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8 54%
[마산] 인생의 그물질, 깊은 데는 어디인가?
조회수 | 2,090
작성일 | 07.02.03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허탕을 친 제자들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신다. 일생을 바쳐 일구고 가꾸었지만, 자녀들은 한 둘 품을 떠나자, 집이 갑자기 빈 둥지 같기만 하다. 우리 인생에 '거물이 찢어질 만큼 큰 수확을 얻을 '깊은데'는 어디인가?

1. 빈 둥지 인생

산 중턱을 내려오다 말고 좀 쉴 겸 앉았다. 일행들은 어디쯤 오는지 보이질 않는다. 유난히 열심히 따라온 한 신자가 다가와 갑자기 눈빛이 진지해지며 말문을 연다. "큰놈은 군에 갔고, 둘째는 대학 3학년이고, 막내 딸애는 대학 1학년 이예요. 요즘 둘째에게서 전화가 뜸하다 싶어서 핸드폰으로 연락했더니, 어떤 여학생이 전화를 받기에 아들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여자친구라고 하잖아요. 어제 그 여자 친구를 소개받았어요. '이 놈이 벌써 이렇게 컸구나' 싶어 대견스럽기도 하면서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데요. 요즘은 애들이 다 떠나고 남편과 둘만 있으니 집이 꼭 빈 둥지 같아요. (말을 하는데 부끄러워 할 겨를도 없이 연방 눈물이 흐른다.) 주름살이 늘어가는 나 자신도 싫고, 머리가 반백이 되면서 신문이 잘 안 보인다고 돋보기를 자주 찾는 남편도 불쌍해 보이고요.(눈물은 또 줄줄 흐른다.) 신부님 요즘은 제가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는지, 주책이 되었나 봐요. 창피해 죽겠어요."(억지로 웃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뒤쳐져 있던 일행이 왔다. "무슨 데이트를 그렇게 재미있게 ... "하며 농담을 하려다가 울어서 부은 눈을 보고는 흠칫하며 말끝을 흐린다.

2.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대입, 취직시험을 거치면서 시험노이로제를 겪는다. 군에 입대해서 고된 훈련을 할 땐 남자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사랑에 눈뜨면서 열병을 앓아야 되었고, 결혼을 하면서 평생동지인 동업자를 얻었다. 의기투합하여 사글세 쪽배도 마련했다. 첫 아이를 얻었을 땐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계모임' '적금' '부금' '융자', 아파트 사고 파는 '아파트 굴리기'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가? 직장 따라, 집 값 따라, 학군 따라 이삿짐 싸고 풀기를 거듭하였다. 내 집 마련, 과외 비, 등록금 메꾸기에 얼마나 숨가쁜 나날이었던가?

참으로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열심히 '거물 질' 해온 나날이었다. 이제 한숨 돌릴 여유를 갖게되었다고 막-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신문이 잘 보이질 않고 눈이 침침해진다. 억새꽃처럼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 가는 흰 머리카락은 또 뭔가? "이게 내 얼굴인가?"싶게 낯설어 보이는 푸석푸석한 거울 속의 모습, 내 자신보다 더 애지중지 했던 자녀들이 이제 돈이 필요할 때가 아니고는 통 연락이 없다. 가속이 붙은 인생의 수레바퀴는 왜 이렇게도 빠른가? 갑자기 가슴이 시리고 만사가 서글프다. 이것이 내가 꿈꾸던 그 인생이란 말인가? 내 집이 왜 이렇게 빈 둥지 같을까? 염치없이 눈물은 왜 이렇게 흐르는가? 지금까지 내가 그물질 한 것들은 다 뭐란 말인가?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3. 깊은 데로 저어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애써 마련한 소중한 집이 왜 갑자기 빈 둥지처럼 느껴지고, 나의 분신인 자녀들마저 왜 멀리만 느껴질까? 값나가는 패물들이 왜 이렇게 빛 바랜 깃발처럼 초라해 보일까? 생각해 보면 이것저것 가진 것이 많은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虛)한가? 아마도 배는 부른데 가슴이 고프기 때문일 것이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 그물을 내리라."

