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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길입니다.
조회수 | 1,942
작성일 | 07.02.03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녹취하여 옮겨 놓은 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보도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분이 돌아가신 다음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고 믿으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이들도 그분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바를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인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발생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초기 교회의 믿음과 실천을 반영하는 부분을 더 지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초기 신앙들의 믿음을 반영하여 묘사된 장면입니다. ‘주님’이라 부르는 것과, 엎드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 취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 신앙인들의 자세입니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부르던 호칭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람들은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복음이 전하는 ‘기적적 고기잡이’ 이야기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담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겐네사렛 호수가 있는 갈릴래아를 무대로 활동하신 사실은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은 이 호수에서 일하던 어부들이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부 출신 제자들 중에 오늘 거명된 시몬 베드로와 제베데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모두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전하는 역사적 사실들입니다.

오늘의 ‘기적적 고기잡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는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 덕분으로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갈릴래아의 어부도 아니고 예수님을 물가에서 만날 수도 없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립니다.

오늘의 ‘고기잡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가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알려 줍니다. 사람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람들이 한 노력은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따라 그물을 쳤더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배 한 척으로 옮기지 못하고 다른 배를 불러야 할 정도로 수확은 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일하는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성과를 올린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고기를 기적적으로 많이 잡았다는 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여기서 ‘낚는다’는 우리말의 표현이 지닌 의미 하나를 배제해야 합니다. 우리말에 ‘낚는다’고 하면 낚시를 감춘 먹이로 물고기를 속여서 잡아, 그것을 잡은 자의 노획물로 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물고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뽑으신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이 ‘고기잡이’ 이야기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실천하고, 같은 실천에 합류하는 이들을 얻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신자 배가 운동’을 외치면서 우리의 욕심을 성취하는 제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많이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는 듣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은 하느님이 두려워서 세우는 구원의 대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구원을 내세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자기가 속하는 교회의 교세확장을 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높은 사람으로 행세하기 위한 권한도 아니고, 특수 복장도 아닙니다. 영악하게 세상을 살기 위한 지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당신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아버지의 생명을 실천하신 당신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것은 ‘내어주는 몸이다’, ‘쏟는 피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당신의 삶을 요약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시듯이 예수님도 내어주고 쏟는 삶을 사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그물을 치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같이,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삽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한 사람이 잘되기 위해 그 동안 마련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전향했다는 말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잘되기 위해 우리가 마련한 것은 우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재물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아 이 세상에서도 누릴 것 다 누리고, 죽어서도 하느님으로부터 또 많은 것을 얻어 누리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그런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도 베풀며 살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시기에 자비롭게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기에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두려워서 혹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하는 노력이 하느님 앞에 큰 수확을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여, 큰 수확을 얻으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와 사랑의 실천으로 큰 수확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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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은 끝임 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하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 또한 변화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의 신체적 변화는 물론이요, 가치기준의 변화 등. 변화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하는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각자의 ‘응답’이라는 삶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통해서 삶의 참된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는 ‘고기잡이’라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뛰어 들어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도대체 고기잡이라고 하면 전문가였던 베드로에게, 그것도 전문가로서 밤새 노력해 보았던 베드로에게 던져진 예수님의 말씀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스승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씻고 있던 그물을 다시 던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성취됩니다. 말씀을 따라 던진 그물에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들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일상의 삶에서는 그물을 깊은 데로 나아가서 그물을 내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물을 다시 던진다는 것은 때로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려야하고 또 이기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때로는 많은 고통이 따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참된 변화 곧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자존심을 버리고,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고, 억울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어색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먼저 웃는 얼굴로 다가가서 다정하게 말을 걸어야할 때도 있습니다. 본능의 감정은 상대를 밀어내고 있는데, 그 본능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믿음은 그것을 가능케 하고, 또 분명한 풍요로운 결실이 있음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 보여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한걸음 더 참된 변화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 박만춘 신부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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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죄인이며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누가 만일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 거짓말쟁이입니다. 그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 앞에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와 진실한 고백은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사람은 거룩하게 되며 하느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인정받게 됩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이사야 6,6)하고 스스로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했기에 극적으로 거룩해져 예언자로 자원하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은 가장 보잘것 없는 자이며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라고 실토합니다. 그는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 자신의 위치와 입장을 고백함으로써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은 것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루카 복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은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밤새 그물을 쳤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결실을 얻지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시며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것은 역경과 도전, 고통의 상징으로 세상의 한 복판에 서서 결코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 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한 곳에 결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함께 할 때 베드로가 뜻 밖에 많은 고기를 잡았듯이 우리도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풍성한 결실을 맛 본 베드로는 문득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수님과 자기와의 엄청난 차이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스스로의 한계성을 인정하며 부족함을 실토하는 여기에 베드로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했기에 그는 의로워졌고, 의로워졌기에 예수님께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가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 구원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두는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자신이 부족한 죄인임을 하느님께 고백하고 두렵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이 주는 또 다른 소명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결코 과대평가하지 말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더 어려운 곳, 더 깊은 곳을 찾아 나가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현실에 도전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삶에 하느님은 그에 상응하는 축복과 보람을 꼭 주실 것입니다.

