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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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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답을 바라지 않는 '풀코스 서비스'
조회수 | 2,480
작성일 | 04.07.08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과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하고 계시는 작가 한분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황혼의 나이에도 열정적 삶을 꾸려 가시느라 식사마저 자주 건너뛰던 그분 앞에서 제 인생은 너무나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분이 언제나 들고 다니시는 작은 수첩은 하루에도 몇 건씩 무료 강좌 및 봉사활동을 위주로 한 일정-주로 힘들고 돈 안 되는, 그래서 남들이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정-으로 빼곡했습니다.

젊은이도 감당해내지 못할 정도의 강행군에도 전혀 끄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얼굴은 미소와 활기로 언제나 가득 차 있었기에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건강의 비결? 우스운 대답이겠지만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건강에 신경 쓰고 말고 할 시간이 없어요. 한 가지 비결이 있다면 늘 감사하면서, 또 늘 봉사하면서 사는 겁니다. 이제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상에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고 떠나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어떠한 일이든 무조건 부딪쳐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진정한 이웃 사랑의 실천, 참된 봉사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예수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납니다. 적금 탄 돈을 모조리 빼앗기고 맙니다. 설상가상으로 안 빼앗기려고 저항하다가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초죽음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오락가락하던 그 절박한 순간 한 사제가 지나갑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사랑! 사랑!' 외쳐대던 사제였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자리를 떠납니다. 잠시 후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 사람 역시 빨리 시장을 봐야 한다며 황급히 길을 가고 맙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더러운 족속, 기분 나쁜 족속, 만나면 일진이 안 좋은 것으로 여기고 외면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멈춥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 앞에서 6단계에 걸친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는데, 이 봉사는 모든 봉사자들,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눈여겨볼 봉사의 전형입니다.

①발견(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②다가섬(가까이 가서)-③치료(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④후송(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⑤간호(간호해 주었다)-⑥애프터서비스(돈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사마리아 사람의 봉사는 봉사 중의 봉사, 모든 봉사활동의 전형이라는 것입니다. 치료뿐만 아니라, 회복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가 보십시오. 그의 행동 하나 하나는 참된 봉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에게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위험에 처한 어려운 인간이 어디에 있고, 또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또 그는 봉사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국적이나 종교, 당파는 사마리아 사람의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그 누구든 생명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봉사는 우리가 가끔씩 하는 또는 조금 하다가 그만 두는 봉사, 겉치레뿐인 봉사, 생색내기 위한 봉사, 적당히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봉사, 점수 따기 위한 봉사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봉사는 참된 봉사였습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봉사,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봉사, 그러나 결코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 봉사, 보답을 바라지 않는 풀코스 서비스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봉사를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진정한 인간은 봉사하는 인간입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는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쓰러진다 하더라도 기쁘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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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 200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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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이웃

오늘 복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가 적개심을 품고 바라볼 수 있는 이웃에 대한 온갖 편견과 쓸데없는 상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힘들지만 우리가 고정된 사고방식을 벗어 버린다면 내가 증오하던 이웃이 오히려 나에게 사랑을 베풀고 생명을 주는 은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먼저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가 10,29). 율법 교사는 이웃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 속에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면 도대체 그 한계가 어디까지 입니까?”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마치 베드로의 질문처럼 말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마태 18,21)

이제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먼저 사제와 레위 사람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피해서 지나가 버립니다. 아마도 사제와 레위인은 죽은 듯 보이는 사마리아 사람을 보면서 시체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다는 규정(이스라엘 법 전승인 미쉬나 규정)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이런 행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전에는 내가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이끌어야 하는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죄가 계명을 빌미로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로마 7,9-11 신약성서 새 번역). 율법을 준수하는 사제와 레위는 부정에서 벗어나 정결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히려 한계에 부딪히고 결국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반면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무너지게 합니다. 증오하던 적이 참된 이웃이 되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다고 늘 믿어 왔던 사고의 경계선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명확하게 요청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 율법 교사의 답변이 그저 아는 지식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만 한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5-16).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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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0원 사랑 실천

