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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40일 후,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요?
조회수 | 2,126
작성일 | 07.02.23
2007년도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회개와 참회의 생활로 부활의 기쁨을 노래할 그날을 준비하기 위한 은총의 시기가 열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해마다 사순 시기가 되면 새 출발을 결심하면서 남다른 각오와 다짐으로 담배나 술도 끊고, 그동안의 악습도 고쳐보고자 자신은 물론 많은 이웃들과도 새끼손가락을 걸어보지만, 40일이 지난 후 성찰해 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변화되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유혹. 그렇습니다. 바로 유혹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발목을 잡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세상 창조 때부터 항상 인류와 함께 하며 인류를 괴롭힌 ‘최대의 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간직한 아담과 하와는 물론이거니와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수많은 인물들까지도 유혹에 농락당하고 고뇌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후에도 인류는 유혹과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그때마다 승리와 패배를 경험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유혹을 이겨내면 하늘에 공로를 쌓고 영신적인 이득을 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죄’라는 멍에를 짊어지면서 희생과 극기, 보속 등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유혹의 손길은 하느님의 아들일지라도 결코 두려워함 없이 찾아갔는데, 그것은 40일이라는 엄청난 기간의 추위와 배고픔, 수많은 역경의 끝자락에서 아주 교묘한 수법으로 너무도 달콤하게 인간의 가장 원천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세 가지 유혹’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하나 순서대로 이겨내기도 힘든데 연속적으로, 게다가 하나의 달콤함조차도 참지 못하고 넘어지기 쉬운데 가장 강력한 유혹 셋이 예수님께 다가온 것입니다. 결국 악마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떠나가 버리면서 결론이 나긴 했지만,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와 강인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어찌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위험천만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가도, 각오를 하고 무엇인가를 해보려 하면 유혹은 더 가깝게 찾아옵니다.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도 많지만,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그리며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길 결심해 봅니다. 그러다 쓰러졌다 일어서고 다시 넘어졌다 우뚝 서면서 점점 주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유혹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더해주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게 도와주는 수단이 되기도 하기에 일정부분 필요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적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지혜와 믿음을 통해 유혹에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유혹을 이겨낸다면 40일이 지난 후 더욱 가슴 벅찬 기쁨으로 부활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디 성공하시길….

▶ 노성호(요한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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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스카 신비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 안에 빠스카 축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은 없다. 빠스카 축일이야말로 다른 모든 축일을 거룩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승리와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는 빠스카 축일의 신비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하여 40일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의 충만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필요한 기간으로 사순절을 살고 있다. 오늘의 성서 대목들은 이 빠스카라고 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피곤하지만 기쁨에 차 있는 우리 여정의 의미와 방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다.

제1독서: 신명 26,4-10: 선택받은 백성의 신앙고백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위해 오랫동안 시험과 단련을 받았듯이 우리도 약속의 땅인 빠스카의 영광에 참여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거기에 도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순절을 지내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빠스카의 신비는 약속의 땅보다 더 의미가 깊다.

복음: 루카 4,1-13: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사순절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유혹의 내용이 아니라 이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이 단련되고 또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케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체험 중심으로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유혹은 예수님의 수난까지 계속된다. 즉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유혹이다. 즉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1-2절)고 하고 있고,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13절). 그 ‘다음 기회’란 ‘수난의 때’이다. 그 악마는 유다의 배반과(루가 22,3)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너희의 때가 되었고 암흑이 판을 치는 때가 왔구나”(루가 22,53)라고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둘째, 이 유혹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한(루가 3,22) 세례 후에 나타난다. 사탄은 아주 고도의 수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세속적 권세와 명예와 영광에 결부시켜 세속주의적인 ‘메시아’로 만들려고 한다. 사탄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유혹을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시오...”(3.9절). 이러한 유혹은 계속 예수님께 그분의 공생활 중에도 나타났던 것이었다. 군중들(14,15; 19,11)과 고향 사람들(4,23) 그리고 사도들(10,20)로부터도 나타났다. 십자가 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23,35). 사탄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다.

