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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수님의 아름다운 은퇴(?)
조회수 | 2,302
작성일 | 07.02.23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의 처음과 마지막 대목입니다. 시인이 마음에 둔 ‘그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에게는 엉뚱하게도(?) 30여 년의 짧은 삶을 사시다 가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시였습니다. 그분의 삶은 참 힘들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근근이 사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구름 같은 군중을 몰고 다니시기도 한 화려한 삶을 사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얼굴만이라도 보고파,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고파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었지만 고독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이라며 환호받았던 분이었지만 아무도 뒷수습해 줄 겨를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난기약’을 했음에도 아무런 유비무환할 겨를 없이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데, 세월이 흘러도 한참이 흘러 까마득히 옛날 일인데도, 아직도 그분을 잊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잊는 것은 한참, 영영(永永) 한참이라는 시인의 노랫말 그대로입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며 힘들게 피었다 잠깐의 순간에 저버린, 누구도 쳐다볼 틈 없이 그렇게 쉽게 삶을 마치신 예수님, 그분을 한참 아니 영영 기억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너나할것없이 “돌을 두고 빵이 되라”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세태에 한 몫을 한 것이 죄스러워서입니다.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손에 쥐겠다고 달음질치는 그 경주에 뛰어든 것이 부끄러워서입니다. 전지전능한 초인이 되겠다고 그래서 천사들마저 보호하고 받쳐 줄 것이라 믿는 그 교만함을 부러워한 탓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 부를 탐하는 사람, 초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삶은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인간적으로 어리석은 삶을 사셨던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겠다고 다짐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사순 시기는 회개와 정화의 시기여야 합니다. 입술로는 회개와 정화를 노래하면서도 몸으로는 빵을 구하고 권세와 영광을 얻겠다며 발버둥을 친다면 예수님을 유혹한 악마가 되는 것이며 1독서의 이스라엘의 처지처럼 이집트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은퇴(?)하셨던 것은 그분께서 성령으로 가득 차셨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뜻대로만 사셨기 때문이며, 하느님을 의심치 않고 하느님만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빵을 구하고 권세와 영광을 탐했다면 억울해서라도 그렇게 일찍 시들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그분을 기껏해야 그것도 억지로 훌륭한 성현 중의 한 분쯤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영영 기억하고 따르며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 섬기는 이유는 아무것도 탐하지 않고 때가 되자 주저함 없이 은퇴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 그분만큼은 아니어도 흉내는 낼 정도의 아름다운 퇴장을 위해 비우고 비우자고 다짐 또 다짐합니다.

▶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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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가치인 하느님의 말씀

1. 성경 이야기

오늘 제1독서(신명 26,4-10)는 야훼께서 보잘것없는 자신들을 돌보아 해방을 주고 가나안 땅에서 햇곡식을 야훼께 바쳤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달을 때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2독서(로마 10,8-13)에서 사도 바울로는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로서 믿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깨닫는 사람들 역시 온갖 명예와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루카 4,1-13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았다는 유혹사화는 마태 4,1-11과 마르 1,12-13에도 실려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으며 천사들이 40일 동안 계속 음식으로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또 예수님은 들짐승들과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루카 복음에는 세 가지 구체적인 유혹의 내용이 나옵니다. 악마는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아 허기진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유혹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못하리라 (신명8,3)"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 유혹을 물리칩니다. 악마는 다시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면서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모두 당신의 차지가 될 것이오" 하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엎드려 절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겨라 (신명 6,13)"는 말씀으로 두 번째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이제 악마는 예수께 시편 91,11-12을 들이대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아래로 몸을 던지시오" 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떠보지 말라 (신명 6,16)"는 말씀으로 악마의 마지막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에게서 떠나갑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이 전하는 대로 예수님이 세 가지 유혹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예수님조차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전에 큰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나 이제나 무릇 위대한 인물들은 큰 일을 하기 전에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갖기 마련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유혹을 받을 때마다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말씀만을 따르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유혹사화는 하느님의 말씀의 위력을 말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다보면 시련을 겪고 유혹도 받게 됩니다. 특히 물욕·권력욕·명예욕은 사탄의 힘을 지닌 마력인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지라도 생활 속에서 벗어나기 힘든 유혹입니다.

