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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태양은 어느 집 앞마당만 비추지 않는다.
조회수 | 1,938
작성일 | 07.01.26
인간은 누구나 '내 것'을 갖기를 고집한다. 이것은 가끔 배타주의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나자렛 회당에서 야훼 하느님은 모든 인류의 하느님임을 말씀하신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곤경에 처한다. 나의 신앙자세는 어떤가?

1. 우리 신부님은 바람둥이야.

여자 신자들이 모여 앉아 부임해 온 지 1년도 안 되는 본당 신부님의 품평회를 한다. 제 나름대로 신부에 대한 견해를 거침없이 쏟아 놓는다. 그런데 어떤 신자가 "우리 신부님은 아무래도 바람둥이 같아!"라고 했다. 신자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는 신부에게는 치명타가 아닐 수 없는 말이었다. 거기엔 신학생 어머니도 함께 있었다. "이거 큰일이다." 싶어서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다그쳤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우리 신부님은 이 여자도 좋다, 저 여자도 좋다고 하시니 그렇지요."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신학생 모친은 "그야 본당신부님은 모든 본당신자들의 신부님이 신데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시고 다 잘해 주시는 것이 당연하지. 어떤 사람에게만 특별히 잘해주는 것이 문제지! 안 그런가?"하였다. 그랬더니 본당신부를 바람둥이라고 한 그 신자는 "그래도 그러니까 나는 싫던데요!" 하며 시무룩해졌다. 신학생 모친은 가만 있지 않았다. " '태양은 어느 집 앞마당만 비추지는 않는다'는 말도 몰라?" 그러자 모두 의논이라도 한 듯이 "맞아, 맞아, 그 말이 맞아!"하며 입을 모았다.

2. 예수님의 고향에서의 봉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에서 봉변을 당하신다. '목수 요셉의 아들인 예수'의 밑천을 훤히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파르나움에서 하셨다는 기적의 소문을 들었지만 긴가 민가 하였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어디 한 번 기적을 해보라고 요구하였다. 믿음은 없으면서 눈요기를 하겠다는 호기심의 발동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신다.

예수님은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적을 말하시면서,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방인 과부댁 뒤주의 밀가루를 많게 하고, 수많은 나병환자 중에 이방인 장군 나아만 만을 치유하신 기적들을 상기시키신다. 이 기적들은 불충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행한 것들이다. 이것은,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면 신분과 언어와 피부색을 뛰어넘어 누구나 거두어들이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고향 나자렛 사람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들은 모두 들고일어났고,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루가4,29)

3. 구원의 보편성(모든 사람들을 구원에로 부르신다)

구원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엔 야훼 하느님이 자기들만의 하느님인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중엔 이스라엘이 잘못을 저지르면 이방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벌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배를 경험하면서 이러한 깨달음은 더욱 깊어졌다. 후기 예언자 시대로 내려오면서 하느님이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라는 '보편주의'가 강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선포되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에도 "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 1,5)고 말씀하신다.

군에 있을 때, 대위 4명이 항상 함께 다녔다. 나는 하도 이상해서 "저 사람들은 왜 항상 함께 다니는데요?"하고 모시고 있던 신부님께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저 사람들은 사관학교 출신이라고 다른 사람들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고 저희들끼리만 다닌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부터 그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너희들과는 다르다."를 강조하며 못난 자존심을 내 세우는 그들에 대해 '삼가 조의(弔意)를' 표하고 싶었다.

같은 성(姓)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集姓村)은 다른 동네보다는 항상 더 배타적이기 쉽다. 그리고 그런 곳은 늘 발전의 대열에서 밀려나고 후진 곳으로 남아있게 마련이다. 네 본당 내 본당을 살벌할 정도로 따지는 것이나, 교파간의 장벽, 지방색, 지역 감정 등 이 모든 것은 비뚤어진 특권의식이나 선민의식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옹졸하고 미성숙한 못난 짓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교회는 이미 제 2차 바디칸 공의회를 통해서 타 교파는 물론, "자기 탓이 없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한 바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은 우리들만의 하느님인양 착각하는 때가 많다. 2차 대전 때에 독일과 프랑스 교회는 모두 자기들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함으로 하느님을 난처하게 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다. 가톨릭 신자라면 참으로 가톨릭(catholic)적인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확 트인 시야와 사고를 지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옹졸한 편가르기로 하느님을 욕되게 한 적은 없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신다.