이 유혹은 바로 예수께 하느님의 뜻에 맞는 메시아로서보다도 인간들이 바라고 원하는 그런 메시아가 되라는 무서운 유혹이다. 즉 현세적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동요시키는 유혹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보여주신 것을 통해 원하시는 것과는 달리, 즉 하느님의 뜻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나 눈치에 자신을 맞추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는 성공하는 영원한 유혹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의 표현인 ‘말씀’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이 성서에 있다(4.8.12절). 즉 예수님은 ‘말씀’의 식별력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하신다는 명확한 의지의 표명이다. 즉 하느님만이 우리가 받들어 모셔야 하는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제2독서: 로마 10,8-13: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고백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이란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는 그분께 도움을 청하며 의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것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말하고 있다. 그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음의 멍에까지도 없애셨다. 이제는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 구원을 갈망하며 하느님께 호소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 때에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로마 10,13).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여정도 그리고 그 도착지도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사순절은 빠스카와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은총이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감으로써 말씀을 실현시켜 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예수님께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라고 더 애쓰는(갈라 1,10)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체를 통해 받으셨던 유혹을 우리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를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리하고 인간적인 원의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유혹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좀 더 나 자신을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사순 제1주일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 조욱현 신부
  |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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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미사를 봉헌하고 집에 들어오는데 남편 요셉이 갑자기 아내 마리아에게 다짐합니다. ‘내가 이번 사순 시기 동안만이라도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겠어!’ 마리아는 그 다짐이 이뻐 보였지만, 왠지 한숨이 나왔습니다. 이 다짐은 매번 사순 시기만 되면 똑같이 반복되는 연례행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좀 꼭 지켜요!’라는 마리아의 핀잔에 요셉이 큰 소리로 응수합니다. ‘걱정 마!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순시기 동안 금연할 테니깐!’”

사순 제1주일입니다. 사순 시기가 되면 으레 많은 교우가 위의 상황과 같은 ‘절제의 다짐’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순 시기는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 희생과 참회의 삶으로 속죄하는 40일의 시기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는 희생을 많이 합니다.

성경에서 ‘40’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약속의 땅을 찾아 광야에서 보내야만 했던 40년과,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준비했던 40일의 시간,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가 호렙산으로 하느님을 만나러 떠난 40일의여정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그러나 역시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세례 후 공생활을 준비하시기 위해 광야에서 보낸 40일이 사순 시기의 가장 큰 의미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위해 예수님이 공생활동안 스스로 극복하셔야 할 삶에 대한 유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극도로 배고픈 시간에 악마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돌로 빵을 만들라.’고 제안합니다(루카 4,2-3 참조).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원초적인 것에 대한 유혹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내내 배고픔의 고통과 싸우셔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 유혹은 공생활 내내 당신 친히 경험하셨고 극복하셨던 모습입니다.