우리들 안에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기보다는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하느님을 멀리하며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두려고 하는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교회에 명(命)을 내리십니다. 그 명을 좇아서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요 보람이요 기쁨입니다. 노력 없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떠맡기는 생활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는 신앙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더욱 건강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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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향한 일편단심

고려를 뒤엎고 이씨 조선을 창건하려는 야심을 품은 이방원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시조 한 수를 지어 들려 줍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칡넝쿨처럼 우리도 서로 얽혀서 옛 왕조, 새 왕조 따지지 말고 오래 오래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넌지시 권유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정몽주 역시 시조를 지어 변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이렇게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굳게 지켰던 정몽주는 결국 이방원의 심복에 의해 살해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회유와 유혹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본격적으로 선포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간 준비를 하시는데, 바로 이때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옵니다. 우선 악마는 예수께 돌을 빵으로 바꿔 보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빵으로 대표되는 돈과 재물에 의존해서 백성의 마음을 잡으라는 유혹입니다. 이어서 악마는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세상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세속 권력과 영화로 백성을 휘어잡으라는 유혹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성서의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하느님이 천사를 시켜 지켜 주신다고 했으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내세워 자기를 과시함으로써 백성의 주목을 끌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는데,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에 의지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돈과 재물을 앞세우려는 유혹에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신명 8,3)는 말씀으로, 세속 권력과 영화에 기대려는 유혹에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13)는 말씀으로, 하느님을 자기 과시의 도구로 삼으려는 유혹에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신명 6,16)는 말씀으로 대처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악마의 집요한 유혹을 이겨 내신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로 시작된 신앙의 여정에서 하느님보다는 재물과 권력에 의지하려는 유혹, 자기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는 하느님까지도 이용하려는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충신이 두 주인을 섬기지 않듯이 충실한 신앙인 역시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제1독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바로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제2독서).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일편단심으로 하느님께 굳은 신뢰를 갖고 그분 말씀에 의지할 때, 교묘하고 끈질긴 유혹의 목소리를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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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유혹을 당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빵에 대한 유혹은 원초적이며 가장 강한 유혹입니다. 누구든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짓는 죄 중에서 빵 때문에 짓는 죄가 제일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먹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것이므로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을 동물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유가 있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빵과 정신’, ‘육체와 영혼’ 이 두 가지는 다 소중하지만 거기에도 순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순서를 뒤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먹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물질적으로 빈곤하게 살다 보니 그런 생각도 날 만하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모두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절대 소중한 것이지만, 하늘은 땅보다 위에 있고, 또한 땅이 생기기 이전에 먼저 하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땅보다 높고, 땅에 앞서 소중한 것입니다. 시간과 영원은 다같이 소중하지만 시간은 사라져도 영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소중한 것을 알았지 영원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과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당장 육신의 안일함과 쾌락을 생각한 나머지 영혼을 망각하는 처사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거절하신 이유는, 빵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마에 땀을 흘려서 얻은 빵”(창세 3,17)이 아닌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빵의 품위를 높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육신의 지나친 쾌락과 안일을 탐내지 말고, 정신적인 면을 앞세움으로써 육신과 물질의 품위를 높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둘째 유혹은 ‘권세와 영광’입니다. (마태오는 둘째와 셋째의 순서를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이 유혹은 소위 부유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매력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지성인들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을 돋보이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만 이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자기 합리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유혹입니다. 현세적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자기가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을 잘 살게 해주지 못한다는 터무니없는 교만에 빠지기 쉽고, 돈과 명예를 차지한 자는, 만민이 그 돈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잘나서 고개 숙이는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만이 이 세상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고 우리가 예배하고 섬길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신명기(6, 13)를 인용해서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려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소위 유명하다는 종교지도자들이 당하기 쉬운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 도취에 속아넘어가 이단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유혹은 부지불식간에 그릇된 신앙의 길로 인간을 유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는데 어찌 이런 일도 못하실까?” 이런 따위의 생각은 하느님을 옳게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에 생기는 그릇된 생각들입니다. 그와 비슷한 유혹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과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혹은 “하느님은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해줄 수 있을까?” 또는 “하느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도 눈앞의 것만 보고, 안이한 일에만 집중되기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입니다. 눈을 들어 먼 앞날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하심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믿음을 갖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을 그 완악한 사탄의 유혹된 마음으로부터 건져내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바꿔 놓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서 자기의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그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독생 성자까지 우리 인간에게 보내 주셨건만, 인간들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아버지의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크신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사탄에 사로잡힌 우리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사탄의 사슬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시어 당신께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다운 행동이 무엇이며, 인간의 삶의 보람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룩되기 위해 인간들의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어 주시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 김몽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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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명을 굳건히 하는 사탄의 유혹

사순 제1주일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심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단식을 하시러 사막에 가십니다. 그 사막은 과거 40년 동안 광야를 헤맨 백성과 다른 새로운 백성의 탄생을 암시합니다. 이런 단식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절대적 소명을 준비하십니다. 그 준비를 마친 후 사탄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 유혹은 오히려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을 보다 굳건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됩니다.

