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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땅히 지켜야할 변치않는 권위
조회수 | 1,923
작성일 | 07.01.24
교구 사제 인사에 지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출신지 본당으로는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성당 사정도 잘 알고 많은 신자들과도 친분이 있어서 출신지 성당이 사목을 하기에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좋은 시절에는 누구나 잘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과 사목자 간에 의견이 대립되고 갈등이 빚어질 때 인간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바로 그 점이 장애요소로 작용합니다. 사목자로서의 전문적 안목과 고민을 거듭한 숙고에 의해 결정된 사항도 인간적 경험과 친분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출신지 본당으로는 사제를 보내지 않는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겪었던 일 같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고 그 권위에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금의환향하듯이 오랜만에 고향 나자렛을 찾으셨습니다.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권위있는 말씀에 탄복을 하면서도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나자렛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청년의 가르침을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처럼 속된 사람들의 눈엔 구원자 예수님에게서도 그저 인간 예수만이 보일뿐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런 배타적 행동을 보시고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발길을 돌리시지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시대나 사제의 출신지 본당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성당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녀는 인간적 능력에 따라 그 직분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계셨기에 지금의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는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고 말씀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뽑아 세우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해서 또 출중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또 그 부르심에 모든 것을 다 놓고 응답했을 때 비로소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제는 개인 능력이나 판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과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이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삶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성직자와 수도자인 것이지요.

흔히 우리 시대를 권위 부재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랜 독재정권 시절을 겪은 사람들은 그 후유증으로 권위 자체에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권위는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장의 권위가 없으면 그 가정은 흔들리고 집안이 무너집니다. 선생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교육이 바로 될 수가 없습니다. 의사선생님의 권위를 환자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병 치료는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위를 국민들이 우습게 안다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권위는 반드시 지켜지고 존중돼야 하는 것입니다. 지켜지고 존중돼야 할 권위를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권위자 자신임은 물론입니다.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권위가 없는 성당은 신자들이 불행합니다. 물론 성직자의 권위는 복음적 삶에서 비롯돼야 하지요. 참으로 좋은 공동체는 신자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고 믿으며 그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를 깊은 뜻으로 마음에 담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이뤄집니다. 그 때 신자들은 행복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 또한 그런 신자들의 기도와 믿음에 성화해 더욱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우리는 복음적 공동체라고 이야기하고 바로 이런 공동체에서 기적은 이뤄집니다. 인간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뤄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이 그들에게 있었다면 나자렛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흘러넘쳤을 것입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사셨던 축복된 나자렛이었지만 속된 경험과 편견으로 길이 지속될 은총을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 어떤 것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읽을 줄 아는 믿음과 혜안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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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지난 주일의 복음(루가 1,1-4: 4,14-21)은 루가가 기록한 성경(루가 복음과 사도행전)가운데 제 1편의 서두로 시작해서 예수님 안에 이루어진 구약 예언서의 완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복음(루가 4,21-30)은, 그 구세주 예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자연적인 반발 또는 무시당하는 과정을 그려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저것으로 변명하지 않으시며, 또다시 구약의 예를 들어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선민이다' , ‘이스라엘 백성이다', ‘유태인이다'하는 자연적 기원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착한 뜻'과 ‘믿음'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유명한 격언이 된 말씀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구원사와 인간사에 있어서의 공통점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루가가 기록한 성경의 특징은 고대 희랍의 서간체 형식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당시 로마 제국의 고관이었던 테오필로에게 ‘기쁜 소식'을 그대로 알려 주어 그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신앙을 가지고 구원의 길로 들어오라는 초청의 내용입니다.

똑같은 문체의 서두가 루가복음의 제 2편인 ‘사도 행전'에 기술되어있습니다. 테오필로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공통적 견해입니다. 이러한 서두가 끝난 다음, 즉시 루가는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의 요한 세자에 대하여 언급하며 예수의 탄생 내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간 과정을 뛰어넘어 4장 후반이 우리가 묵상해야 할 내용입니다. 즉 ‘기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 ‘기쁜 소식'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모양으로 이루어졌고 이루어질 것인지를 말해 주려 합니다. ‘기쁜 소식'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약속되었고(창세기 3,15),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선포된 것입니다. (이사야 61, 1-12)

