을 하며 다니고 있지, 조금 잘 나간다고 고향에서는 ‘기적이라는 것’도 일으키지 않는 괘씸한 인물로 비쳤는지 모릅니다. 마음속이 꼬이고 뒤틀리고 선입견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리고 이방 지역 사람인 사렙타 과부와 나아만 에게만 주님의 자비가 베풀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겸손하고 비어있는 겸허한 마음안에서만이 주님의 기쁜 소식은 비로소 싹을 틔웁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인 말씀이 실천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들춰내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몹시도 미워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경고조차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오로 파다, 아폴로 파다’하고 파를 나누어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는 이제 바오로 사도의 권위조차 의미가 없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간곡히 호소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사랑만이 언제까지나 남아있게 될 것이라고 가슴 절절한 편지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선포하신 기쁜 소식이 어떤 이에게는 삶의 희망으로 고동치는 말씀이 되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주님조차 벼랑으로 몰고 가는 그런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갈림길이 주어집니다. 옹색하고 거친 내 마음으로부터 주님의 기쁜 소식이 내몰리게 될 수도, 사렙타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처럼 나의 삶이 주님의 자비로 가득 차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성 요한의 말씀입니다. “이 생명이 넘치는 저녁에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 김영삼(요셉) 신부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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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복음 전파는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의연하게???

신학생들은 사제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서 7년 동안 생활하며 철학과 신학은 물론,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여러 수련을 통해 성덕에 매진한다. 이러한 양성 과정은‘좋은 사제’(?)의 양성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대리할 ‘제2의 그리스도’를 육성하는 것이다.

세상의 시각에서는 성실하고, 학식과 덕을 겸비한 사제면 충분할지도 모르겠지만, 교회적으로는 주님의 파견자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제의 양성이 더 중요하다. 특히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양분화(정치의 진보와 보수, 구직하는 청년과 노인의 갈등, 경제적 빈자와 부유한 자, 남자와 여자의 인권)의 현실 상황 속에서 요청되는 사제의 정체성은 사랑과 정의의 복음을 선포한 예수님의 제자이다.

오늘 복음에는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고난과 아픔이 묘사되고 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오랫 동안 기근이 들었을 때,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을 때,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이 결코 펼쳐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때에,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이방인들에게 오히려 풍성한 은총이 베풀어졌음을 상기시킨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격분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벼랑까지 끌고 가는 긴박한 장면이 연출된다(루카 4,25-30 참조).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직설법이 아니라, 완곡하게, 그래서 그들이 편하게 수용할 수 있는 어법을 구사하셨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더 기울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은 단호하게 당신의 생각을 펼치신다. 그들의 반대와 거부감을 직시하시면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과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드러내신다. 이런 예수님의 행위는 분명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명 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복음은 사람들의 반응과 호응에 의존하며 발설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고 삶을 변화시키는 원천이기에 타협과 조정의 대상이 아님을 명확하게 하시는 것이다. 복음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라며 적당한 타협으로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책임성을 요구한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 역시 전적인 응답을 요청한다. 물론 왜곡된 형태의 종교들처럼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며 강압적으로 회유할 필요는 없겠지만, 참다운 진리라는 것에 대한 확신과 믿음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명료하게 전해야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예레 1,19)라는 말씀처럼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과 믿음으로 형제들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역할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 수원교구 노희철 베드로 신부 : 2016년 1월 31일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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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만 믿으세요”

몇 년 전 어느 분유회사의 광고 문구입니다. 오로지 품질만을 보고 구입하라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 광고는 어떤 믿음이나 신뢰 관계를 전제하지도, 요구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물건을 내놓는 공급자와 그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보이는 것만 믿고 살아도 되는 걸까요?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야말로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는 사람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선포한 은혜로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가슴에 품지 않고, 그들 눈에 비친 고향 청년이며 요셉의 아들인 예수만을 고집스럽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하기야 예전에 보았던 그 시선, 그 기억이 전부인 고향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마음 깊숙이 들어갈 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의 힘으로 기적을 베푸신다 한들, 그들에게는 여전히 ‘쇼’로 보일 것이 뻔합니다. 믿음의 눈이 가려져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기적을 보여준다 해도 하느님을 받아들이거나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미 고향 사람들의 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면, 당장은 편하고 좋겠지만 결국 내 신앙의 삶은 딱 거기까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은 우리 삶 안에서 매번 벼랑 끝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이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말씀을 통해 날로 거듭나고 성숙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생활 중에서 겪는 수만 가지 일들 중 나를 위한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묵상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관계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며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관계를 건강하게 지속하고 풍요롭게 성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관점이 됩니다. 그에 따라 내가 보고 있는 딱 그만큼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일 뿐입니다.

갈대 구멍 같은 편협한 시야가 아닌 하느님의 시각으로 먼저 나를 바라보는 연습, 너를 바라보는 연습, 우리를 바라보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겠습니다. 더 늦지 않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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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창해 요한 세례자 신부 : 2019년 2월 3일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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