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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2,131
작성일 | 07.01.26
언젠가 다급하게 병자성사를 청하는 상기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하여 들려왔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 듯 싶어 병자성사 가방을 들고 다급하게 병원으로 움직였다. 병원에 도착하니 한 할머니가 산소 호흡기를 차고 조용히 누워계셨고 그 옆엔 가족들이 그분의 임종을 준비하는 듯한 모습으로 있었다. 왠지 다급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얼른 영대를 착용하고 병자성사를 드렸다. 그 후 전화를 준 아드님으로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종종 의식이 깨어 있을 때 신부님을 모셔와서 병자성사를 꼭 받게 해달라는 말씀을 유언처럼 누누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나마 의식은 없으셨지만 숨을 쉬시며 살아계셨던 할머니가 병자성사를 드린지 몇 분도 채 안되어서 숨을 거두신 것이다. 순간 ‘기다리셨구나!’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지났다.   의식이 없으시고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애타게 기다렸던 하느님의 은총의 따스함을 병자성사를 통해서 느끼셨던 것이다.

그 할머니와의 짧은 만남과 이별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그 할머니는 의식도 없고, 볼 수도 없었으며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었을 텐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느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삶의 마지막을 놓으실 수 있었을까? 아마도 필자가 생각하기엔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또 다른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더라도, 신앙으로 형성된 영적인 눈으로 그 모든 것을 기다렸고 보았으며 바라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사실 본다고 하지만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하지만 사실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라는 것을 일상의 생활에서 종종 생각해 본다. 어쩌면 ‘본다’하지만 올바로 보는 것이 아닐 수 있고 ‘안다’ 하지만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를 통해 알게되는 ‘봄’, ‘느낌’, 그래서 얻어지는 ‘앎’은 분명 그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또한 대부분 주관적인 사고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대를 받지 못하신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미 ‘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안다’고 하는 예수님은 과거 고향에서 생활했던 평범한 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그동안의 기적에 대한 소문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고향에서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육체의 눈에 보여진 것과 경험된 것만을 전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과 사람과 사건의 내면의 감춰진 또 다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형성된 주관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예수님께 감춰진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전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얼마나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을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정말로 사랑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영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영적인 것은 우리의 인간의 모든 감각의 한계, 지식의 한계를 떠나 볼 수 있는 영역이다. 어렵다고 여겨지는 것이지만 전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통해서 내가 만나는 예수님과 이웃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 유승학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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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인의 복음 선포"

오늘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께서 하신 첫 연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포하신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루카 4,23).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는 이런 반응은 그들이 주님에게 원하는 바가 다름 아닌 기적과 같은 표징이라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차별화된 무엇인가를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내면에는 자신만을 우선시하는 마음, 더 나아가 자신만을 위해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편협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구미에 당기는 바람들을 들어줄 수 있다면 믿어 보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나타나엘이 처음 주님에 관한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과도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사람들의 이런 부정적 반응은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께서 하신 첫 복음 선포 연설이 실패한 듯이 보이게 합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나, 이방인이었던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 관한 주님 말씀은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을 극에 달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나서 주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주님의 공생활 시작과 같은 첫 데뷔 연설이 실패하고 만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더욱이 주님은 왜 이런 방법으로 첫 데뷔 연설을 시작하셨는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바를 주님께서 반드시 만족시켜주고 채워주셔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주님을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잘못된 바람과 기대는 자신의 생각 속에 주님을 설정하고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하게 합니다. 자신 감성에 맞는 하느님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유혹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실패를 무릅쓰고 복음 선포자가 진정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다고 봅니다. 복음 선포자는 사람들의 무조건적 기대와 필요에 따라 주님을 끼워 맞추는 유혹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독한 유혹은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내면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방해물입니다. 외적 성공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복음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7.19).
 
우리는 스스로 반드시 무엇인가 이뤄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집착 때문에 두려워하고 떨곤 합니다. 잘해야 한다는 욕망이 실패하는 것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들려주신 저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마음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입니다. 복음 선포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 체험을 통해 주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듯,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립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때의 것들을 그만둡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은 결코 실패한 복음 선포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신앙 성숙을 위해 실패한 듯이 비춰질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외적으로 무엇을 이루거나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주님 자유와 사랑에 함께 동참하기를 더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 홍승모 신부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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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도소에 교화를 담당하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많은 죄수들을 선교하는 데 일생을 비치셨죠. 그런데 이 신부님은 죄수들을 매일 찾아가면서도 매일 처음 본 사람처럼 반갑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고, 늘 그 사람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죄수 중 한 명이 물었습니다.