사실 창세기로부터 구약 47권의 모든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 모든 역사적인 사건, 인물, 예언을 언급하고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구원사의 주인공인 ‘예수' 즉 ‘메시아'를 그리기 위해서 열거된 것입니다. 그 구약의 기다림의 주인공이 이제는 실현된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 주인공은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무대를 위해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관중, 즉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은총과 사랑을 받는 기준은 이제는 더 이상 혈통적, 종족이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하느님이 사람으로 되신 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탄생이, 인간의 생애가, 인간의 고통이, 삶의 과정이, 인간의 죽음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고 실증하기 위해서 ‘내가 걷고, 우리 모두가 걷는 이 모든 어려운 인생살이의 과정'을 거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 하느님의 놀라우신 계획, 교육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즉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실제로 보는 것이 더 낫다', 또는 ‘백 번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한 번 모범으로 실천해주는 것이 더 낫다'라는 이 진리를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는 왜 이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하느님, 나는 왜 가난해야 합니까? 하느님, 어찌할 수 없는 이 인간사의 부조리는 무엇입니까? 하느님, 왜 나는 무시와 천대를 당해야 합니까? 하느님, 사랑하는 우리들은 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또 갈라지며 그리고 죽어야만 합니까?"하는 물음표가 달린 원성은 무한히 계속됩니다.

그것은 우리만의 원성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 사막과 광야에서 고통받았던 이스라엘, 바빌론으로 유배갔던 이스라엘,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원성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사랑하고 뽑았던 선민 이 었습니다.

그 원성에 하느님은 해답을 주겼습니다. 예수를 보냈습니다. 그 예수는 갓난아기로 탄생되어, 우리와 똑같은 어려운 생활을 하였고, 결국은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매어 달린 예수! 그 예수는 우리의 모든 원성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고통을, 어려움을 그대로 수락하여 이겨낼 때, 그 예수는 부활의 예수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스라엘 백성은 미처 깨닫지 못했고, 신앙인인 나도 가끔은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 ‘이웃을 사랑해라', ‘기도를 잘 바쳐라' 등등, 웃어른들의 올바른 가르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웃어른들이 착한 사람이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기도조차 바치지 않을 때, 자녀들은 오히려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로써 신앙이 무엇인지를 제 3자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신앙 때문에 어리석은 이들의 비웃음을 받는다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함세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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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주 박람회와 하느님 사랑 닮기

얼마 전 서울의 한 무역회관에서 박람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첨단 기술이나 제품을 널리 알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다양한 점술을 소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들어보지도 못한 별의별 점술을 소개하고 직접 그 자리에서 점을 볼 수 있도록 기획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냥 재미있는 박람회라 넘길 수도 있지만 시대의 불안과 혼란을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삶에 대한 자신감 결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렇게 해서라도 위로받고 싶은 것이겠지요.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생활양식으로는 행복, 평화, 정의, 사랑과 같은 보편 가치를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 분위기를 읽을 수도 있습니다.

흔히 예언이란 미래의 길흉화복을 미리 내다보고 그 피할 길과 취할 길을 알려 주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일부 신앙인조차 성경의 예언서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서는 미래를 점치는 비책(秘冊)이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는 오히려 현실에 대한 냉정한 성찰을 제시하는 인물로 그 성찰의 눈을 하느님의 뜻에 맞추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길을 벗어난 공동체의 부조리를 준엄하게 고발하고 하느님과의 화해 곧 회개를 촉구합니다. 결코 미래의 저주를 놓고 협박하거나 미래의 복을 놓고 감언이설로 현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의 고발과 촉구는 귀에 거슬립니다. “온 땅”과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예레 1,18)이 예언자의 고발에 맞섭니다.

그렇게 맞서기만 하지 않습니다.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혹은 하느님의 길을 펼친다는 이유로 “화가 잔뜩 나…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루카 4,28)까지 끔찍하게 죽이려 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증오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행복과 번영을 자기들만 누리려고 즉 구원을 독차지하려고 했었고, 이에 맞장구를 쳐주거나 적어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탐욕과 그릇됨을 질책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인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 하니 가만히 놔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분쟁과 다툼, 분열과 갈등의 뿌리에는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길흉화복 중에 길과 복은 자기가 독차지하고 그리고 흉과 화는 남에게 떠넘기려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도 그렇고, 집단과 집단 사이도 그렇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이기심과 탐욕이 꿈틀거리면 분열하고 다툽니다. 고린토 교회도 그랬을 것입니다. 이기심에 터한 다툼과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랑이 으뜸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 나에게 이로운 사람, 나에게 길과 복이 되는 사람을 향한 사랑은 끼리끼리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보잘것없는 이로 취급받는데다가 한센병까지 걸린 이방인 나아만 같은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평화의 길로 이끕니다.

