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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돈을 낚기보다 사람을 낚아보자!
조회수 | 1,895
작성일 | 07.02.03
로렌초 베네치아노의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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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라는 말이 있다. 재무 테크놀로지(financial technology)의 준말인데 재무관리에 대한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잉여자금을 유가증권에 투자하여 배당과 이자 수입을 얻어 수익을 높이는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요즘엔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정보나 지식면에 있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전문가가 되어 있다. 이처럼 현대는 돈을 잘 벌 수 있는 기술력과 지식, 정보가 발달되어 있고 현대인들은 그러한 쪽에 능숙능란하게 대처하면서 배우고, 또 놀라울 정도로 전문화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삶의 전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삶이 우리 삶의 전부일 수 있을까? 정작 찾아야 하는 삶의 부분을 우리는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부분에 관심을 놓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하고, 그래서 사람의 가치는 돈보다 더 떨어져 인간성과 인권에 무심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칫 그곳에 속해 있는 내 자신도 정보의 물결과 기술의 홍수 속에 파묻혀 자아마저도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을 알고 사람을 얻고 사람과 관계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 부분을 소홀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살아가고 있지만 암흑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베드로는 수 십년 동안 어부생활을 해온 베테랑이다. 하지만 정작 전문가였던 자신이 얻어내지 못한 것을 전문가도 아니고 그물에 손 한번 대어보지 못한 목수의 아들 예수님이 너무나 손쉽게 해내 버리신다. 예수님께서 지시하는 곳에 그물을 넣으니 어마어마한 물고기를 얻게 된 것이다. 물고기를 얻는 데에는 해박한 지식과 기술력이 필요하지만 정작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데 필요한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당신의 능력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낚는 일’인데 이에 필요한 것은 해박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이요, 감동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삶이요, 우리 삶의 전부이어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인간성을 잃어가기에 인간성에 대한 목마름으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하여 맘을 주고 받고 맘을 얻어내는 사랑의 작업으로써 서로 감동을 얻는다. 필자가 청년들과 함께하는 신앙교육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많은 이들이 정작 필요로 하고 얻고자 했던 것은 돈으로써 삶을 윤택하고 풍부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단순한 것, 즉 사람을 얻고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봉사자들을 통해 희생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면서 이미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주셨고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복음을 통해 더 이상 물고기를 얻는 일, 즉 돈버는 일에만 관심을 갖기 보다는 ‘사람 낚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사람 낚는 일’은 훌륭한 정보나 기술력이 아니라 단순한 것, 서로 감동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신뢰가 쌓여가는, 다시 말해 서로의 맘을 서로에게서 건져낼 수 있는 ‘사랑’만이 가능하다.

▶ 유승학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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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주택보다는 아파트가 많아서 보기 힘들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집 앞에 쉽게 볼 수 있었던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아마 어른들은 아실꺼에요. 맞습니다. “개 조심”입니다. 오늘은 이 ‘개 조심’에 관한 기억을 여러분들과 나눠보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개는 좋아하지만 큰 개를 상당히 무서워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개 조심’이라는 단어만 쓰여 있어도 그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당히 꺼렸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동네 아주머니 댁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대문에 ‘개 조심’이라고 쓰여져 있었거든요. 더군다나 그 집 대문도 열려 있습니다. 저는 별 생각을 다했지요.