▶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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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우리는 해외원조주일로 정해 놓고 실시해 오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예전엔 이 주일을 “구라(救癩)주일”이라 하여 전국 각 본당에서 2차 헌금으로 나병환자들을 도와왔습니다. 시대가 좋아짐에 따라 나병환자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또 다른 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데가 많아지게 되자, 언제부턴가는 이 주일을 “사회복지주일”이라고 바꾸어, 사회복지 쪽으로 우리의 눈길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이 주일을 “해외원조주일”이라 하여 우리의 손길이 해외로 뻗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못 사는 사람들이 많고,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여러 곳 있을 터인데, 우리가 뭐 잘 산다고, 아니 뭐 잘났다고 우리나라를 제쳐 두고 해외에 원조를 해 준다는 말인가? 하고 쉽사리 납득이 잘 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해외원조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위성을 저는 오늘 성경말씀에서 찾고자 합니다. 즉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라는 말씀이 그 말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의사도 아플 수 있고, 의사의 가정에도 환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의사는 또한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남을 고치고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외에 우리 도움의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과거에 우리가 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의 손길을 받은 것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μακαριον εστιν μαλλον διδοναι η λαμβανειν. 사도 20,35)라는 말씀과 결부하여, 오늘 제2 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1코린 12,31)라고 하시면서 그 유명한 “사랑”의 가르침(1코린 13장 전체)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랑의 실천 중에 하나가 바로 남을 도우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의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으니,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을 도울 수 있지만(참조. 마르 14,7), 해외원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쉽게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서 교회가 이런 뜻을 내 세웠을 때, 우리도 같이 힘을 합치는 것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이런 우리 마음에 주님께서는 오늘 제1 독서의 말씀, 즉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2,19)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실 것입니다. 아멘.*

▶ 황봉철 신부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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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함정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 문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 은 이미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용철 시인의 <‘안다’는 것은>의 일부분입니다. 시인이 노래하듯이 사랑한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오늘 제2독서인 사랑의 송가에 서도 ‘안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서로에 대해 올바로 안다는 것은 더 친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사랑의 지도입니다. 부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해와 사랑보다는 오해와 갈등, 분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알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모른다’는 것을 아는 태도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온전한 앎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른다는 자세는 상대방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상대방의 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지 않는 것, 말하지 못하는 아픔과 상처까지도 경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잘 아는 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 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 고 말씀하십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함정을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이 시대에 별 볼 일 없는 ‘누구’와 내세울 것 없는 그저 그런 환경이 예수님을 키우셨던 요셉 성인이 될 수 있고 예수님께서 자라셨던 고향 나자렛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 판단하고 무시해버렸던 그 사람 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 사람과 그 동네가 바로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나자렛입니다. “나자렛의 주 예수 그리스도님, 환영합니다!”

▥ 마산교구 박인수 요한 신부 : 2016년 1월 31일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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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저희 지세포성당은 마당 안쪽 화단에 큰 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세포성당을 설립하면서 함께 세운 큰 돌인데 거기에는 아주 짧고도 강렬한 성경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겸손과 순종.’ 너무 크게 적혀 있기에 어디에서나 잘 보이지만, 때로는 그냥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눈여겨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말씀이지만,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이방인 인물을 비유로 들면서 자신의 고향 사람들을 은근히 질타하십니다. 그러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몹시 불쾌해하고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늘 무시하고 하느님도 모르는 민족이라고 멸시했던 이방인들과 비교를 당하고 오히려 구원의 은총이 그들에게 내려졌다고 예수님께서 정곡을 콕 찔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자신의 고향 사람이자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인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 구원받은 민족이라는 자긍심과 함께 불신과 교만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반면에 예수님께서 예로 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의 말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었으며 그 하느님을 진심으로 알고자 하는 열망이 컸기 때문에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먼저 알고 경험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분의 은총과 구원에 한 발짝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한발 앞서 있는 것이 때로는 하느님을 더 열정적으로 알고 믿게 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삶도 그렇듯이 신앙도 익숙하게 되면 자신의 경험에 의지하여 더 이상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신앙생활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을 식게하고 마비시킵니다. 이미 하느님을 좀 안다는 착각과 교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아닌 내 신앙으로 고착화되어 굳어 가고 있는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곤 합니다. 나의 오만과 독선, 어설픈 앎과 경험이 하느님께 새롭게 나아가지도 못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도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다시 한번 지세포성당 화단 앞에 우뚝 서 있는 큰 돌에 새겨진 성경의 말씀을 떠 올려 봅니다. ‘겸손과 순종.’ 예수님과 성모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신앙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간단하고도 명료한 이 두 말씀만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구원 받은 신앙인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민족의 큰 명절인 설, 가족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고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늘 함께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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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효 베르나르도 : 2019년 2월 3일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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