얼마 전 하나원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하나원은 북한 이탈 주민들이 대한민국에 오면, 이곳에서 적응하기 위하여 국가 기관에서 교육을 하는 곳입니다. 강의 도중에 그들에게 목숨을 걸고 부모, 형제를 떠나 탈북한 동기가 무엇이냐? 그리고 북한이 그렇게 어렵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굶어 죽기 싫어서 였다’고 대답을 합니다. 96~98년도가 가장 어려웠는데 정말 가족들이 먹고 살기 위해 헤어져야 했고, 자기 품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우리가 말로만 듣던 ‘인육을 먹어봤다’고까지 합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이지경까지 되었는가?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합니다만, 아직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다시 북한에서 1년 동안에 한 가족이 얼마만큼의 돈이 있으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을했습니다. 그들은 미화 100불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정도면 5인이 1년은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세 끼니를 먹는 것이 아니고, 유엔이 정한 최소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화 100불이면 우리 돈으로 120,000원 정도 입니다. 이는 1인이 월 2,000원이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하루에 약 70원이면 죽어가는 한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100원짜리가 여러분에게는 얼마로 보이시나요? 우리도 북한 이탈 주민들 이야기처럼 값지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좋은 예로, 하루 100원을 봉헌하면 굶주리는 아프리카 주민 한 명에게 2일 간의 양식을 제공할 수 있고, 하루 100원씩 1개월을 봉헌하면 북한동포 한 명에게 한 달 양식을 제공할 수 있으며, 하루 100원씩 1년을 봉헌하면 아시아, 아프리카 3가족에게 한 달 식량을 제공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흙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00원으로 제 2의 창조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은 100원이면 오늘 죽을 수 밖에 없는 한 생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율법학자들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상기시키시고,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하는 질문에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는 그들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25-37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랑은 말로만,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나눔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해 왔습니다. 나눔을 위해 굳이 큰 돈과 큰 마음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100원짜리 동전 한 닢을 매일 봉헌하는 작은 정성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에게는 비록 작은 것 일지라도 ‘하루 밥 한술, 100원 사랑 실천’은 북한에 굶주리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생명을 나누는 것이요, 하느님 창조사업에 협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지금 바로 시작합시다.

서울대교구 김유신(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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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되기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내가 누구와 ‘이웃’인가는 나의 구체적인 행동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길가에 버려집니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사제는 그를 보고도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루카 10,31).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길 반대쪽으로” 가 버립니다(루카 10,32).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잡상스러운 사람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 불쌍한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 주고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줍니다(루카 10,34).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가버림으로써 그와 ‘이웃’이 되기를 포기했던 반면, 사마리아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랑과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론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보고 닮아야 할 하느님 삶의 방식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인간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의 가까이 다가오심은 육화의 신비를 통해 그 절정에 도달했고, 하느님과 인간은 특별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교회의 성사들을 통해서 온갖 악습과 죄에 떨어져 길가에 힘겹게 쓰러져 있는 우리들을 돌보아 주시고 치유하시고 책임지고 계십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이런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고민에 빠져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이고, 가장 중요한 사안은 무엇이며 결단을 내려야 할 가장 적절한 시간은 언제인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왕은 홀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은수자에게 찾아가 의견을 듣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은수자는 자신을 찾아온 왕을 본 척도 하지 않고 하던 일만 계속하였습니다. 왕은 그가 일을 빨리 마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일을 거들었습니다. 숲 속에서 부상자 한 명이 비틀거리며 나왔습니다. 왕은 그를 돌보아 주었고 다음날 그 부상자가 자신의 정적임을 알게 되자 화해하였습니다. 수도자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라는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그 순간에 내 앞에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은 일을 하라고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의 말씀이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신명 30,11).

성루대교구 김영국 요셉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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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복음을 속담으로 대신한다면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더 낫다"는 표현이 그중 어울릴 것 같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은 그 첫 대목만 듣고서도 끝까지 환히 내용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리코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재산은 모두 빼앗기고 초주검이 돼 버려졌습니다. 이때 마침 사제와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더구나 성전에서 봉사까지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 상황을 피해 지나가 버리지요. 뒤를 이어 지나던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자와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불쌍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를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자,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돼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물론 사마리아인이지요. 당연한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사제나 레위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여기며 자신들을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민족들과 혼인해 아브라함의 순수 혈통을 오염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일신 야훼 신앙을 훼손하고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르는 사마리아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로 단정 지으며 멸시하고 살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뽑혔다고 자부했던 사제나 레위인들이 아니라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인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지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친 그들의 행위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마리아인처럼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고 사제와 레위인들의 이기심을 비난하지만 정작 실생활은 사제나 레위인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처럼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많은 분들이 소년소녀 가장을 돕고 싶어 하고, 홀몸노인을 돕는다든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빠듯하고 바쁜 일상 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실행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요.
 