점볼 양에 여기저기 기웃기웃 하는 대신에 차라리 시대의 징표를 읽는 수고를 아끼지 말며 하느님 사랑 닮기에 부지런히 발품을 팝시다.

▶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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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영 받지 못한 예수님

1. 복음이야기(루가 4,21-30)

예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셨습니다(루가 4,16-21).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신 것은 물론이거니와 친척들과 고향사람들 심지어 제자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은총의 말씀에 고향사람들 모두가 놀라면서도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고작 요셉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 “의사여, 네 자신부터 고쳐라”라는 속담을 들이대면서 가파르나움에서 하신 기적들을 나자렛에서도 행하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라는 속담을 말씀하시면서 이적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고향사람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마르 6,6).

기원전 9세기에 예언자 엘리야는 많은 이스라엘 과부들을 제쳐두고 오직 이방인 과부를 돌보았습니다(1열왕 18,7-16). 그 제자 엘리사 역시 많은 이스라엘 나병환자들을 제쳐두고 이방인 나병환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이렇듯 예수께서도 복음을 전하셨지만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배척한데 비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향과(24절) 동족을(25-27절) 경시하는 말씀을 하시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분을 도시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는 복음서 작가 루가의 구원사관이 담겨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 작가는 자신이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썼습니다. 본디 예루살렘에서 탄생한 원시교회의 신도들은 모두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먼저 유다인들을 상대로 전도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와 사도 바울로의 개심을 계기로 이방인들을 상대로 한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했지만 이방인들은 잘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족과 고향사람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으셨으나 이방인들과 타향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루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 안에서 교회의 미래를 올바로 바라보는 예언자적인 슬기를 모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적인 예언의 정신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함께 수용해야 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것에 치우쳐 믿음 없이 교회를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충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오늘 복음에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21세기를 맞고 있습니다. 과거의 부흥에 안주하지 말고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많은 지성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늘 새롭게 태어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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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나자렛 사람들은 이 지역 출신의 젊은이인 예수님으로 부터 희망의 말씀을 듣고 모두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금세 의혹이 꼬리를 뭅니다. ‘우리 동네에서 저런 선생이 나왔다고? 심지어 다른 곳에서는 기적까지 했다지? 그런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 목수의 아들이라고? 가르칠 자격은 되나? 어디서 배웠지? 누구에게서 저런 힘을 받은 걸까?’

묻기만 하지 믿지는 않는 고향 사람들. 예수님은 이들을 두고 한탄하시면서 이전에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를 믿어 기적을 입은 예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폭발합니다.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거냐?” 사람들끼리 드잡이질 할 때나 입에서 나올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경탄에서 질시로, 그리고 분노로 이어지는 마음의 흐름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가 떨어뜨리려고 하는 폭력적인 해결책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무시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절한 권리야 당연히 주장해야 하겠지요.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무시당한 다고 느낄 때 매번 폭력의 고리로 마음을 옭맨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 평화는 스스로 체험하고 살기에 남에게도 전해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자기 스스로 평화를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그렇게 평화를 지켜 가면서 다른 이들도 함께 평화에 물들여 가는 이들이 평화의 일꾼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를 무시하는가 아닌가로 마음에 천불이 치솟고, 말투가 변하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바뀝니다. 정작 우리 자신은 고의로 남을 무시하는 일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당할 때는 남이 악한 마음을 품었다고 추정하고, 나 스스로 먼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르십니다. 남들의 태도에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분은 무시한 적이 없으시지만 무시했다고 오해받고 위험에 처하십니다. 경탄에서 질시로, 질시에서 분노로 옮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무시당한 분은 오히려 그분이십니다. 그분은 기꺼이 무시당하는 편에서 살아가신 분이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갈 길을 가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 뒤에, 부활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에게, 남을 무시하는 것도, 남에게 무시당했다 하여 곧바로 분노하는 것도 둘 다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랑의 계명 안에서 우리는 무시하는 태도도 버리고, 무시당했다고 스스로 내 안으로 말려들어 가버리는 태도도 버립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 이 믿음 안에 우리가 일희일비하지 않을 힘이 들어 있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루카 4,30) 가시는 예수님과 일치합니다.