어떻게 하란 말씀인가? 인생의 '깊은 데'란 어디인가?

그것은 많이 갖기보다는 베풀고,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기보다는 주변의 이웃을 돌보고, 이익을 찾기보다는 보람과 의미를 찾는데 힘쓰고, 큰 소리 치며 나서기보다는 침묵 중에 귀를 기울이고, 활동한다고 설치기보다는 하느님 앞에 자신을 비춰보는 기도에 더욱 힘쓰라는 말씀이 아닐까? 그것은 "사람이 음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에로,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 삶의 자세를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가 아닐까 ! 그러다 보면 모든 공허함을 채우고, 한숨을 잠재우고도 남을 보람과 기쁨과 희망이라는 큰 고기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힐 것이다.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이 하루하루 늙어 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늙어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세상이 집이 아니고 주막임을 인정해야 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는 것은, 시간 속에 빛 바래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죽음 너머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을 잡아 올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쪽배를 주시고, 밤새도록 그물질 할 젊음을 주시고, 일생 동안 동고동락할 동지를 주시고, 분신(分身) 같은 자녀들을 주셨던 그분께서는 언젠가는 당신을 따라 나서도록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서는 결정적인 순명을 해야 한다.

주님, 세상 것을 버리는 연습을 매일 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비울수록 충만해지는 신비를 깨닫게 하소서. "죽음은 인간이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순명이다."

▶ 유영봉 몬시뇰
448 54%
사람 낚는 어부들

병원사목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병원사목 신부로 일한지가 1년이 넘었습니다. 본당의 신자들을 다독이고 보살피는 것이 본당사목이라면 병원사목은 입원한 환자들을 직접 찾아 방문한다든가 필요한 성사를 주는 소위 “찾아가는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찾아가서 면담도 하고, 고백성사, 병자성사도 주고 특히 중병이나 암에 걸린 환자가 있으면 신자건 비신자건 자주 찾아뵈려고 합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많은 외로움과 두려움이 밀려오고 고통스럽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는 계기도 됩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면서 냉담을 풀고 다시금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은데 어떤 때는 정말 큰 고기(10년, 20년--)가 낚이기도 하지요

“몸이 건강할 땐 하느님 모르고 살다가 이렇게 몸이 아파 하느님 찾으니 정말 죄송합니다. 하느님이 벌주신 것 같아요” 이런 고백을 자주 듣습니다. “하느님은 자매님이 성당 안 다닌다고 벌주시는 그런 쫀쫀한(?)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매님을 무척이나 기다렸을 겁니다. 자매님의 아픈 몸이 하느님을 다시 찾도록 도와준 겁니다. 기쁘게 신앙생활 다시 하도록 합시다” 하고 다독거립니다.

병원에서 처음으로 제게 세례를 받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전직 의사셨는데 부인, 아들, 며느리 가족 모두가 신자였고 그분만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만 정직하게 살면 되지 믿음이 무슨 필요 있어. 내 병 내가 고치면 되지, 하느님 믿어서 뭐해” 이렇게 ‘내가 낸데’라는 분이셨지요. 그런데 덜컥 생각지도 않은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몸은 점점 야위어져 가고 신경질은 늘어가고 고함치는 횟수도 많아졌습니다. 고통스런 나날들이 계속되어지는 어느 날 그분이 제게 고백했습니다. “신부님,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몰랐습니다. 제가 평생 의사로 살아왔는데 아픈 사람 진단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아픈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동안 너무 교만하게 하느님 외면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하느님 믿고 하느님 품안에 살고 싶습니다.” 그분은 성실하게 세례준비를 하셨고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느님 품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 따뜻한 품이 그리운 사람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죽음을 앞두고 하루하루를 겨우 겨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손 잡아주며 지나온 삶의 얘기를 들어주는 길벗이 되어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병원의 자원봉사자 분들에게 자주 강조합니다. “봉사중의 봉사가 병원봉사”라고 듣기 좋아라 하는 말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해야하는지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곳이 바로 병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봉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감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엔 따뜻한 하느님 품이 필요한 분들이 너무도 많이 계십니다. 특별히 몸이 아파 힘들어할 때 우리의 기도와 격려, 사랑의 손길은 크나 큰 사랑의 무게로 다가옵니다. ‘사람 낚는 어부들’ 그 어부들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곳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 최경식(야고보)신부
  | 02.06
448 54%
부르심과 응답

