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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예수님은 약자로, 또 실패자로 죽어 가셨습니다.
조회수 | 2,156
작성일 | 07.01.26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서 몇 구절을 읽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서 행하신 은혜로운 일들을 요약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말씀들에 이어서 나오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탄복하였지만, 그들은 즉시 예수님의 출신에 대해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율사도 제관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은혜로운 일을 보았지만, 그것을 하느님과 연결하여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출신과 신분만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과 더불어 구약성서 열왕기에 나오는 고사(故事)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를 기근에서 구해준 이야기(1열왕 18,7-16)와, 엘리사 예언자가 시리아 사람 나만의 나병을 고쳐 준 이야기(2열왕 5,1-14)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이 예언자를 통하여 은혜로운 일을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에 사람들은 모두 분통을 터뜨리고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는 말로 오늘 복음은 끝났습니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분개한 것은 그가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예언서를 자유롭게 인용하고, 그들이 존경하는 엘리야와 엘리사 두 예언자를 거명하여 자기 자신과 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하고, 옛날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실천한 그 은혜로우심을 상기시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그런 예언자적 역할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분을 미워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분노에 괘념치 않고 당신의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고을의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고을은 산 위에 있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무대는 나자렛이고 그 고을은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에 있습니다. 지리적 실제 여건을 무시하면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죽을 위험에 처한 무대를 산 위로 잡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의 골고타 산 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언자적 말씀과 행위를 처음부터 거부하였고, 그들의 분노와 증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가셨으며, 그 길은 결국 예루살렘 밖 골고타 산 위의 십자가에서 끝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소외되고 차별 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알리는 데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잘 지키면 상주고, 못 지키면 벌을 주는, 의로운 분이라고만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어온 하느님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교가 믿어온 하느님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버리고, 힘의 논리를 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면서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을 터인데”(마르 15,3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힘을 한 번 발휘해보라는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의지하여 살아 온 힘의 논리입니다. 하느님은 강한 자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온 인류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약자로, 또 실패자로 죽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발췌하여 나열하신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는 모두 약자이며 실패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약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죽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약자들과 함께 계신다고 믿으셨고, 하느님이 그들에게 하실 일, 곧 불쌍히 여기고 살리는 일을 실천하다가 강자인 유대교 기득권자들의 손에 잡혀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약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을 부르는 일뿐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하느님은 과연 약자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강자와 함께 계시지 않고 약자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느님은 힘으로, 이기고 빼앗고 사로잡고 억압하는 강자 안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가난하고, 사로잡히고, 억압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살리는 일을 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같은 실천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그분의 도움으로 강한 자가 되어 남을 억압하며 잘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강하고 부요하고 화려한 것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찾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외면하면서, 더 부요하게, 더 강하게, 더 화려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마르 8,33 참조)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약자의 길입니다. 사랑은 강자로 군림하지 않고 약자가 되어 은혜로운 일을 행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2독서로 들은 고린토서는 사랑은 너그럽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시는 하느님,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혜택 받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작은 노력으로 큰 결실 얻기를 좋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유산으로 받아서 실천하는 자녀로 살겠다는 약속이 담긴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신앙인은 세례에서 이 세상의 허례허식을 모두 끊어버리고, 사랑하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생명을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 으뜸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우리의 사랑 안에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으뜸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비롯한 여러 어른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자랍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 주변의 약하고 실패한 이웃들을 사랑하여 그들이 살고 자라게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숨 쉬시게 하는 일입니다.

▶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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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과 증오가 공존하는 거울

우리는 지난주일(연중 제3주일)의 복음을 묵상하면서 본격적인 연중주일의 시작이 연중 제3주일부터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실은 연중 제3주일에 봉독되는 복음들(가해: 마태 4,12-23/ 나해: 마르 1,14-20/ 다해: 루가 1,1-4; 4,14-21)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었다. 공관복음에 속하는 이 복음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보도하고 있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으로 말미암아 그의 공적 활동이 강제적으로 종료되자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에서 개시(開始)한 예수님의 공생활을 보도하고 있으며, 루가는 예수께서 자라나신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회당에서 행하신 설교를 복음의 서문과 함께 보도하였다. 아울러 루가는 ’지금 그리고 여기’ 라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과 공간개념을 도입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시점을 초시공화(超時空化)함으로써 서술적인 시공(時空)에 매어두지 않았음을 보았다.