“아니 맨 날 얼굴 보면서 왜 인사는 또 하고, 또 하는 거요? 짜증나게....”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어제 내가 본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고, 오늘 본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오늘의 당신입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당신이 반가워서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바라보는 신부님이기에 매순간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거든요. 그래서 당시의 부정적이라고 지칭되었던 사람들인 병자, 세리, 창녀 들을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전혀 없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과 직접 대화하셨고, 그들의 손을 직접 잡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이러한 모습을 따르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소외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그보다는 나와 상관있는 사람,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베푸는 마치 2,000년 전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폐쇄적인 모습이 가득한 곳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자신들과 똑같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예수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모습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고 복음서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직접 사람들 한가운데로 오셨지만,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그 가운데에 도저히 있을 수가 없으셨던 것이지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는 복음말씀. 이 말씀이 지금 우리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즉, 주님께서 계실 자리를 우리가 없앰으로써 주님을 쫓아내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땅에는 아직도 소외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 우리 본당 공동체 안에서도 얼마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들을 위한 조그마한 관심, 작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몰아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쫓아내면 정말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으로 떠나십니다.

주님께서 한가운데를 걸어 나가시는 그런 곳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이 시대에 소외받는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기도하면서 오늘도 힘차게 생활합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전합시다.

▶ 조명연 신부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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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내기 농부는 그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아직 입학도 하지 않은 아들 하나를 둔 젊은 가장이 도시의 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처음부터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두 해 지난 후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게 되었다. 사실 그 일은 젊었을 때부터 그가 꿈꿔왔던 일이다.

지난 한 두해 동안 동네 사람들을 잘 사귄 덕에 이모저모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농사에 대한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도 들었다. 그런데 그에게 커다란 고민거리이자 어려움이 생겼다. 그것은 그가 농약과 비료를 쓰는 기존의 농사법을 버리고 유기농을 하고 싶었던데 있었다. 그런 그의 시도를 알아챘는지 자고나면 마당 한 귀퉁이에 때로는 농약이, 때로는 화학비료가 놓여 있고, 점심때쯤이면 그것을 놓은 분이 찾아와서 이때는 바로 이것을 써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분들의 말을 거절하자니 그 마을에서 발붙이고 살기는 힘들 것 같고, 또 자신의 신념을 접고 관계농법대로 농사를 짓기는 죽기보다 싫고.
그때부터 그는 동네 사람들의 갖은 일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논과 밭을 가는 일, 모내기, 벼 베기와 그 밖의 많은 일들을 자신의 일처럼 하였다. 언제나 맨 마지막에 자신의 논에 모를 내고 벼를 베었다.

그러는 사이 유기농에 대한 이러저러한 말들도 차츰 줄었고 자신도 농사에 대한 경험이 점차 쌓이게 되었다. 또 그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유기농에 대한 지식을 더 쌓고, 장을 담그고, 유기농법에 대한 경험을 교환하기 위하여 일본의 유기농 마을과의 교류에 일원으로 활동하던 무렵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겠다고 나선 것이다. 아마도 유기농법으로 지은 쌀이 몇 배 비싸게 팔리는 것을 본 까닭이리라. 몇 해가 지나자 그 마을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가을이면 버스를 세워놓고 메뚜기를 잡으러 오기도 할 정도가 되었다.