그다음의 유혹은 ‘악마에게 경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제안입니다(루카 4,6-7 참조). 너무나 달콤한 제안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회유하고 꼬셨던 모습일 것입니다. 그들 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과감히 그 유혹에서 벗어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시험해 보라는 즉,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보여주라는 제안입니다(루카 4,9-11 참조). 보여주기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쉽게 믿을 텐데, 왜 이렇게 어렵게 사냐는 한탄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제안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방법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당신이 보여주신 모습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겪는 세상에서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보여 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 답은 말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그리고 주님을 위해 절제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사순 시기에 하는 우리의 절제의 다짐을 돌아봅시다. 나의 다짐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내적인 모습만은 아닌가요? 물론 이런 다짐도 필요하겠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절제의 모습은 외적이고 사회적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내가 희생하고 절약하고 절제한 것들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나눔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는 많은 교우들이이웃과 좀 더 많이 나누는 은혜로운 사순 시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 수원교구 이재현 요셉 신부 : 2016년 2월 14일
  |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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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구원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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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 말씀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악마의 유혹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며 직접 겪으신 유혹이며, 우리가 신앙에서 늘 맞닥뜨려야 하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만화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 속에는 인간 구원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유혹은 돌더러 빵이 되라는 유혹입니다. 40일 동안의 단식으로 허기진 예수님께는 매우 치명적인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무엇이 사람을 살게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마술과 같은 힘으로 구원이 주어지는가? 빵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유혹 앞에서 예수님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 인간을 진정으로 살게 하는 것은 빵이 아니라 하느님이며,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유혹은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줄테니 악마에게 경배하라는 유혹입니다. 이 역시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곧 세상의 권세와 정치적 힘으로 구원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다 민족을 로마 압제에서 구원할 정치적 혁명가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 유혹 앞에 섭니다. 그리고 답합니다. 주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말입니다. 그분만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정치적 혁명이 아닌 주 하느님께서 이루는 사랑의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셋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지라는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하느님께서 응답하시는지 시험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혹독한 시련 중인 사람,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는 사람에게 매우 치명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물리칩니다. 하느님은 시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며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호주머니 속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악마의 유혹은 2000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다음 기회를 노린’ 악마는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즉각적인 응답을 바랄 때, 세상 근심과 걱정이나 죄와 악의 세력에 몸과 마음을 빼앗길 때, 시련 중에 하느님이 어디 계시느냐며, 계신다면 응답을 달라고 시험하려 들 때, 우리는 사탄의 유혹 중에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이며, 그 관계는 시간 안에서 성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며 우리가 당신과의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서로를 더 잘 알고 친교를 맺으며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구원은 내적인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긴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환상이나 눈속임일 뿐입니다. 변화를 위해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깨고 비우고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단순히 고행과 극기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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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민택 신부 :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3월 10일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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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의 방식을 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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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선언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방식만을 내세우는 사람을,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모든 순간에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식을 겸손한 신뢰로 선택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모험인데, 저는 우리가 오늘 이 모험에 초대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예수님께 다가와 계속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며,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닌 당신 자신의 뜻으로 무언가를 하도록 부추깁니다. 악마는 절대로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았고, 악마가 예수님께 해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나쁜 것만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악마의 제안은 배고픈 이에게 나누어줄 빵을 만들어보라는 것이었고, 고생하며 사는 이들을 아주 손쉽게 구원할 수 있도록 그냥 자신에게 절을 한 번 해서 세상 모든 것을 얻으라는 것이었으며, 또 높은 데서 뛰어내려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엉뚱한 사람들을 따라다니느라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될 일이니, 얼마나 그럴듯한 제안입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방식을 이 모든 제안과 바꾸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확실하게 하느님의 뜻과 방식을 선택하십니다. 이것이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홀로 기도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하셨던 삶의 결실입니다.

우리도 사순 시기, 이 사십일을 지내고 난 뒤 예수님처럼 확고하게 하느님의 방식을 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으로만, 말로만, 지금 이 순간만, 오늘 하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순간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방식을 생각하고 그분께서 더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좋은 결심을 하나씩 하는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올해는 ‘하느님 방식을 택하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맞이하는 선택의 순간에 최선으로 보이는 나의 방식을 내려놓고, 좀 마음에 차지 않고 쉽지 않아 보여도, 또 좋은 결실을 낼 것 같지 않아 보여도 하느님의 방식을 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고 당신처럼 하느님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보다 앞서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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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최규화 요한 세례자 신부 : 2019년 3월 10일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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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생각이 곧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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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1999)는 성경을 그대로 영화에 옮겨놓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낮에는 평사원, 밤에는 해커로 활동하는 청년 ‘네오’는 선지자라 할 수 있는 누군가로부터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는 암시를 받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이 세상이 전부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네오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선지자 ‘모피어스’의 말에 따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보고 초인적인 능력도 발휘해보며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이 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이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는 자신이 믿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이점을 이용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실제의 자신들은 기계들의 에너지원으로 쓰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공지능을 지닌 기계들이 어디에서도 에너지원을 얻을 수 없게 되자 인간들이 생산해내는 단백질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는 인간들이 꿈에서 깨어나면 이 현실을 알게 되어 문제가 되기에 자신들이 만들어낸 프로그램 내에서 평생 꿈을 꾸며 잠들어있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태어나자마자 이미 정해진 시스템 속에서 의심 없이 살아갑니다. 이 헛된 세상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돈 벌고 결혼하고 여행 다니며 늙어갑니다. 그리고 삶을 참 잘 살았다고 느끼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완용이 죽으면서 자식에게 “앞으로는 미국이 득세할 테니 일본보다는 미국에 붙어라!”는 유언을 남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겐 이 세상이 처음이자 끝입니다.