▥ 서울대교구 손경락 사도 요한 신부 : 2016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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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1. 예수님 말씀을 감미롭게 받아들이다가도 즉시 뱉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복음서는 재미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말씀이 지금 여기 예수님에게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리자 모두 예수님을 좋게 말하며 은총의 말씀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즉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음에 마음이 편치 않음을 내비치고 계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시돈 지방의 이방인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치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이방인을 선택하시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계시다는 복음을 알리셨습니다. 그때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잔뜩 화가 난 가운데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갓난아기 예수님을 안고 외치던 시메온의 예언이 이미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한다.”

저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얼마나 위로를 많이 받는지, 얼마나 많은 용기를 얻고 희망을 얻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때로는 저의 기분을 편하지 않게 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 말씀대로 살기를 주저하고 제 안에 안주하려고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하늘로부터 받은 복음을 제 안에 가두려고 할 때 이미 복음은 사라지고 분노와 단죄와 슬픔만 남습니다.

2. 왜 하느님 말씀을 두려워하나?

왜 우리는 끝까지 복음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기를 두려워할까요?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설프게 하느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만 옳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배제할 때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작게 시작된 이 현상은 심각하게 확대되기도 합니다. 교회에 겸손하게 입교한 신자가 한때 열심히 믿다가, 성장이 멈추고 목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할 때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성직자로 살아가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송이 신부일 때는 겸손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다가, 뭔가 좀 안다 싶으면 서서히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선배 신부님을 비롯해 다른 신부들과 소통이 되지 않기 시작하고, 신자들에게 겸손하게 다가가기를 그만두게 됩니다. 신자들과 주민들에게 더는 기쁨을 갖다 주지 못하고 맙니다.

이렇게 마음을 닫아버리니 하느님 말씀이 내 안에서 질식하고 사라지고 맙니다. 하느님 말씀을 새롭게 들으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맙니다. 어느새 하느님 말씀을 들으려니 두려움이 앞섭니다.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지 못하니 내 영혼이 영양실조에 걸리고 맙니다. 나도 쓰러지고, 공동체도 경직되고 분열되고 소란스럽게 되고 맙니다.

내 영혼을 향해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하는데,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 명령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적당히 하느님과 타협하면서 살면 되겠다는 속삭임이 내 귀에 들려옵니다. 그럴수록 교회는 하느님 말씀과 멀어지고, 내용물 없는 포장만 남게 됩니다. 복음이 사라진 내 영혼, 복음이 사라진 교회를 많은 사람이 떠나고 맙니다. 더 이상 매력을 주지 못하는 곳에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 말씀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지 않게 해주십사고 성령의 이끄심을 매일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맛 들이며 살면,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자신감 갖고 증언하고 증거하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해서 하느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닮아서 사랑하고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승욱 신부 : 2016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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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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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는 노란색의 크고 둥근 꽃으로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고, 영양분 많은 까만 씨앗으로 우리 몸을 이롭게 해줍니다.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기 위해서는 해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해가 해바라기를 비추듯이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의 빛으로 비춰주십니다. 그분은 ‘참고 기다리는 사랑, 친절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랑, 진실을 두고 기뻐하면서 모든 것을 덮어주는 사랑’(제2독서)을 빛처럼 우리에게 내려주십니다. 그 빛을 향해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이 아름답게 피어나서 이웃사랑이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충만한 사랑의 빛으로 비춰주셨습니다. 그들이 믿음과 희망, 사랑이란 꽃과 열매를 맺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도 자주 하느님을 등지고 우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 결과로 불행과 고통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때가 되자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주시고자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부터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빛을 전해주십니다(복음). 나자렛 사람들은 은총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합니다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굳어진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 쓴소리를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발끈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몰려들었지만,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하시면서 약하고 힘든 이들을 자비롭게 보살펴주셨습니다. 하지만 군중의 비위를 맞추던 분은 아니었습니다. 과거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랬던 것처럼(제1독서) 필요하다면 백성에게 맞서셨습니다.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도 꺼리지 않으셨고 그들의 분노마저도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여론의 향배’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격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오만에 혼자라도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무리를 지어 거친 목소리를 내는 이들 앞에서 진실이 맥을 못 추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다수의 횡포에 저항하려면 고독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의 소유자는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곁에서 - 생각 없이 또는 그렇게 안 하면 왕따 될까 두려워 - 덩달아 손가락질하지 않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들 곁에서 무작정 따라서 똑같이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뿌리를 깊이 둔 분으로서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셨기에 진리를 위해라면 다수에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빛 안에 머물면서 그 빛의 도움으로 고독하더라도 진정한 용기를 발휘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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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 : 2019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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