제가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빈첸시오 회원이나 사회복지회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돕기 단체들은 매달 회원들이 내는 수 천원, 수 만원을 모아서 어려운 이들을 직접 찾아가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할 수 없으면 이런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웃 사랑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은 배움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언어'에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말은 우리 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수단입니다.
 
두 사람이 싸움을 하게 됐습니다. 얼마나 크게 싸웠던지 둘 다 전치 5주의 상처를 입고 자리에 눕게 됐습니다. 깨지고 터졌는가 하면 심한 피멍이 들어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됐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흉했던 상처는 원상 복구가 돼 아물고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싸우면서 주고받았던 거친 말들은 하나도 잊혀 지지 않고 그대로 다 기억됐습니다. 잊혀지기는커녕 독기어린 말들은 안에서 응어리가 돼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심으로 자라나게 됐지요.
 
그렇습니다. 터지고 부러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때 주고받은 말을 통한 상처는 복수심으로 자라 평생을 가기도 합니다.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비난의 말입니다. 말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한 순간에 일으켜 세우기도 하지만 한 순간에 쓰러뜨려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이웃 사랑 실천에 있어서 핵심 중 하나가 언어 사용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밤길에 무엇이 제일 무서우냐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또 같은 사람들에게 밤길에 무엇이 제일 반갑냐고 물으면 똑같이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강도를 맞은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도 사람이요 제일 고마운 것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과의 따뜻한 관계는 예수님 가르침대로 서로를 도우며 살 때 가능해집니다. 격려하는 말, 칭찬하는 말, 또 희망을 주는 말들이 이웃 사랑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가슴에 담고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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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서이야기