오늘은 연중 제5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주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는가? 그리고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예수는 복음 선포의 초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하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예수께서는 좀더 효과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시려고 시몬의 배를 이용하셨습니다. 마침 어부 시몬이 고기잡이를 마치고 그물을 거두어 씻고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호숫가에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여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배에서 열정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르침을 끝내고 나서 예수께서는 배를 빌려 준 어부 시몬에게 무엇인가 보답하시려는 듯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시몬은 악몽 같았던 지난밤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겐네사렛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던 시몬인지라 매일 밤 그물질을 하는 것이 일과였고, 그 날 걸려드는 고기만큼 그의 벌이는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간밤에는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밤새도록 수고만 하였을 뿐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던 중에,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시몬은 예수가 나자렛에서 톱질, 대패질이나 하던 목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는 톱질, 망치질에는 전문가이지만, 고기잡이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문외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겐네사렛 호수가 자신의 삶의 터전이고, 고기잡이에는 도가 튼 사람입니다. 고기잡이 전문가인 시몬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면, 고기잡이에는 문외한인 예수라고 별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시몬은 목수 출신인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몬은 예수의 초대에 “예” 하고 응답한 것입니다. 시몬은 고기잡이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가 목수 출신이시기는 하지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했습니다.

시몬의 바로 이런 자세가 신앙인의 자세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예수의 초대에 “예” 하고 응답한 시몬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엄청난 기적을 목격하게 됩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걸려들지 않았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의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그러고도 두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배를 빌려 준 시몬에게 무엇인가 보답하시려고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시몬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려고 그를 초대하셨던 것입니다. 시몬은 그 초대에 열린 가슴으로 응답했던 것이고, 그 응답에 예수께서는 놀라운 기적으로 보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능력 있는 말씀에 가슴을 열고 겸손되이 응답하는 것이,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받아들이는 열려 있는 가슴에 하느님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과 은총을 담아 주십니다.

우리는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늘 하느님의 부르심과 하느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느님의 이 목소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워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거기 길이 열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가야 할 길이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결과가 뻔히 내다보이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을, 그리고 우리가 지닌 재주와 재능을 버리고 정말 터무니없어 보이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가슴을 통하여 들려 오는 주님의 부르심을 자주 묵살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워서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길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만든 길을 가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길이 아닌, 자신이 만든 길을 가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만일 시몬이 고기잡이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우면서, 예수의 초대를 거부하고 자기 방식을 고집했더라면, 그는 예수의 큰 능력을 체험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분의 제자로 불림받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며,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을 보면,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주님의 엄청난 능력을 체험한 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어부 시몬은 예수의 그 엄청난 능력 앞에 고기잡이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에 대하여 눈뜨게 되었습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잡이에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던 자신의 삶이 부끄럽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저토록 엄청난 능력을 지니신 예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떠나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완전히 기가 꺾인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시몬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어부 시몬은 완전히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서,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어부 시몬은 무엇에 홀린 듯, 모든 것을 팽개치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고기잡이 시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람 낚는 시몬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몬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이제 시몬은 자신 만만해 하면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하면서, 사람 낚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앞으로 그의 활동 무대는 겐네사렛 호수가 아니라, 전 세계가 될 것입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 그리고 겸허하고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주님께 온전히 귀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그런 사람을 당신의 제자요, 사도로 선택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 시몬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완전한사람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결코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닌 재산과 재물, 경험과 학식을 자랑하고 그런 것들을 지녔으므로, 자신 만만해 하는 사람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가 예언자로 불림받는 대목을 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어느 날 기도하던 중에 스랍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거룩하고 엄위로운 하느님의 모습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죄 많음과 초라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이사야의 이런 두려움과는 달리, 하느님은 입술이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를 당신의 예언자로 부르시어 말씀을 선포하게 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거룩함 앞에 자신의 죄 많음을 인정하는 사람, 하느님의 크신 권능 앞에서 인간의 초라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귀의하게 되고 주님의 사도로 불림받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하느님 앞에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우리의 부족함과 인간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재물과 재능, 그리고 경험과 지식이 하느님의 부요함과 권능 앞에 참으로 보잘것없음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권능을 보잘것없는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시기 위함이고, 또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더욱 철저히 우리 자신을 비우면서, 하느님께 귀의하는 생활을 합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 강영구 신부
  | 02.06
448 54%
깊은 데로 그물을 치라

