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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용기를 내어라
조회수 | 1,705
작성일 | 07.01.24
어느 가게에 겨울 방학을 맞은 한 여대생이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손님은 기특한 생각이 들어 인사를 건냈습니다. "아이구, 착하기도 해라. 이렇게 추운 날씨에 열심히 일해서 학비에 보태는 모양이지?"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예요. 이 일 끝나면 성형수술로 쌍꺼풀 할 거예요!"

누구에게나 더 낫게 보이고 싶은 심정은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실 첫 인상을 보여주는 외모는 누구에게나 다 중요하겠지요. 그러다 보니 세상에는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의 내면적인 본 모습 보다는, 옷을 어떻게 입었는지 머리 모양은 어떤지, 외모는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차를 타는지, 그리고 출신지역, 학벌, 집안 등, 외적 기준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더 좋게 보이기 위해, 분수에 넘게 무리한 투자를 해서라도 겉모양 가꾸기에 신경을 쓰곤 합니다. 얼굴을 뜯어고치거나, 신형차를 새로 뽑거나 명품을 구입하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겉모양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다가는 행여 그 사람의 속에 들어있는 내면적인 가치를 지나쳐 버리지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설교 후에 나타나는 군중들의 반응과 돌변하는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권위있는 설교 말씀에 경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같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살던 인간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찮은 목수집안 출신이라는 인간적인 신분 앞에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 46)하는 식입니다. 겉모양만 보고 정작 그 안에 들어있는 보물을 놓쳐버리는 그들은, 마음이 굳어지고 닫힌 채, 부정적이고 비뚤어진 태도로 예수님의 참 모습과 가르침을 받아들여 믿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참다운 믿음이라야 하느님의 은총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마음을 열어,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믿음을 가질 때 "믿는대로 되게"(마태 8, 13)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랑의 큰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성경말씀에서, 수많은 기적을 통하여 병자가 낫고,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주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자세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편견과 자만으로 주님의 큰 은혜를 받아들일 마음이 닫혀 있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어떤 선물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막히고 비뚤어진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총의 주인이신 예수님 자신을 없애버리려는 시도까지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자신들을 건너뛰어 다른 민족에게 내리는 것을 시기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들은, 자신의 닫힌 마음을 고쳐 회개하기는커녕, 더 깊은 어둠의 길로 빠져듭니다. 불신과 악의에 차서 예수님을 거부하던 그들은, 급기야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진리와 정의의 길에서, 온갖 박해와 고초를 겪어왔던 많은 예언자들처럼, 예수님께서도 많은 반대와 고통이 닥쳐오지만, 그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나아가시며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길은 불의와 타협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길이 아닙니다. 적대세력 앞에 물러서지 않고, 불신과 악의에 맞서 당당하게 나아가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평온하거나 순조롭지만은 않은 우리 신앙인의 삶 속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적대감과 비난을 만나더라도, 이에 굴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 떳떳이 나아가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따라서 매일의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는, 천박한 부귀영화를 구걸하지 아니하고, 비굴하게 속된 권력에 빌붙어 살기를 거부하며 "의로움에 목말라"(마태 5, 6)하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느님은 제1독서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금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갑니다. 이 한해도 하느님 권능의 힘으로, 세상의 불의와 어둠을 이겨내고, 떳떳하게 빛으로 살아갑시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7, 33)

▶ 이성길 (바오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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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도전 받는 기쁨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출신성분이 걸림돌이 되었나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사람들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복음이 스며들게 하는데 있어서 방해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렙타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들이었고 그 당시 예언자들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편견과 고정관념 없이 예언자들의 말을 받아들여 실천에 옮겼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어디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새로운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데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에 갇혀 신앙생활을 해나간다면 구원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시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목해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며 분노를 일으킨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전하는 복음 말씀이 그들에게 불편하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지닌 우리의 몫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적 가치와 멀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예레 1,18-19)