제1독서 신명기 30,10-14는 모압 지방에서 모세가 행한 설교의 한 단락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후 시나이 산에서 체류한 후 광야생활을 거쳐 요르단강 동편 모압지역에 도달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친 내용이 신명기에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토라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과 심판을 받는다고 하면서 이 가르침은 결코 지키기 어려운 법이 아니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지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2독서 골로사이서 1,15-20은 그리스도 찬가로서 '모상가(模相歌)'라고 불립니다. 골로사이서 필자는 예수께서 이룩하신 속량, 곧 죄의 용서를 언급하면서 그 당시 전례에서 읊어지던 찬가인 모상가를 인용합니다.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만물을 화해시키고 평화롭게 하는 분으로 노래합니다. 이 모상가는 우주창조와 우주구원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루가 10,25-37은 사랑의 이중계명(25-28절)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29-37절)로 짜여 있습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자 예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스스로 의로운 체하려고 예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를 들어 참다운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봉변을 당해 반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관과 제관 보조원인 레위 사람은 그를 보고도 피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과 사이가 나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는 측은히 여겨 극진히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예화를 마치신 후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물은 율사에게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를 만난 사람의 성분과 신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신분이 복음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유다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사이가 나쁜 점으로 미루어 이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가히 파격적이라 하겠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일에 신분 성분 따지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신속하게 도와 주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는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대가도 바라지 말고 무조건 도와주라는 교훈이 들어있다 하겠습니다. 저 율사처럼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따지지 말고 먼저 내가 남의 이웃이 되어 줄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무엇인지, 어느 본당에 출석하는지, 잘 사는지 못 사는지 따지지 말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신속하게 도와주는 사람이 오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교회는 저 율사처럼 인식의 차원보다는 사마리아인처럼 실천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신앙인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주보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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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복음은 서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누구나 길 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믿습니다. 게다가 ‘초주검이 된 사람’을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는 사제나 레위인 같은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심성이 그처럼 모질거나 악하지는 않다고 믿고 싶어하며, 설령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말 못할 딱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어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강도도 있고, 사제와 레위인도 있으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있으며, 그리고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에 대해 비난하고, 감동하며, 불쌍히 여깁니다. 적어도 한 개인으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개인들’ 사이의 사건에서 ‘사회’ 혹은 ‘세계’의 범위로 확장하여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어떤 사회나 집단에 태어나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고, 그 사회는 개인으로서 나의 의식과 행동을 형성하는 데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회칙 「사회적 관심」과 「백주년」을 통해서 ‘사회의 주체성’과 ‘사회의 소외’란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비록 인간과 동일한 성격은 아니지만, 한 사회 역시 그 자체로 마치 생명을 갖고 있는 유기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기회만 되면 ‘세계화’, ‘지구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강도와 같은, 레위인과 사제와 같은,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죽어가는 사회 혹은 집단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빈민촌(비위생적인 거주지역)에는 전 세계 인구의 40%가 밀집해 살고 있습니다. ‘이 빈민촌은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우리의 이웃 사회가 아닐까?’ 그렇다면 ‘레위인과 사제의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이 빈민촌을 외면하면서 자기들만의 풍요와 품위를 향유하기 위해 반대쪽 길을 가는 이른바 선진 사회는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빈민촌의 상처를 싸맨 다음 자기의 노새와 돈 써가면서 돌보아주는 착한 사마리아의 사회는 없을까?’ 하는 물음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장 큰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가르치시면서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하십니다. 우리에게 삶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남(다른 사회)을 죽이지 말며, 혼자(우리 사회만) 살려 하지 말며,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이웃(다른 사회)을 돌보는 것, 그것이 삶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처에서 ‘주님’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탐욕을 자유로, 무자비한 침탈을 경쟁으로 교묘하게 포장한 이른바 ‘신자유주의의’의 ‘일류선진국’이란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속한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면, 그 안의 개인이 건강한 선택을 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초주검이 된 이웃(사회)을 일부러 외면할 수도, 아예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모든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위해 선의의 뜻을 가진 이들과 연대할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호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 박동호 신부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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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친절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치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강도 만난 이를 치료한 것으로도 충분할 법한데,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 두 데나리온을 들여 돌보아주고, 그 이후도 책임지겠다고 약속합니다. 생전 모르는 이에게 그는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베풀어줍니다. 적당히 친절해도 내가 이용당하기 쉽습니다. 지나치게 친절하면 바보 취급 당하기 일쑤입니다. 마음속으로 ‘딱 이만큼만이야’ 하고 제한적으로만 마음을 여는 것이 피차 서로 편안한 것인데, 그는 지나치게 친절합니다.

이 비유는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해야 얻겠느냐는 어떤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굶주린 누군가가, 목마른 누군가가, 나그네인 누군가가, 헐벗은 누군가가, 병든 누군가가, 감옥에 갇힌 누군가가, 곧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친절하십시오. 넘치도록 베푸십시오. 사마리아 사람이 만난 그 사람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께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 남상근 신부
  | 07.10
448 40.4%
[서울]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있는 사랑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사랑의 길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누가 저의이웃입니까?” 하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착한사마리아인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그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세 사람 중, 바쁘다는 핑계로 강도를 만난 사람을 지나친 사제나 레위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에 해당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이 오늘 이야기의 압권입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2.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혼혈로 대부분 아시리아 식민지 사람들이었는데, 사마리아 함락 뒤 바빌론으로 유배 간 유다인 대신 사마리아로 끌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은 인정했지만 예언자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신전까지 지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인들의 눈에 그들은 배교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의 본보기로 택하신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인데,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나 이방인에게 한결같이 너그러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진정성입니다.

3.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살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진실하고 실천적인 사랑이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받는데 결정적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사랑의 길에 있어서 누가 저의 이웃이냐고 묻는 율법 학자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은 거짓 복음이며, 강도를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참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적사랑 실천에 있어서 중요한 관점은 자기중심적 사랑이냐, 타인 지향의 사랑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관점으로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자기중심적 관점입니까? 아니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타인 지향의 관점입니까? 또한 우리 시대에 강도를 만난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 주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 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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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기 위해서

1.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도록 맞고 쓰러진 그 사람의 착한 이웃은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길에 쓰러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같이 아파하는 그 심정과 그 눈길을 가진 그 사람은 바로 자비로우신 하느님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이신 아드님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나 많이 비참하게 살고 죽어갑니까! 그러나 인간은 비참하지도 고독하지도 않습니다. 그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을 자처하시면서 인간을 한 사람 한 사람 찾고 계시니까요.