베드로는 지쳐있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가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입질도 없는 낚시질, 얼마나 지루하고 긴 인내를 요구하는지 해본 사람은 안다. 멍하니 새벽을 맞이한 베드로 앞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곤 다시 그물을 치라고 하신다. 어떻게 할 것인가. 베드로의 운명을 바꿀 선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별 저항없이 그물을 던졌다. 결과는 배 두 척으로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의 고기였다. 말씀을 따른 보답이었던 것이다. 그분 지시대로 한다면 상상을 넘는 결과가 온다는 가르침이 아닐는지.

이렇게 베드로는 선택되었다. 고기잡이에 지친 어부에서 예수님의 으뜸 제자로 바뀐 것이다. 변화의 주체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그분께서 선택하셨기에 베드로는 바뀔 수 있었다. 그러니 사람의 운명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께서 허락하셔야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계절이 바뀌듯 사람은 바뀐다. 반드시 바뀐다. 나무들이 성장하듯 사람도 성장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모습으로 바뀌기 위해선 어떤 형식으로든 주님의 부르심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따라야 한다.

깊은 대로 그물을 치시오. 베드로의 눈에는 부질없는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밤새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물을 던진다. 자신의 뜻을 고집했다면 던질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사람의 눈에 허망한 듯이 보이더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라야 한다. 인간적 계산으로는 별 볼일 없는 것일지라도 주님의 말씀이라면 따라야 한다. 베드로가 던진 그물 속에는 이런 교훈이 담겨 있다. 그분의 부르심을 만나기 위해선 누구나 알아야 할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먼저 그분의 뜻은 사람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숙명적으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느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관계를 만들며 살라는 것이 우선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기에 성서 안에는 사랑과 용서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너무 쉽게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실망한다. 남을 도와 주었으면 잊어버려야 하는데 보답하지 않는다고 섭섭해 한다. 도움을 받았을 때는 제대로 감사드리지 않고 당연한 듯이 살아간다. 어찌 좋은 관계를 만들겠는가.

깊은 대로 그물을 치시오. 주님의 말씀 따라 깊은 곳에 그물을 쳐야겠다. 내 본능과 성격의 깊은 곳에, 지난날 내 삶 속의 깊은 곳에 다시 한번 그물을 쳐야겠다. 그리하여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야겠다. 좋은 것에는 감사를 드리고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삶의 교훈으로 되새겨야겠다. 주님 뜻에 맞는 것은 다시 가꾸고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은 버려야겠다. 새로운 삶은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베드로는 어부생활을 그만 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변신했을 뿐이다. 자신이 체험하고 만난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 어부의 심정으로 사람들 앞에 나섰을 뿐이다. 그러니 새롭게 시작하려면 바꾸어야 한다. 예수님 중심으로 삶을 바꾸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복음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다.