해피엔딩이다. 귀농을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게 되는 요인 중의 하나가 마을 사람들의 냉담한 태도이다. 더구나 유기농과 같은 시도는 오히려 마을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 까닭은 바로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야 하는 괴로움에 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을 모두 유기 농사를 하도록 했던 앞의 이야기는 정말 해피엔딩이기도 하며 그렇게 되기까지의 그 어려움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다른 고을에서 명성을 얻고 금의환향한 예수라는 인물을 앞에 두었던 마을 사람들은 뿌듯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선포한 복음은 지금의 삶의 모습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기적을 바랄뿐 그건 좀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 김승욱 베드로 신부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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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신앙은 자기를 비우는 과정

열왕기 하권에 나오는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습니다. 나아만을 자식처럼 아꼈던 아람 임금은 이스라엘에 병을 잘 고치는 예언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아만을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보냅니다.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를 찾아 그의 집 대문 앞까지 오게 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을 나아만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려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우선 높은 지위에 있는 자기를 맞아주지 않은 불손한 태도에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고, 당시 불치병인 나병을 겨우 목욕 몇 번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황당한 소리를 하니 자기 고향에는 더 좋은 강물이 있다며 그냥 돌아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이 말하였습니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자존심을 버리고 엘리사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습니다. 그러자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2열왕 5, 1-15)

나아만에게 지시한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일을 어렵게 하지 않으시는데 사람들이 자꾸 하느님을 꼬아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는 이들이 범하는 잘못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사랑하라’는 계명만 주셨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대학입시보다, 진급시험보다, 치열한 한국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보다 더 쉽습니다. 더 어려운 일도 착착해 내는 우리가 정작 예수님의 말씀은 크게 듣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하고 쉬운 숙제를 우리에게 주셔서 나아만처럼 착각하고 교만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자렛 사람들이 구세주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도 자신들의 편향된 생각과 가치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생각과 모습을 받아들일 때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기적과 권위 있는 말씀도 나자렛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마찬가지구요. 오히려 좀 더 안다는 사람들의 고집이 더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집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위와 권위가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히려 철부지들이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나 자신을 철저히 비우는 과정이고, 이상하고 어려워도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그분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영적 여정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최대의 적은 교만입니다. 마음을 열고, 내 생각과 가치관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의 자세로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구원이 바로 우리 옆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한산동 마르코 신부 : 2016년 1월 31일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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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생활 24년차, 올해도 어김없이 사제 연례 피정에 다녀왔다. 사제 생활의 경험이 많아지면 사람을 대하는 일에 낯가림 없이 수월해지리라 생각했지만, 삶은 늘 녹록지 않아서 힘든 하루하루를 만나곤 한다. 일에 지친다기보다는 사람에 지쳐 기진맥진할 때가 많다.

이번 피정에 임하면서 나는 내면의 성장을 위한 노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면의 성장을 나무에 견주어 보았다. 발견하게 되는 사실 한 가지는 우리는 처음에 모두 씨앗이었다는 것이다.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다. 씨앗에서 싹이 난다. 그런데 나무의 씨앗은 싹이 터서 겨우 며칠간 자랄 만큼의 양분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아무리 커다란 씨앗이라 해도 최대 몇 주만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싹이 계속해서 성장하려면 바깥의 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장하지 않으면 싹은 모두 죽는다. 성장 없이는 생명이 없고, 물 없이는 성장이 없는 것이다.

내면이 자라느라 우리는 목마름을 느낀다. 내 영혼을 자라게 하는 생명수는 무엇인가? 하느님을 아는 것이 곧 생명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싹이 자라는 동안 우리 안에서는 하느님을 향한 목마름이 자라고, 하느님을 향한 목마름은 만족을 모르는 갈망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 본다. 고집스러운 자기애와 자랑과 경험은 하느님을 향한 삶에서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예수님을 잘 안다는 착각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예수님의 힘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철저하게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갓난아기가 엄마를 찾듯 끊임없이 갈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거처했기 때문이다. 세상살이가 힘겨울 때마다. 사방이 절벽처럼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그런 시간들이 필요한데, 나는 이번 피정을 통해 힘을 얻었다.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고 한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으는 것이다. 그것은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퀘렌시아(Querencia)라고 한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퀘렌시아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삶은 자주 위협적이고 도전적이어서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난 상황들이 펼쳐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자 신만의 영역으로 물러나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갈 힘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신’(루카 4,30 참조) 예수님을 닮아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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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병훈 요셉 신부 : 2019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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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   [대구]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4] 2433
715   [서울] 참으로 부자 되는 길  [6] 2688
714   [수원] “불나방”  [4] 2625
713   [마산] 내 재산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2] 2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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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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