사탄의 첫 번째 유혹은 빵에 대한 유혹입니다. 배고픔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만나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상을 세우고 하느님을 배반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곧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 힘은 자칫 인간의 교만과 결합하여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는 잘못된 힘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십니다. 곧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시겠다는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고백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일어납니다. 사실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고, 성전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사탄은 혹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흔들 수 있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혹에 맞서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명하는 당신을 보여 주십니다.

사순 시기가 막 시작된 이때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의탁 된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분의 뜻대로 죽기까지 순명하실 것이라는 유혹 극복 과정을 통해서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반성해 봅시다. 우리는 간혹 사탄의 유혹, 곧 세상의 유혹에 빠져 예수님의 구원 사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빵은 물질이고, 권력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이유가 혹시 이 빵 때문은 아닙니까? 세상에서 유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은 벌써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이 세상의 물질과 권력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빵은 당신 몸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빵이기 때문입니다. 그 빵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권력에 대한 욕구에서 해방시켜 주님께서 우리를 지배하고 계신다고 고백하게 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께 기꺼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유혹 사건은 신앙인이 하느님께 순종하며,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성체께 존경과 사랑을 드리라고 가르칩니다.

▶ 양해룡 신부
  |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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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 첫째 주일에는 어느 해에나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 말씀을 묵상합니다.(마태 4,1-11; 마르 1,12-15; 루카 4,1-13) 유혹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적인 활동의 첫 장면이기도 하지만, 악의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 받으시는 예수님의 삶 전체를 예고하고 요약합니다. 악마의 유혹의 특징은 진짜와 가짜를 교묘히 속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혹의 진실을 꿰뚫어 볼수 있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욕구와 갈망을 제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루카 4,3)

빵은 육체적 ‘배고픔’만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갈망과 욕구를 채워주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겐 어떤 빵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루카 4,4)라고 하시며, 사람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요한 4,34)이 나의 음식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배고픔’을 함께 해야 합니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루카 4,7)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찬사와 감탄을 한몸에 받으며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알리고 멋진 삶을 꿈꾸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속적 가치나 시대의 흐름을 무비 판적으로 좇다보면 삶의 기준이 뒤바뀔 수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8)는 말씀을 통해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품위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 4,9)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 능력과 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더욱 튼튼하고 안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절제 없이 축적된 힘은 상대방을 억압하고 굴복시키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다른 이에게 활력이 되고, 역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불어 넣어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도록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루카 4,12) 고 하시며 힘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힘을 우리를 위해서만 사용하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신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갚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도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마태 27,42 참조)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고 그분에게서 물러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유혹들은 우리의 삶에서 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유혹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보며 사순시기를 경건하게 시작합시다.