▶ 김근배 신부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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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변화를 요구하는 소명

우리는 지난 연중 제3주일과 제4주일의 복음이었던 ’나자렛 설교’(4,14-30)를 통하여 루가복음사가가 구상하는 특유의 ’시간과 공간개념’ 안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개시되었음을 보았다. 루가의 고유한 시공개념은 예수님의 복음선포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없이 공중을 떠돈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바로 그 시간과 그 장소에 항상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나자렛 설교’ 전반부의 핵심이었다. 설교의 후반부는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예언자적 운명을 예고하면서, 그 운명이 복음을 대하는 청자(聽者)의 믿음과 불신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자렛 고향사람들이 뻗친 죽음의 손길(4,29)을 벗어나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을 본격적인 공생활의 무대로 삼으셨다. 거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시몬의 집에 들러 열병을 앓던 장모도 고쳐주셨고, 데려온 온갖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가시는 그 때와 그 곳에 하느님나라는 실현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4,31-43)

루가복음 5장부터는 예수님의 공적인 가르침과 활동이 더 넓은 차원과 지평으로 펼쳐진다. 오늘 연중 제5주일에 봉독되는 복음은 겐네사렛(갈릴래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행하신 가르침과, 현직 어부(漁夫)들인 시몬과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엄청난 고기를 잡게 하신 자연이적(自然異蹟)을 통하여 첫 제자들을 얻으신 제자소명사화를 들려준다.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회당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초월하는 이유는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예수께서 언제 어디에 계시던 그분이 계신 바로 그 시각과 그 장소가 구원성취의 시간이요 장소이기 때문이다.(루가 4,21) 예수께서 시몬과 그의 동료(안드레아, 야고보, 요한)들을 첫 제자로 삼으신 소명사화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 모두에 보도되고 있다.(마태 4,18-22; 마르 1,16-20; 루가 5,1-11; 요한 1,35-42) 마르코의 소명사화가 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마태오가 이를 그대로 베꼈고, 루가는 마르코의 원전(原典)에 자연이적사화를 곁들였다. 요한은 제자소명사화의 구조와 내용을 전혀 다르게 편집하였고, 오늘 복음의 자연이적사화를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사화와 연결시키고 있는 반면(요한 21,1-14), 루가는 이것을 제자소명사화에 연결시킨 셈이다.

루가의 이러한 의도는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불림을 받는 마르코에서와는 달리 시몬(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향한 가르침을 마치시고 갑자기 시몬을 향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고 하셨다.(4절) 시몬이 예수께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응답하였다.(5절) 예수께서는 물풀만 걸려든 빈 그물을 씻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 밤새 허탕을 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시몬은 서로 아는 사이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을 나오셔서 곧바로 시몬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일(4,38-39)로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되었고, 시몬은 예수님의 능력에 이미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마르코는 그 순서를 다르게 보도하고 있는 바, 소명사화(1,16-20)가 먼저고 장모치유(1,29-31)는 그 다음이다. 이 점이 바로 마르코에 없는 자연이적 사화를 루가가 곁들인 이유이다. 천직(天職)이 어부였던 시몬이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루가복음의 매력이다.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삼던 어부들이 밤새 허탕친 짓거리를 어느 누가 지시한다고 해서 또 하러 나가겠는가? 어부들은 이미 지쳐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또 한번 그물을 던지라’고 명하신 것이다. 얼마 전 자기 장모님을 열병에서 단 한마디의 명령(4,39)으로 고쳐주셨던 바로 그분이 말이다. 시몬은 어차피 허탕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5절)라는 토를 달고 가서 그물을 쳤다.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걸려들었다. 이 놀라운 사건이 시몬을 다른 차원으로 끌고 간다. 그는 순간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 앞에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시몬이 예수께 떠나달라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8절) 예수께서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것이다. 예수와의 직접적인 대면에서 베드로는 예수께 대한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는 신비를 경험한 인간의 통상적인 태도이다. 매혹이 강하면 예수를 따를 것이고, 공포가 강하면 예수를 버릴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자 예수를 따라 나섰지만,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압박은 늘 베드로를 따라다닐 것이다. 신앙이란 아마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여정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강렬한 내적 변화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없다.

▶ 박상대 신부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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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말씀을 따르는 베드로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고기잡이-어부인 베드로의 모습에서 낚시를 밤새도록 하는 낚시꾼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엄청난 기대와 설렘 속에서 그 밤을 꼬박 새우면서 짜릿한 손맛을 보려는 그들이 언제나 월척을 낚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본당에 낚시 좋아하는 형제들이 꼭 싱싱한 회 맛을 느끼게 해준다고 큰소리치고 가서는 그 다음 날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날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얼큰한 매운탕이 먹고 싶어서 전화를 걸어보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신부님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다음번에 정말 싱싱한 놈으로 올리겠습니다.”그런 답변을 들으려고 전화한 것은 아닌데 그래서 전 마음속으로‘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다시 깊은 데로 가서 낚시를 내려 어떻게 해서든 고기를 잡아 오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밤에 그렇게 안 잡히는 고기를 아침에는 반드시 잡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과 어젯밤에는 그토록 강한 희망이 아침에는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해보니 안 된다는 것을 체험하고, 수도 없이 실패를 하고 나면 저절로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버립니다.