오늘 연중 제4주일의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설교의 후반부를 들려준다. 후반부는 예수님의 설교(전반부)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을 시사하고 있다. 복음의 서두는 편의상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는 지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반복하였다. 이 반복은 이사야의 예언말씀이 예수에게 있어서 그만큼 중요함을 의미한다. 예수의 시대로부터 약 5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하여 선포된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58,6-7; 61,2)는 예언의 말씀이 이제 예수를 통하여 예수께서 계신 바로 ’이 시간과 이 장소’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언 속의 ’나’를 자신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이 성취는 과거의 실현(實現)이며 미래의 선취(先取)를 의미한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가 이 복음을 선포한다면, 이 또한 2,000년 전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성취된 것을 말하며,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성취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즉각적인 반응은 예수와 예수의 말씀에 대한 칭찬과 탄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반응은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반감(反感)으로 돌변한다. 예수께서 이사야의 예언 속의 주인공인 ’나’를 당신으로 자처하셨기에 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탄복했으나 곧 그들의 눈에 예수는 한낱 목수 요셉의 아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반감에 예수께서 선수(先手)를 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운명이 구약의 엘리야(1열왕 17,7-16)와 엘리사(2열왕 5,1-14)의 처지와 비슷함을 시시하신다.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어 생활고에 허덕이던 많은 과부들을 제쳐두고 시돈 지방의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돌보았고,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환자를 제쳐두고 이스라엘을 찾아온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고쳐주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람’인 예언자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나자렛 사람들도 이와 똑같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끝나자 사람들의 반감은 화를 동반한 행동으로 전환된다. 사람들은 예수를 동네 밖 산 벼랑으로 끌고 가서 밀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서 스스로 그들을 피해 자신의 길을 가셨다. 메시아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수께 대한 고향 사람들의 푸대접은 루가복음에서보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에서 더 큰 호소력을 보인다. 루가복음이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시점에서 이 대목을 다루고 있는 점에 비해, 마르코와 마태오는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에서 개시한 공생활이 어느 정도 경과한 후에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여 푸대접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마르 6,1-6; 마태 13,53-58) 뿐만 아니라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아직 다른 곳에서 활동하신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23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 서술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복음의 서술이 모순적일수록 저자의 의도를 읽어야 함을 숙제로 생각해야 한다. 루가가 원전(原典)의 순서를 바꾸어 ’나자렛 설교’를 공생활 개시로 선택한 이유를 말이다. 하마터면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갈 뻔했던 나자렛 설교는 루가복음공동체의 초기 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유다인들을 겨냥한 루가의 복음선교가 처음부터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 결과 이방인선교를 염두에 두고 복음을 저술해야 했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나자렛 설교’의 전반부에서 루가 고유의 ’시공개념’을 얻었다. 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예언자적 운명을 예감하면서 하느님나라의 복음에 대한 청자(聽者)의 호응과 반감, 열광과 증오가 공존함을 보았다. 오늘은 이 공존의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겠다.

▶ 박상대 신부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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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뜻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랜만에 나자렛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과 고향 사람들은 날카로운 대립의 각을 세우게 됩니다. 기적 때문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주변 지방을 열광하게 만든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기적의 신기한 현상을 보고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기적을 베푸신 뜻을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온갖 고통과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죄와 죽음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신기한 현상에 더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과연 소문대로 놀라운 일을 펼쳐 보일 재주가 있을까? 그렇다면 그 능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어서 빨리 놀라운 기적을 보이라고 재촉하면서…

기적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종종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기적의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와 죽음의 올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의 현상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메시지를 잘 받아들여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해방의 기쁨을 맛보고,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고귀한 가치를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기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놀랍고 신기한 현상에만 눈길을 빼앗겨버리고 말지는 않는지요? 메시지보다는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또 다른, 뭔가 새롭고 독특한 현상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조차 기적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유약한 인간의 눈과 귀를 현혹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결국은 자기 세력을 넓히기 위한 얄팍한 술수임이 드러나곤 합니다만, 이들의 불순한 행위가 싹을 틔우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신기한 현상에 매우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배척하신 신기한 현상에의 호기심, 우리도 단호하게 뿌리치면서 오직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바르게 지켜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 김승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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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아갑시다