서울대교구 김영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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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10일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사제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 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외치면서 사순절의 의미를 각성시켜 주었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서적 전승으로 보면 하느님과의 만남에 앞서 갖게 되는 긴장된 준비의 시기를 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고,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Memento Mori(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가 아닌가 합니다. 1970 년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 58.6세, 여성 65.5세였습니다. 2010년 통계에서는 남성이 77.6세, 여성이 84.4세 로 40년 만에 평균 수명이 20년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이같은 수명 연장과 함께 ‘죽는 것’에 대한 시선도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0년대 초 광풍처럼 몰아치던 ‘웰 빙’(Well-being)에 대한 관심이 ‘잘 죽어가기’로 조용히 옮겨 가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이 현상의 밑바탕 에는 ‘길어진 수명’이 ‘양질의 삶의 연장’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현실과, 그 때문에 ‘연명’ 차원의 늘어난 삶을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국가별 ‘죽음의 질’ 조사에서 OECD 40개 국가에서 32위를 했을 만큼 ‘죽음의 질’이 떨어지는 우리 사회의 상황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이제 많은 사람은 “잘 먹고 잘살다가 죽자.”가 아니라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삶으로 준비하는 웰다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속에서 의미를 추구할 때 인간은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특히 신앙인들에 게 있어서 죽음의 이해와 극복은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에 있다는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수적 수도회 생활 양식으로 단식, 침묵, 단순 노동 등을 엄격히 준수했던 중세 시대 시토회에서 허용된 유일한 말이 ‘메멘토 모리’였다고 합니다. 죽음을 떠올릴 때 인간의 유한성도 깨닫게 되어 지금의 삶과 현실에 충실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죽음은 얼마나 복된가! 그러나 그러한 죽음을 있게 한 이 세상의 삶은 또한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가!”라고 했던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 신부의 말이 새삼 가슴에 사무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신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그 소중한 하루하루를 살아갑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 서울대교구 홍인식 마티아 신부 : 2016년 2월 14일
  |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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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보에는 교구 인사이동이 실렸습니다. 새 사제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첫 본당으로 갈 것입니다. 안식년을 하게 되는 신부님들은 충전의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은, 정든 곳을 떠나는 것은 아쉬움과 두려움의 시간입니다. 새로운 다짐과 결심의 시간입니다. 새로운 곳으로 둥지를 트는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제들은 교우들의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두 기둥은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4주간 ‘대림시기’를 통해서 준비합니다. 세상의 주인께서 오심을 묵상하고, 깨어 기다릴 것을 교회는 대림시기를 통해서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의 수난, 십자가와 죽음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사순시기를 통해서 우리들 역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40일 동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순시기에 교회는 ‘희생, 기도, 단식, 나눔, 봉사’를 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이번 사순시기를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믿음입니다. 믿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양치기 소년은 늑대가 나타나면 소리를 치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와서 늑대를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심심했던 양치기 소년은 거짓으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모였습니다. 늑대가 없는 것을 알고는 돌아갔습니다. 며칠 후에 소년은 또 심심했고, 장난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마을 사람들은 모였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며칠 후에 이번에는 진짜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소년은 소리를 쳤고,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도 거짓이라고 생각을 해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믿음의 가장 커다란 적은 거짓말임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목욕탕엘 갔습니다. 아버지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시면서 ‘시원하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어린 아들은 정말 ‘시원하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탕에 들어간 아들은 뜨거운 물에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뜨거운 물이 시원하게 느껴졌지만 아직 어린 아들에게는 뜨거운 물은 뜨거운 물일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솝우화의 이야기를 읽었던 나이는 지났습니다.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서 ‘시원하다.’고 느낄 나이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양치기 소년은 단순하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인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아빠와 어린 아들의 이야기도 우리는 재미있게 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과 북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것은 ‘개성공단’의 문제입니다. 남과 북의 화해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이 폐쇄되었습니다. 남한은 북한이 개성공단을 통해서 벌어들인 자금으로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 발사를 했다는 이유를 들어서 폐쇄를 결정했습니다. 북한은 자주적인 결정을 외세가 간섭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것은 주권국가의 권한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남과 북의 문제는 엉킨 실타래와 같아서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할지 난감한 문제입니다.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 화해와 상생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항해를 하는 배가 거친 풍랑을 만날 때, 배가 큰 파도에 침몰 할 것 같을 때, 선장은 이야기합니다. ‘배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로 버리십시오.’ 배에 있는 물건들은 다 필요한 것들 일 것입니다. 먼 항해를 위해서 식량도 있어야 하고, 항구에 도착해서 팔아야 할 물건들도 있고, 배를 운전하려면 꼭 있어야 하는 기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배가 침몰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배가 침몰할 수 있는 긴박한 순간이 오면 배에 있는 무거운 것들을 바다로 던져버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야 거친 파도와 거센 풍랑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기도를 하신 후에 악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길에도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유혹은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 명예, 권세’라는 커다란 짐들을 모두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난의 거센 폭풍우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개성공단’이라는 배는 앞으로도 거센 풍랑에 떠밀려 갈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체면, 명예, 권력’이라는 짐을 가득 담고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 우리의 신앙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2월 14일
  |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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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이겨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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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시어 광야로 가십니다. 사십일 동안 머무시면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세 가지 유혹은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원수와 계속할 내적 투쟁을 상징적으로 비춰줍니다.

예수님께서 허기가 극에 달하셨을 때를 맞춰 악마는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의 조화를 깨뜨리려고, ‘너 하느님 아들아니니? 빵을 만들어 먹어’라고 마음속에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하여,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시면서 속삭임을 단호하게 떨쳐버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배고픔을 겪는 가운데, 아버지께 대한 믿음과 순명을 드러내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아셨기 때문에 하느님 아들로서의 권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지만, 또한 하느님의 종으로서 겸손과 순명 속에 머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실 영광의 길은 결코 받은 권능을 맘대로 사용하면서 자기 뜻을 펼쳐 나가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귀 기울여 듣고, 순명하고, 봉사하는데 사용하는 길입니다.

다른 두 가지 유혹, 즉 마귀가 또 하느님 흉내를 내며,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속삭입니다. 이 유혹에 말려들면 하느님으로 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되고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 부터 받은 것이지, 내 것은 아니다’라는 자각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8)라고 단호히 그 생각을 떨쳐버리십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보호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당신 신원과 권능에 관한 보장이 과연 사실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계획과 뜻을 펼쳐 나가지 않고,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삶의 주도권도 자기가 움켜쥐지 않고, 하느님께 드리며 순종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유혹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제자들도 교회도 받을 것입니다. 특히 사순 시기 동안 성령께 의탁하며, 성경을 충실히 읽어 깨닫고, 기도함으로써 이 유혹들을 식별해 내고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도록 노력해봅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를 얻으셨듯이, 우리도 끝내는 그렇게 될 것을 굳게 믿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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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일 알렉산델 신부 : 2019년 3월 10일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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