‘혹시 저 문을 통과하면 송아지만한 개가 튀어나와서 나를 물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 집 앞으로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잠시 뒤, 그 집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나오셔서 손을 꼭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 집 대문에 붙어 있었던 ‘개 조심’의 개는 너무나도 작고 귀여운 강아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살아있는 ‘개'를 무서워했던 것이 아니라, 그 '개 조심'이라는 글씨를 더 무서워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많은 부정적인 이름을 떠올려 보세요. 가난, 실패, 패배, 좌절, 고독, 고통, 시련... 그런데 이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실상 더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아닐까요? ‘너는 가난해, 너는 실패할꺼야, 너의 체면이 완전히 박살날꺼야....’라는 말들에 더 큰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힘들어 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시몬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 이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과 비천한 자기가 같이 있다는 것, 그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즉, 그는 하느님의 아들과 죄 많은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몬 베드로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 그의 손을 잡아주시는 든든한 뒷배경이 되시겠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는 이 말씀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괜히 내 안에 헛개비를 만들어서 스스로 두려움 속에 빠지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갖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좌절 속에 계신 분, 그리고 ‘나는 안돼’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자책하시는 분들. 이제 용기를 가지세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 조명연 신부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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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밤새워 일해도 고기 한 마리 못 잡는 신통치 않은 어장(漁場)에 붙어살면서 이튿날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호숫가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런 가난 속에서 벌어졌습니다. 그것도 베드로 스스로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굳이 부탁을 하니 예수님을 배에 태움으로써 예수님 가까이에 있게 되었습니다. 호숫가에선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실 때도 그렇고 그 말씀이 다 끝날 때까지도 베드로는 예수님이나 그 말씀에 전연 관심이 없었던 방관자에 불과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베드로와 같은 신자는 수 없이 많습니다. 태어난 집안이 천주교 가정이기 때문에, 들어간 학교가 천주교 학교였던 관계로, 친구를 따라서, 애인을 따라서 우연하게 예수님과 같은 배를 탔지만 사실 자기는 방관자이고 오히려 멀리 호숫가에 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먼저 다가가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사실 베드로는 피곤했습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하는 그의 대답 속에 “피곤해 죽겠는데 고기잡이 전문가도 아닌 젊은이가 노련한 어부에게 왜 귀찮게 이러시요?” 하는 그의 속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노를 잡으며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순종해서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중에 자기의 말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묵직한 감촉을 손에 느낍니다. 고기가 그물에 가득 들었을 때의 그 기쁨, 그 만족, 그 행복의 촉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단숨에 그물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많은 고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 큰돈이 들어온 것입니다. 끼니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흥분될 만합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순간, 베드로의 반응은 흥분도 아니고 감사도 아니고 엉뚱하게도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이 짧은 말은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어떤 행동보다도 먼저 예수님 앞에 엎드렸으며 그 어떤 말보다도 먼저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고백한 것은 “저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는 남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라는 식의 형식적인 그리고 겉치례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 고백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뒤집어 엎는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잘못이었습니다. 나의 가치관은 잘못이었습니다” 라고 자신과 이 세상과의 관계에 혁명을 일으키는 고백입니다.

평소 같으면 잡은 고기를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가지고 갔을 베드로는 밤새도록 찾아 헤매던 고기떼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배까지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참다운 축복을 발견한 것입니다. 고기떼가 축복이 아니라 좋은 배, 질긴 그물이 축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다운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정말 축복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 길을 걷는 것이 바로 참된 인생의 길이며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 이봉영 신부 세례자 요한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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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열심’, 그리고 셋째는 ‘뒷심’입니다. ‘초심’이란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는 순수하고 결연한 마음이고, ‘열심’은 초심에 담긴 의지를 불태워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마음이라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뒷심’은 결연한 초심의 의지를 갖고 결단코 해내고야 말겠다는 저력을 뒷받침하는 저돌적인 마음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모두 우리의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초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요. 처음에 품었던 순수하고 결연한 마음이 사라질 때, 열심과 뒷심도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특별한 선행을 꾸준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매체를 통해서 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에 가졌던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심과 뒷심은 바로 초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가졌던 처음의 순수하고 결연한 마음을 얼마나 잘 간직하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세상 삶이 힘들고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서 초심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수록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초심입니다. 그래야 삶의 목표를 갖고 다시금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처음 불렀을 때의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몬 베드로는 어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수 출신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고기를 잡는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는데(팔면 꽤 돈이 되겠지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첫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듣는 겸손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 그리고 세상의 모든 재물과 유혹들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겠다는 것이 베드로의 첫 마음이었습니다. 이 첫 마음을 잠시 잃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첫 마음을 다시 기억했기에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2월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이 첫 주일에 내가 간직하고 있었던 첫 마음을 다시금 점검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첫 마음의 기준이 확고하게 서 있을 때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한숨과 한탄만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작은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합니다. 이들은 ‘얼씨구!’라는 흥겨운 말을 ‘얼씨구?’라는 자조 섞인 말로 바꿔서 쓰며, 우리 한번 신나게 ‘놀아볼까?’라는 말을 ‘놀고 있네.’라는 비아냥거림을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첫 마음을 우리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이 첫 마음을 잊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을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으며,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것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조명연 신부
  |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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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예, 여기 있습니다.”