사방의 적들에게 포위된 고립무원의 예레미야에게 하느님께서 친히 예레미야의 힘이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지니고 있는 우리가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목숨을 위협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충분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목숨과도 같은 자존심을 버리기도 해야 합니다. 또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고통을 못 본 척 하며 살아갈 때 그들에게 불편한 소리를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사지로 내모는 정부의 정책이나 활동에 대해 기득권에 편승하여 침묵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명목상의 신자들에게 가서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역시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예레 1,19)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가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그들은 무엇에 이끌렸는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막지 못합니다. 예레미야에게 들려주신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예레 1,19)

이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곳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러 갑시다. 도전 받는 기쁨이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 안동교구 사공균 알로이시오 신부 : 2016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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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진리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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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의 말씀을 듣는 우리는 위대한 예언자의 구원의 행적을 보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해주는 향주덕(믿음, 희망, 사랑) 가운데 사랑이 으뜸임을 새깁니다. 예수님의 고향방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진리 자체이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믿음을 통해 올바른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주님의 계명인 사랑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출생 이전부터 주님께서 성별하시어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운 예레미야는 벤야민 출신 사제 힐키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절박한 시대인 예루살렘의 함락과 바빌론 유배를 당한 민족들의 위기와 유다왕국 종말의 난국을 예언합니다. 여기서 민족들이란 유다의 주변국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 이민족을 포함한 말입니다.

유다의 요시아 왕 집권 13년(기원전 627)에 그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예언자의 삶에는 언제나 시련과 고통이 따르지만 부패한 세상을 고발하고 쇄신의 뜻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기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자인 유다의 임금과 대신은 물론 나라 백성들에게 맞서 당당하게 말씀을 전합니다.(제1독서)

코린토 교회를 사랑하는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분열 소식을 듣고(1코린 1,11),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임을 일깨웁니다. 주님 향한 믿음, 희망, 사랑 속에 주님과 올바른 관계가 계속되는 ‘사랑의 길’을 밝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시어 자유로운 선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쁜 삶을 살게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은사에 힘입어 천사의 언어를 구사해도 사랑이 없으면 요란한 징이나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며, 예언의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큰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심지어 모든 재산을 나누고 몸마저 바치는 자기희생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역설합니다.(1코린 13,1-3)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열다섯 개의 동사로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도, 뽐내지도, 교만하지도, 무례하지도, 자기이익을 추구하지도, 성을 내지도,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가 아닌 진실을 두고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며, 견디어냄을 가르칩니다.(1코린 13,4-7) 예언이나, 신령한 언어, 부분적 지식과 같은 카리스마와는 대조적으로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 영속성을 지니고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사랑이 성숙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비와 사랑을 온전히 알게 됩니다.(1코린 13,8-13)

복음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무슨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일까요? 바로 지난 주일에 우리가 들었던 구절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주님의 말씀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거나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이방인일지라도 말씀을 받아들이면 듣는 가운데 이루어져 주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완성된 때를 알리는 희년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고향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4,22) 하고 의아해 합니다.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요? 고대 지중해 문화의 한 단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나 출생을 연고로 부모의 신분과 명예를 계승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열린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만 여기는 고정관념에 빠져 믿지 못합니다.

가족의 명예인 가업(목수)을 이어받지 않으신 예수님은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보아라”(루카 4,23)라는 말로 고향사람을 더욱 놀라게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과학적 의료시설도 없었거니와 바이러스 같은 병원균을 알지도 못했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치유능력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이방인들에게 보여 주신 기적들을 바랐던 고향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적개심을 불태웁니다. 위대한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편견이 지배하는 고향에서는 치유활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예언자로 묘사됩니다. 엘리야가 가난한 과부 사렙타에게 베푼 기적(1열왕 17,8 이하)과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치유(2열왕 5,1 이하) 해주는 이야기에 대한 루카 복음사가의 기록(루카 4,25-26)은 여러 가지 목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그들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하고, 처음에 놀라움을 드러낸 백성들이 분노로 바뀐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며, 장차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중시하여 복음을 선포하심에 정당성을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세상에 함께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도전인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이 일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지를 회심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거룩한 성사로 주님과 친교를 이루고 있는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바르게 듣고 있는지, 가난한 이웃에게 다가가는지, 생명의 존중과 공동선의 추구에 노력하는지, 사회 평화와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지, 그리고 겸손한 봉사자로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은총을 삼가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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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가톨릭신문 2019년 2월 3일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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