▶ 신은근 신부
  | 02.06
448 54%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기적이 우리에게(루카 5,1-1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서 계시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은 군중을 넘어 호숫가에 대어 놓은 두 척의 배로 향하고 있다. 거기엔 어부들이 막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다가가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떨어지게 한 다음, 배에 앉아 군중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군중의 눈과 귀가 그분께 쏠린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르치시는 장면은 루카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교회를 배로 비유하였다. 배의 선장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배를 젓는 사람(일 뿐)이다. 파도에 흔들릴 때도 있지만 사람들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나르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배는 시몬의 배인데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말하는 이는 예수님인데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교회(배)의 사명은 사람들의 귀를 주님께로 향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데 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주장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때때로 자기가 선장인 양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어 주님의 음성을 덮을 때가 많다. 그런 교회에 예수님께서 조용히 경고하신다. “배의 선장은 너희가 아니라 나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내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주어야 해.” 사제는 물어야 한다. “교회라는 배를 저어가는 나는 누구의 음성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가? 내가 전하는 복음은 누구의 복음인가? 나는 세상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는가?” 루카는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준다고 전한다. 사제는 자기의 목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그분의 음성을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은 밤새도록 헛수고를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한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걸려들었다. 시몬은 그만 두려워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말한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시몬은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이 자기의 능력 밖임을 깨닫는다. 모든 공을 주님께 돌리는 것은 사제가 갖추어야 할 덕이다. 두려움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사제가 갖추어야 근본자세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당신 앞에 무릎 꿇게 하고선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1절) 고기잡이인 그들이 배도 그물도 고기잡이도 버렸다. 기적으로 잡은 고기마저 버렸다. 기적을 보고 기적까지 버렸다. 빈 마음으로만 그분을 따를 수 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오르는 물질적 기적이 아니라 모든 욕망을 끊어버리는 기적이, 청하는 바가 다 이루어지고, 하는 일마다 다 잘 되게 해달라는 욕심을 채우는 기적이 아니라 이런 기적을 비우는 기적이 나와 우리 사회에 일어나기를 기원해 본다. 가난이 부로,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고, 병에서 치유되기를 바라는 요행스런 기적이 아니라,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고통에서도 나를 창조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는 기적이 나와 우리 사회에 일어나기를 기원해 본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긋는 내 몸에, 십자가를 높이 세운 교회에 그리스도가 달린 십자가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원해 본다.

▶ 이제민(에드워드) 신부
  | 02.06
448 54%
[마산] 회개 없이는 신앙인도 구원도 없다

예수님께서 고기잡이의 기적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시몬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특별히 이 에피소드 안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세 어부들의 반응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목격한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 세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복음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반응의 과정들과 동일한 요소들이 미사 전례 안에서도 발견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전례의 시작에서 이루어지는 참회예식과 성찬의 전례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체에로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여기에서 신앙인이라 자부하고 불리우는 자들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하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당함을 인정해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어집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즉,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당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신앙인들이란 도대체 무엇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도 명확하게 밝혀집니다. 그것은 회개에 대한 촉구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통하여 촉구하신 회개라는 것의 동기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고, 이 회개라는 것의 성격은 미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회개라는 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이 죄와 함께 일구어져 온 삶의 방향을 바꾸며 이 방향을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재설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라는 것은 일종의 선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죄를 뉘우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만일 신앙인들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라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으로 시작되어지는 것이기에 죄나 잘못이 없다는 사람에게는, 그가 이미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든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지금 바로 여기에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서는 모든 이들은 회개라는 것을 통하여 마침내 신앙인이라 불리워질 수 있습니다.

▥ 마산교구 서정범 요한 신부 : 2016년 2월 7일
  | 02.05
448 54%
세상이라는 그물

-----------------------------------------

평생을 물가에서 어부로 살아온 이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십니다.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고기는 물 안에서 살고, 사람은 물이 아닌 물 밖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음이 기다리고, 사람이 물 안으로 들어가면 역시 죽음이 기다립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향해 ‘낚는다’라는 표현을 하실까?