전 그 주문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으나, 그에게는 믿음이 없으므로 월척은 꿈도 꿀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처절한 패배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바꿀 수 없다고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그날 아침에 그에게 또 낚시를 던져서 고기를 잡아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실패와 낙심으로 가득 찬 베드로에게 다시 던져라, 다시 나가서 그물을 내려라.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는 부끄러운 베드로에게, 자랑할 수도 내세울 것도 없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정말 고기잡이는 안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다 보니 어젯밤에 가졌던 자신의 희망을 되찾게 되고, 오늘 아침 잃어버렸던 자신의 바람을 회복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대로 해보니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수없이 많은 밤을 새워가면서 고기를 잡았던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사람을 낚으러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영혼을 깨우시는 우리 주 예수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 주시네.

▥ 부산교구 김동환 신부 : 2016년 2월 7일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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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족함 고백하는 겸손한 종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에게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맡기시려고 다가오신 주님을 만나자마자 자신이 더러운 입술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며, 큰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이사야의 죄를 없애 주시고, 그를 당신 말씀을 전하는 깨끗한 입을 가진 이로 만들어 주십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어떻게 소명을 받게 되었는지에 관해 직접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자였던 바오로를 사도로 세우십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니었던 데다가 박해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자랑할 수도 없었고, 또 언제나 신앙적 선배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자신이 전하는 말씀은 자신이 “전해 받은” 복음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시몬과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부르십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어부로 일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일에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의 이야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맥이 발견됩니다.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시면, 그는 자신이 사명을 수명하기에는 부족한 인물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그는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수행해 나갑니다. 이런 이들은 반드시 마지막에 가서 자신이 행한 일이 스스로의 능력에 따른 일이 아니라 모두 하느님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습니다. 어떤 이는 사제로, 어떤 이는 수도자로, 또 어떤 이는 교리교사나 선교사로, 또 어떤 이는 본당의 평신도 지도자나 단체장 혹은 간부로 선택됩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자신이 능력 때문에 선택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제대로 된 제자라면 선택받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맡아야 할 임무의 무거움에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런 분들만이 하느님 앞에서 도움을 청하고,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저는 종종 신학생들에게서 보곤 합니다. 신학생들과 면담을 하다 보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래서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사제직에 적합하지 않은 모습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야말로 진정 부르심 받은 이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으로 서품식장에 들어가 자신의 부족함을 온전히 드러내며 제대 앞에 엎드리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자신을 PR하며 포장하기를 권하는 오늘날 스스로를 너무 과하게 포장하여 자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아니즘에 빠진 이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하느님의 활동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잘난 맛에 하는 이들의 삶에서 겸손한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하고, 무엇을 하든 그분의 뜻을 찾는 종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이룬 뒤, 모든 것을 하신 분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소명을 받은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되돌아봅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2월 7일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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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수도회] '착해빠져' 탈인 사람  [2] 1963
713   [인천] 무언의 가르침  [2] 1989
712   [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6] 1965
711   [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2] 2033
710   [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5] 2109
709   [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3] 1633
708   [군종] 이 세상에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2] 1895
707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57
706   [수원]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4] 1927
705   [청주]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1] 88
704   [의정부] 잘 지내십니까  [2] 1668
703   [춘천]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2] 74
702   [원주] 묵묵히 자신의 길 가신 예수님  [1] 1991
701   [대전]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  72
700   [전주] 제3의 시선  [3] 1906
699   [광주] 바라빠!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봅니까?  84
698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독서와 복음  [3] 1661
697   [수원]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4] 2173
696   [수도회]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에제 18,23)  [8] 2086
695   [부산] 새로운 탈출  [6] 2096
694   [안동]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3] 2335
693   [대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2] 2172
692   [인천] 마음속의 돌  [10] 2421
691   [서울] 사람을 살리는 법과 죽이는 법  [7] 2405
690   [마산] 죄를 묻지 않으시는 하느님  [3] 2401
689   [대구] 십자가는 하느님 정의와 자비의 만남  [4] 1903
688   [의정부] 마음껏 돌 던지십시오  [5] 2228
687   [춘천] 용서받은 자녀답게 살자  [5] 2467
686   [군종]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2] 2502
685   [원주] 용서  83
684   [광주/제주] 용서하시는 예수님  [1] 2169
683   [전주]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2] 91
682   (자) 사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간음한 여인]  [2] 1833
681   [수도회] 회개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U턴'하는 것.  [2] 2119
680   [군종] 아버지의 마음으로  [2] 2280
679   [의정부] 중간만 하는 교회?  [2] 2141
678   [춘천] 아버지의 품으로  [3] 2235
677   [인천] 무르익는다는 것  [4] 2050
676   [서울]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6] 2372
675   [마산] 죄인이 죽기를 바라시지 않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4] 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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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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