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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 낚는 그물과 황금돼지
조회수 | 2,140
작성일 | 07.01.31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에 마음이 머무는 것은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결코 사람만큼 귀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고 흥얼거리는 것도 제아무리 귀하고 대단한 것이 돈이고 출세라 하더라도 사람이 그까짓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낙오자의 한심한 자기 위안라고 비웃겠지만 존엄한 인간의 노동은 절대로 탐욕스러운 자본의 도구로 전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황금돼지가 마구 돌아다니는 것은 재물의 축적에 대한 갈망과 경제적 쪼들림의 안타까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수십만의 대학입학 수험생과 그 가족들이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출세에 대한 욕망과 사회적 불평등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혼 남녀가 바라는 배우자의 조건에서 재물소유 정도와 직업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이 시대의 씁쓸한 단면입니다. 만일 이 모습이 일시적인 거품이 아니라 실체이며 본질이라면 우리는 ‘황금만능주의’·‘배금주의’·‘물질주의’의 바다에 빠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생명과 생활도, 인생관과 세계관도, 인간관계와 사회도 모두 ‘자본’·‘돈’·‘경제’라는 그물망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옥죄는 그물망을 걷어내고 사람을 구하는 하느님의 그물을 던지는 일은 하느님 은총과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을 꽃보다 돈보다 출세보다 귀한 존재로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그물을 던질 것인지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오늘도 묻습니다. 누가 나설 것인지 서로를 곁눈질하는 세상에서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우리 교회와 신앙인을 재촉합니다. 만일 아직도 하느님께서 누구를 보낼까 망설이고 계시다면 교회는 겉보기만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망설임에 섭섭함을 갖는다면 교회는 참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그 일을 하신 예수님을 오늘의 눈으로 보면 참 초라한 분이셨습니다. 누추한 달동네에서 힘없는 부모를 두고 가난하게 사시다가 맥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자조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의 시몬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람 낚을 그물을 던지는 일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는 것은 차라리 무모함이며, 그 무모함 때문에 두려웠을 것입니다(루카 5,8-1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칠삭둥이 같은… 가장 보잘것없는” “지금의 나”(1코린 15,8-10)와 함께 세상에 구원의 그물을 던지자고 초대하십니다. 하느님 은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인지 참된 것인지 가늠하는 순간입니다. 두렵지만 황금돼지를 놓고 하느님의 그물을 손에 쥡시다.

▶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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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말마디를 수없이 들어왔고 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만일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면 망설여지게 되기도 합니다. 또는 “아, 그거야, 하느님을 믿는 것이지 뭐!”하고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올바른 대답입니다. 이 결론적 대답을 위해서 우리는 전제되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인간이 대답,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루가 5,1-11)은 신앙의 과정을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며,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탄생하면서부터 생존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갑니다. 안간힘을 다하면서 ‘무엇’을 얻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 ‘무엇’은 흔히 하느님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인 베드로도 이 ‘무엇’ 때문에 노력하는 하나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헛수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고는 가르치셨고 일러 주셨고 똑같은 반복을 명하셨습니다. 밤새껏 지칠대로 지친 베드로, 그리고 이미 그물을 다 씼은 후였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청에 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개입, 베드로의 용기 그리고 실천,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기적의 결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기적의 결실 앞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한계점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초월한 제3자의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헛수고의 자신과 기적적 결실의 자신 사이에 있는 차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놀랐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였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인간이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솔직한 기도! 죄인이기에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그 예수님은 더욱 가까이 오시며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끄시고 일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혼연히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험의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신앙인 베드로가 걸어간 길, 그것은 정녕 내 신앙의 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지칠대로 지친 기진맥진한 처지입니다. 더 노력하기도 싫습니다. 흥미도 없습니다. 희망의 등대는 너무나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지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그 예수님은 실의에 찬 내 마음에 자리잡고 계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나의 노력에 나의 생활에 나의 작업에 개입하시고 속삭이십니다. “이봐, 한번만 더 용기를!”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하느님의 이 속삭임,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용기 자체이며,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 대답할 용기를 찾은 인간, 부르심에 응하는 인간,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하느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겸손한, 가식 없는 솔직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하고, 이러한 고백은 새로 탄생된 나를 예수님께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모두 미사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반성합니다. 그리고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기계적 고백이나 앵무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아니라면 정녕 우리는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기도 Kyrie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바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잘못한 아담과 에와에게 구세주를 약속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신 그 하느님은 결국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셨고, 베드로를 부르신 그 예수님은 또한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이 부르심에 응할 수도 있고 불응할 수도 있습니다. 택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헛수고만을 하던 내가 ‘예수의 길’을 따라 나섰다가는 또다시 허탕을 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응하고, 택하고, 그 길로 나서는 용기,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은 선택이며 결정이고 대답이며 실천, 삶 자체입니다. 그래서 순간만이라도 모든 것을 제쳐놓고 ‘신앙의 나’가 되어 베드로의 고백이 아닌 나의 고백을 읊조리는 것입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 함세웅 신부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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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을 죽일 때 보이는 주님

평일미사는 물론이고 매일 성체조배를 열심히 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집안에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자매 얼굴은 늘 밝고 눈빛도 맑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참 동안 보이지 않더니 어느 날 나타났는데 그전의 맑고 깨끗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은 피곤에 지쳐 있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고 성당을 찾았지만 하느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서 하느님을 멀리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토록 열심히 성당을 찾은 그 자매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외면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지요! 하느님께서는 그 시련 속에서도 그 자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마음의 평화까지 주셨습니다.