본당 신부로서 신자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문득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 하느님 집, 그러니까 성당에서는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말하면 ‘눈빛 흐린 성직자가 하는 식상한 강론’에서나 듣게 되는 그저 그런 이야기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 어디에도 의지할 때가 없는 사람들이 성당을 찾아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하느님을 붙잡고 하루하루 안간힘을 쓰면서 사시는 모습을 볼 때나, 희망 없는 눈빛으로 성당을 찾은 신자 분들이 점점 밝아지는 모습을 보일 때, 아이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화목해지는 가족들을 보게 되면, 흔히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기적 같은 것은 없어도, 성당에서는 좋은 일이 참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아서 하느님께 그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느님을 바라보고 섬기기만 하면 그게 무엇이 될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신다는 것, 그리고 성당에 다니다 보면,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그런 좋은 일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은 사제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사소하면서도 큰 보람이기도 하고 성당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됩니다. “하느님 열심히 한번 섬기면서 살아보소,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생기는 좋은 일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일어나는데, 정작 하느님의 은총을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제가 앞서‘눈빛 흐린 성직자가 하는 식상한 강론’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눈빛 흐린 신자들이 하는 식상한 삶’이라는 말도 성립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들 각자에게 맞는 좋은 일들을 만들기 위해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 곁에 있는데, 정작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눈빛이 흐려져서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그런 식상한 것으로만 치부한다면, 하느님 은총을 입에는 달고 지내지만, 정작 그 은총이 주는 좋은 일은 결코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일어나더라도 못 느끼고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늘 눈을 크게 뜨고 늘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직접 몸으로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오종섭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 2016년 1월 31일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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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나의 예언적 사명은

예레미야는 기원전 7세기 말 바빌론 제국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던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암흑기와 같은 어려운 시기에 예언을 한다는 것은 큰 위험이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듣기 싫어하는 내용을 담은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할 때는 자기 민족에게 외면당하는 결과까지 참아야 했습니다. 이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삶에서 충분히 확인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가 이방인들에게는 조롱을, 동족에게는 박해를 받습니다. 임금으로부터는 죽음에 대한 위협을 받고, 체포되어 동굴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가족들에게마저 외면당해서 외톨이가 되어 친지들의 혼인 잔치에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에는 이집트로 도망치던 동료들에 의해 이집트에 끌려가던 길에 살해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예레미야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너무나도 비참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예언자였습니다.

오늘 1독서는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소명을 맡기는 장면입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예언자의 삶이 어떠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이런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은 당신이 함께 있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와 같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복음서의 예수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펼쳐 읽으시는데, 오늘 복음 환호송에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는 이 성경 말씀이 바로 당신으로 인해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인간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예수가 하느님에게서 온 메시아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의 가르침 자체가 자신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의 완고한 마음을 힐책하는 예수를 끌고 고을 밖으로 가서 벼랑 끝에 가 그를 떨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 한 가지를 떠올려 줍니다.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죽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그의 목숨을 빼앗지만, 하느님은 그를 다시 살려 주십니다. 사람들은 결코 그분을 영원한 죽음에 빠트리지 못할 것이고, 그분의 입을 막지 못할 것이며,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학자들은 나자렛에서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루카 4,21-30을 두고 루카 복음서 전체의 결론을 미리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고,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을 수도 있고, 외로운 삶, 고난의 삶, 손해 보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가 억울하게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레미야 예언자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적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참된 예언자의 입을 막을 수 없고, 그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획을 망가트릴 수 없을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1월 31일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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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7   [마산] 인생의 그물질, 깊은 데는 어디인가?  [6] 2011
656   [군종] 예수님과 만나고 싶다면  [3] 1919
655   [인천] 돈을 낚기보다 사람을 낚아보자!  [5] 1896
654   [청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1] 117
653   [대전] 밑바닥 체험  [1] 1534
652   [춘천] ‘주님 일꾼’ 될 준비 됐나요?  [2] 98
651   [원주] 사람 낚는 어부  [3] 1918
650   [전주] 부르심과 수동(受動)의 영성  [2] 1673
649   [광주] 죄인과 소명  101
648   (녹) 연중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5] 2056
647   [수도회] 피조물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 찾기  [1] 1556
  [부산] 예수님은 약자로, 또 실패자로 죽어 가셨습니다.  [4] 2156
645   [서울] 마땅히 지켜야할 변치않는 권위  [6] 1923
644   [안동] 용기를 내어라  [2] 1694
643   [마산] 태양은 어느 집 앞마당만 비추지 않는다.  [3] 1939
642   [청주] 하느님의 힘이 함께  75
641   [인천] 보는 방법  [5] 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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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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