2. 그냥 지나쳐가는 나

그냥 지나쳐가는 그 사제와 레위인들은 바로 저와 같은 사람입니다. 자기 일에만 사로잡힌 냉혈 인간입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서 죽어가는데 못 본 척하면서 피해 갑니다. 남의 얘기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모두 바쁩니다. 다들 노예나 종처럼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겨우 먹고 살아가지요. 그래서 자기 자신마저도 잊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내가 그렇게 쓰러져 있을 때 저는 많은 사람 가운데 있으면서도 무관심 속에서 외면당하고 철저하게 고독 속에서 죽어가고 말 것입니다.

3. 오늘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늘 그와 같이 강도를 만나서 흠씬 두들겨 맞고 길에 쓰러져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대답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을 박물관에 가두어놓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인 우리가 복음을 질식시키는 것이지요. 제가 어릴 적에는 시골 고향을 떠나서 도시 변두리로 모여든 노동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판자촌도 생겼지만, 그때 생긴 가난한 신도시는 이제는 가난하다고만 말할 수 없게 변했습니다. 오늘 가난한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가난한 젊은이들은 희망을 간직하고 같이 온 고향 친구들을 돌볼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상황이 많이 변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희망을 찾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느새 외국인이 없으면 한국 사회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 외국인들은 불법체류자가 되어서 우리 사회에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살아갑니다. 노인들에 대한 대책이 없는 사회에서 이제는 오래 살라고 하는 말도 어떤 때는 저주로 들리는 시대가 됐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을 앓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늘었습니다. 당사자들의 고통도 크고, 그로 말미암은 사회적 범죄는 다른 사람들을 너무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상생이 아니라 함께 죽어가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불어 인간답게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분명해진 시대입니다. 참으로 복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새로운 형태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복음은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가 이 일을 게을리하다가 근대 공업화 사회에서 대중을 잃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항상 새롭게 나타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가 모조품들만 갖다 놓고 전시하는 박물관처럼 되면 죽어 버리고 맙니다.

4.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은 교회 안팎에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세상에는 그 사마리아인과 같은 착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천주교회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곧잘 자비를 베풀고 사람을 살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자비로운 하느님처럼 움직이게 하십니다. 오늘 이 복음은 저에게 채찍질하지만,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교우들과 시민들을 볼 줄 알게 하는 기쁨도 저에게 안겨 줍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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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장 큰 계명 :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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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 온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도 사랑하고 자기 자신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율법의 정신입니다. 율법은 이 사랑에 봉사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율법에 대해 단지 아는 데 있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바로 그 ‘이웃’이 누구인가 질문합니다. 사랑의 의무 대상과 그 한계를 확인하고 싶었는가 봅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이웃은, 동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방인들(레위 19,34 참조)에게 국한되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모르는 동포들까지도 이웃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 반대파들도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율법에 대한 이해 정도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정신만이 합당하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과 아주 사이가 나빴습니다. 함께 뭘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증오는 증오를 낳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은 초주검으로 누워있는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감정은 감정으로만 머물지 않고, 구호 행동을 취합니다. 그리고는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후속 치유조치까지 부탁합니다. 당시 두 데나리온은 일용직 근무자의 이틀 치 수당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물론 많은 돈은 아닙니다. 영웅적 행동은 아니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한 조치는 정성껏 취한 것입니다.

이야기 끝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이웃인지를 물은 율법 교사에게 오히려 “누가 …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하고 되물으십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은 바로 누구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국적, 종교, 정당 등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이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한 그곳에, 바로 거기에 이웃 사랑을 실천에 옮기라는 부르심이 있다고 하십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사랑이 필요한 곳을 교회의 가르침과 자기 마음의 눈으로 살펴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리스도적 연민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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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일 알렉산델 신부 | 2019년 7월 14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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