쉬는신자로 있었던 이유를 물으면 많은 경우 집안에 큰 어려움이 닥쳐서, 사업의 실패 때문에, 아이가 대학에 낙방을 해서 등 이유를 대며 "이제 좀 나아지면 앞으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살아야 할 시점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멀리하게 된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하느님보다도 나의 경험과 지식만을 믿으려 해서 아닐는지요?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나 능력 이상의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잡이에 지쳐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지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사실 예수님보다는 베드로가 훨씬 더 고기잡이 전문가이고,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계절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고기떼가 어디에 어떻게 몰려 있는지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날도 밤새도록 온 호수를 누비고 다니며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던져보자는 마음으로 그물 던지기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의 그물에는 펄펄 뛰는 고기 대신 물거품과 같은 낙담과 실망만이 낚여졌겠지요.

이렇게 지치고 낙담한 베드로에게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목수 아들 예수님께서 다시 그물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을 따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그리고 그대로 했더니 정말 엄청난 고기가 잡혔고, 이를 두 눈으로 본 베드로는 두려움에 떨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하느님 전능 앞에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을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체험한 것이지요. 이런 엄청난 기적의 동기는 역시 베드로의 예수님께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자기 경험과 지식과 기술만을 믿고 예수님 말씀을 무시하고 배에서 내려버렸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늘 베드로와 같은 체험을 하곤 합니다. 성실히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실패를 하거나, 모든 일이 허사가 되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 온 힘을 다해서 노력했는데도 그 결과로 피로와 좌절만이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곳에는 진정한 수확이 있을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자신의 노력과 경험과 지식을 다 동원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지친 몸과 마음만을 결과로 받아 안았을 때 베드로는 좌절하지 않고 예수님을 신뢰함으로써 완전히 치유를 받았으며,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지친 베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신 것처럼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나의 노력과 경험과 지식이 맞는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하는 절대적 신뢰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신앙인의 삶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적 모든 희망이 사라질 때 신앙의 싹은 움트는 것입니다. 내 지식을 믿고, 경험을 믿고, 내 판단만을 고집하는 것은 허영이요, 자만이며 나의 지식에 따른 삶이지, 주님 이끄심에 따른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그 때 주님은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이기양 신부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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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과 응답에 대하여

오늘 연중 5주일에 교회공동체는 첫째 독서로 이사야의 소명이야기를 읽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천상성전의 모습을 환시하며 사랍들(세라핌)이 세 번 “거룩하시다”를 외치는 모습을 봅니다. 이 외침은 후에 요한묵시록 4장에서 “네 생물”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반복되며, 미사전례에서도 사제의 감사기도 후 공동체의 응답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 그리고 미사전례에서 천상과 지상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데, 그것이 3번 반복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 찬양의 메아리침을 묘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진정함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상성전을 본 예언자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왜냐하면 과거의 세계관에서 속된 존재가 천상세계를 접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백성 역시 입술이 더럽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부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입에 올렸음을 뜻합니다. 아마도 아사야의 상황에서 그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방신을 섬기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죄의식을 우리는 미사전례에서도 발견합니다. 미사의 시작예식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를 참회합니다. 왜 그 부분에 굳이 “말”로 짓는 죄에 대해 참회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현대인들에게 의문에 여지가 없는 것을 보면, 이사야가 자신의 부정함을 언급하면서 특별히 입술의 부정함에 대해 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더욱이 이사야는 앞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부르심을 받는 사람인 만큼 그 입술의 부정함은 그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예언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랍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댑니다. 이 장면은 혹시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이 벌을 받는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랍은 이를 통해 이사야의 죄가 사라졌다고 설명합니다.

즉 이것은 죄에 대한 벌이라기보다, 죄로부터의 정화를 의미합니다. 성경의 이 부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전례에서 복음을 듣기 직전 교회공동체는 이마, 입술, 그리고 가슴에 차례로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정화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상성전 앞에서 정화된 예언자는 주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어떤 일인지 설명되지는 않으나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할 누군가가 파견되어야 합니다. 일반적 천상성전의 모습이라면 어떤 천상적 존재가 파견되어야 하겠지만, 그 자리에 있고, 그 임무에 합당한 (즉 정화의 과정을 거친) 예언자가 감히 응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불가타 성경은 이 부분을 네 단어로 요약합니다.