찬미 예수님,
본당의 여러 봉사자들을 보면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해 주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봉사자들의 열심한 노력은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밑거름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부님들이 고민하는 것도 봉사자에 대한 문제일 것입니다. “○○ 좀 함께 해 보실래요?”라는 권유에 대부분 “아직 제가 부족해서……”라는 겸손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렇게 몇 번의 만남 후에야 “부족하지만 한번 해 보겠습니다.”라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속으로 ‘내가 겐네사렛 호수에서 고기잡이만 벌써 몇 년 째인데, 뭘 알고 저러나?’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말씀에 따라 일단 그물을 칩니다. 그런데 이후 상황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워 떨며 고백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부르심에 따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 안에서 늘 하느님의 부르심, 그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부르심, 성소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이 목소리에 “예” 하고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자, 신앙인의 삶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베드로처럼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결과가 뻔히 내다보이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쌓아 온 경험과 지식, 그리고 우리가 지닌 재주와 재능을 모두 버리고 정말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 부르심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를 자주 묵살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워서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길을 가고자 합니다. 만일 시몬이 고기잡이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우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 방식을 고집했더라면, 그는 아무런 체험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의 제자로도 부르심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이사야는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어느 날 이사야는 기도하던 중에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거룩한 하느님의 모습 앞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이사야의 이런 두려움과는 달리, 하느님은 입술이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를 당신의 예언자로 부르시어 말씀을 선포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크신 권능 앞에서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도로, 훌륭한 도구로 부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하느님 앞에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참으로 보잘것없이 작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성체 전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죄 많고 부족한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그 은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응답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삶은 주님의 은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권능을 보잘것없는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시기 위함이며,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그 거룩한 부르심에 언제나 “예” 하고 응답하도록 노력합시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사 6, 8)

▥ 인천교구 남상범 세례자 요한 신부 : 2016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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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選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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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에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미사 참례를 독려하기 위해 선물을 걸고, 성탄 때까지 80일간의 미사 참례를 주문했던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주일학교 어린이 80여 명 중 20여명 가까운 아이들이 미사에 참례하였다. 그래서 약소하지만 14K 금 묵주반지를 선물했다. 작년 3월에는 주일학교를 개학하면서 성탄 때까지 미사 153회 참례로 기준을 올리고 더 큰 선물도 약속했다. 요한복음 21장 11절의 물고기 “백쉰세 마리”의 그 153회.

학기 중 오전 미사는 참석할 수 없고, 방학이라 해도 학원이네 뭐네 해서 아이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설마 하면서.

그런데 헉! 무려 7명이나 153번의 미사에 참례했다. 새벽 미사와 저녁 미사, 주일 미사 등을 거의 다 합쳐야 153번을 채울 수 있는데, 그 어려운 걸 아이들이 해낸 것이다. 제일 많이 참례한 아이는 160번에서 한 번이 모자란 159번 미사에 참례했다. 묵주반지보다 더 큰 선물을 준다고 했는데, 실상 뭘 주어야 할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했던 것이었는데···. 무슨 선물을 할지 막막해서 성탄 판공 때 지구 신부님들의 지혜를 구했다. 고민 끝에 ‘엄마와 함께 하는 제주도 성지순례’로 선물을 정했다.

사실, 아이들의 미사 참례에는 엄마들의 각고의 노력도 한몫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에, 엄마와 아이가 함께 하는 2박 3일의 제주도 성지순례를 선물로 주기로 결정했다. 아이들 6명과 엄마 4명(한 가정은 엄마의 직장 관계로 다음 기회에) 모두 10명의 순례 비용으로 약 240만 원 정도가 본당에서 지원된다.

혹여 어떤 이는 너무 과한 선물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일부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본당의 재원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신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었던 순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153번의 미사 참례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이다. 학원시간을 조정해야 했고, 배고픔을 참고 저녁 미사에 나왔다. 가족들이 함께 여행 가는 것을 뒤로 미루기도 했고, 친구들과 PC방 가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졸린 눈을 부비고 새벽 미사에 나와서 꾸벅 대며 졸기도 했고, 친구의 생일잔치 초대도 ‘미안하다’며 거절해야 했다. 한여름에는 땀범벅이 되어서 성당에 들어섰고, 눈보라 속에서도 시린 손을 비비며 성당에 왔다. 비록 예수님 때문만은 아니어도, 그 아이들은 분명 예수님을 닮아 있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바로 그 예수님을 닮았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존재한다. 예수님을 떠나거나(마태 19,22 참조), 아니면 예수님에게 온전히 투신하거나. 중간은 없다(묵시 3,15 참조). 오늘 복음의 사도들처럼, 자기를 내려놓고 온전히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신앙인의 유일한 선택지다. 그런 이여야만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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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범석 아우구스티노 신부 : 2019년 2월 10일
  |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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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   (녹) 연중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5] 2056
647   [수도회] 피조물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 찾기  [1] 1555
646   [부산] 예수님은 약자로, 또 실패자로 죽어 가셨습니다.  [4] 2156
645   [서울] 마땅히 지켜야할 변치않는 권위  [6] 1923
644   [안동] 용기를 내어라  [2] 1694
643   [마산] 태양은 어느 집 앞마당만 비추지 않는다.  [3] 1938
642   [청주] 하느님의 힘이 함께  74
641   [인천] 보는 방법  [5] 2093
1 [2][3][4][5][6][7][8][9][10]..[17]  다음
 

 

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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