어부가 고기를 낚는 것은 휴식이 아닌 일을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사람을 낚는 것 역시 이제 일차원적인 작업이 아닌, 또 다른 형식의 일임을 뜻합니다. 그 일은 바로 이제 복음의 선포로 다가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 세상의 이치와 논리 혹은 욕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 선포는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세상의 논리가 아닌 철저히 하느님의 논리로 드러납니다. 욕심, 이기심, 성과주의, 자본주의가 아닌 해방, 용서, 이해, 이타심, 그리고 너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

창세기는 “세상 창조 전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 2)라고 전합니다. 세상 창조 전 물은 어찌 보면 죽음의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물이 아닌 세상 창조 전 심연의 상태에 젖어 있는 우리 모두를 건져 올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새로운 길, 제자들의 복음선포로 인해 이 세상엔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자유와 해방이 찾아옵니다. 세상 속 죽음이라는 좁디좁은 그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세상의 그물이 아닌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 나라가 선포됩니다.

오늘 복음의 선포를 통해 이 시대의 ‘나’라는 신앙인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곰곰이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제 세상이라는 그물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

마산교구 정윤호 베드로 신부 : 2019년 2월 10일
  | 02.08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57   [수도회] 영혼의 다이어트  [2] 2103
756   [수원] 가보니 참 좋더라!  [5] 2189
755   [서울] 좁은 문으로, 파이팅!  [7] 2635
754   [인천] 구원의 좁은 문  [8] 2638
753   [마산] 하늘나라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는다  [6] 2320
752   [대구] 힘써 좁은 문으로 들어가자  [4] 2456
751   [부산]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6] 2528
750   [안동] 돈 - 최고의 유혹,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  [4] 2347
749   [광주] 문(門)이 있습니다!  [1] 2538
748   [전주] 구원을 향한 선택  [2] 53
747   [제주] 좁은 문  [1] 50
746   [군종]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1] 2617
745   [의정부] 좁은 문 앞에서  [1] 50
744   [대전] ‘좁은 문을 통과하는 입장권’  [2] 2526
743   [청주]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2] 46
742   [원주] 콱!!! 박은 사람  [5] 2375
741   [춘천] "보편된 정신을 살리자“  [2] 61
740   (녹) 연중 제21주일 독서와 복음 [좁은문으로, 꼴찌가 첫째가--]  [3] 1719
739   [수도회] 참평화를 얻으려면  [3] 1829
738   [서울]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일  [4] 2357
737   [인천] 주님이 주시는 평화  [5] 2047
736   [마산]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3] 2234
735   [수원] 불을 지핀다. 새로 남을 위하여.  [6] 2374
734   [군종] 참 평화를 얻으려면  [2] 478
733   [춘천] 세상의 거짓에 ‘아니’라고 해야  [2] 645
732   [대구] 주님의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2] 1910
731   [광주] 거짓 평화를 깨뜨리자  2086
730   [원주] 내가 받아야 할 세례  2136
729   [대전] 더 큰 평화를 위해 작은 평화를 깨트려라.  [1] 2165
728   [안동] 그 불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2] 2167
727   [부산]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4] 2223
726   [전주] 갖자 그리고 해보자  [2] 89
725   [제주] 지금 제주도는  63
724   [청주] “사랑의 불을 제게 놓으셔서”  [1] 81
723   [의정부] 평화가 아닌 불, 그리고 분열  [3] 107
722   (녹) 연중 제20주일 독서와 복음 [불을 지르러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3] 1897
721   [청주]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1요한 4,19).  61
720   [수도회]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  [3] 2125
719   [인천] 하느님의 방식으로 ‘깨어 있는’ 것  [4] 742
718   [의정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2] 586
1 [2][3][4][5][6][7][8][9][10]..[19]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