“Ecce ego, mitte me.”

이 짤막한 네 단어는 교회 공동체의 모든 부르심과 파견의 기본적 영성으로 자리 잡게됩니다. 하느님께서 쓰시려고 우리를 정화하셨으니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우리가 떠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예언자는 연중 5주일을 살아가며 이 네 단어가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깊은 묵상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합니다.

▶ 최승정 신부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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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 안에서도 특별한 시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고 느낄 수 있는 시간입니다. 지난주부터 이번 주까지 그런 시간을 선물로 받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한평생을 주님 위해 걷겠다고 땅에 엎드린 새 부제와 새 사제들을 맞이했습니다. 내일은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설 명절이고, 수요일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 준비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명절 때문에, 전례 때문에 서로 한자리에 모여 사랑의 마음을 나눌 수 있습니다. 또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이사야, 바오로, 베드로의 삶에서 더욱 깊이 새겨볼 수 있습니다. 입술이 더러운 사람 이사야, 교회를 박해한 바오로, 죄 많은 베드로의 삶의 모습은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쳇바퀴 속에서 살다 보니 하느님을 잊고, 이웃을 잊고, 가족을 잊고, 자신마저 잊고 사는 부족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정화의 손길, 주님 함께하심을 체험하면 서 이사야, 바오로, 베드로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라고 이사야는 열정에 넘쳐 나섭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부활을 전하는 사도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을 낚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삶의 기준이, 삶의 모습이 달라진 것 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섰던 그때를 떠올려 봅시다. 누가 선뜻 주님 앞에 나설 수 있습니까? 한없는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온전히 맡겨드리며 시작한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불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 을 낚으라고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의 삶 안에 서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믿고 따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때의 그 마음이 지금도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전해 받았고, 그 신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나 의 삶에 있어 소중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일러주는 나침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을 충실히 걸으려고 애쓰는 우리가 복음 선포자요,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삶의 자리에서 그물을 던져야겠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이사 6,3)는 노래가 천상만이 아니라 이 땅의 곳곳에서 울려 퍼질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 2016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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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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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네사렛 호수에 날이 밝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많은 군중이 서로 잘 듣기 위해 가까이하니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올라타 뭍에서 조금 나가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시몬은 이미 장모님을 고치는 기적을 보았던 터이고, 예수님을 집에 모셨었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의 권위와 초자연적인 권능을 보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 매력에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었던 차, 시몬은 이 예언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도움을 청하니 뭔가 소속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하는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 있는 말씀은 사람을 인간적으로 사로잡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가 뭍에서 조금 떨어져 나아가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다 마치시고는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치라고 하십니다. 당시 그물의 길이는400~500m로 세 부분이 연결되어 있어 그물을 치려면 가장 깊은 데에 쳐야 했고, 운영하려면 적어도 4명의 어부는 달려들어야 하는 규모였습니다. 고기잡이 경험이 많은 어부의 판단에 의하면, 지금 그물을 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고기잡이에 적합한 밤을 꼬박 새우며 허탕을 쳤는데, 낮에 무엇을 잡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미 지친 몸들입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는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말씀하시고 인간의 힘으로는 완수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대답합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스승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대한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먼저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부인할 수 없는 당신의 현존과 사랑의 표지들을 보여주시면서 그 믿음을 지탱시켜주십니다.

성모님께서도, 아브라함 선조도 그러셨듯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믿고 내어 맡겨야 합니다. 기적적인 고기잡이 작업의 결말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분명히 느끼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크게 자각하게 됩니다. 이런 현존 체험은 그를 베드로로 자리 잡게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도 이제 ‘시몬 베드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시몬 베드로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로 불림을 받습니다.

2월 1일 새 신부님들, 2월 2일 봉헌생활을 (다시)시작하신 수도자님들, 이제껏 그래 오셨듯이 굳건한 믿음과 온전한 내어 맡김에 항구하시어 기쁨이 가득한 사목 생활, 수도생활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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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진 알렉산델 신부 : 2019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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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   [수원]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4] 1929
691   [청주]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1] 108
690   [의정부] 잘 지내십니까  [2] 1669
689   [춘천]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2] 80
688   [원주] 묵묵히 자신의 길 가신 예수님  [1] 1993
687   [대전]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  83
686   [전주] 제3의 시선  [3] 1906
685   [광주] 바라빠!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봅니까?  88
684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독서와 복음  [3] 1663
683   [수원]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4] 2175
682   [수도회]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에제 18,23)  [8] 2087
681   [부산] 새로운 탈출  [6] 2097
680   [안동]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3] 2337
679   [대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2] 2174
678   [인천] 마음속의 돌  [10] 2423
677   [서울] 사람을 살리는 법과 죽이는 법  [7] 2406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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