그러나 개중에 깨어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으로 가는 통로일 뿐이라고 외칩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 세상이 꿈임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통해 증명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과 부활은 이 세상을 목적지가 아닌 여행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여행자는 그 나라의 환경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좋은 경험으로 즐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거꾸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하다 말합니다. 더 가난해지고 더 절제하고 더 낮아지는데도 행복하다 말합니다.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분들이 그 예입니다. 어찌 보면 이들은 세상 부적응자들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역할을 교회가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 ‘광야’에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부적응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핵심주제는 ‘생각하지 말고 인식을 하라.’입니다. ‘모든 인간은 감옥에서 태어난다.’는 진실을 인식하고 ‘이 세상은 그 감옥에 머물게 하기 위해 악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허상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이 노력을 하였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 세상의 헛됨을 알게 됩니다.

이 깨달음을 위해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사탄은 우리 머릿속에 어두운 기운을 불어넣어 생각이라는 매개체로 우리를 지배합니다. 생각은 사탄이 나를 얽어매는 포승줄입니다. 생각을 많이 해서는 절대 이 세상의 허구성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더 집착하게 됩니다.

생각을 끊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광야’로 나아가야합니다. 광야는 생각할 거리가 극도로 제한된 장소입니다. 물론 이곳에서도 사탄은 여전히 유혹합니다. 먹는 것으로 유혹하고 높아지라고 유혹하며 더 많이 가져보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받으셨다는 뜻은 예수님의 자아가 사탄일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왜 굳이 40일 내내 악마와 함께 지내셨을까요? 우리도 우리 생각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듯, 예수님도 악한 유혹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라는 이점으로 사탄을 이겨내기는 하였지만 사탄은 다음 기회를 엿볼 뿐입니다.

예수님은 유혹은 받으시지만 그 유혹에 동의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여주시듯 세속과 육신과 교만의 유혹을 말씀의 힘으로 끊어버리십니다. 이를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끊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생각을 끊고 주님의 뜻만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은 광야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세상 안에서도 광야를 살아갈 때 꿈을 꾸는 사람들 가운데 홀로 깨어있는 선지자가 됩니다.

기도는 이렇듯 생각을 통해 오는 유혹을 끊어 이 세상의 흐름과 정 반대로 살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래야 더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며 그 노예생활이 행복이라 말합니다.

매트릭스와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영화가 많습니다. ‘트루먼쇼’나 ‘쇼생크 탈출’과 같은 영화가 그 대표적인데 ‘월-E’란 영화도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역시 미래의 이야기인데 환경오염으로 지구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자 인간들은 아주 커다란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의 환경이 나아질 때까지 지구 밖에서 삽니다. 지구의 고철을 정리하라고 만들어놓은 ‘월-E’라는 로봇만이 수백 년 동안 혼자 지구를 지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사랑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서 조금씩 명령을 어기며 곤충도 살려주고 잡초도 보호해줍니다. 지구상의 기계 중의 유일하게 인간성을 지닌 기계인 것입니다.

반면 우주에 나가 살고 있는 인간들은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매일 의자에 앉아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기계보다 더 기계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땅을 버리고 왜 우주를 떠돌아야 하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그저 그렇게 정해졌으니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지구에 식물이 자라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렇게 살았기에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믿습니다. 기계지만 유일하게 인간적인 ‘월-E’라는 고철로봇이 그들을 다시 지구로 초대합니다. 이 월-E를 만나는 장소가 광야이고 그 만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려고 순응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어야만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도시가 아니라 광야로 나오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광야는 교회이고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내 생각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한 편으로는 “내 생각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밀려올 때 그냥 “에이, 몰라!”라고 외치셔야합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교만해지고 육체적이 되고 욕심이 커집니다. 생각을 없애는 훈련을 많이 해야 어린이처럼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이 없어져서 막상 힘을 써야 할 때 쓸 수 없게 됩니다. 기도는 생각을 끊는 근육을 키우는 운동과 같습니다. 생각을 끊고 싶을 때 끊을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해방의 길입니다. 생각이 좋은 것이라 믿는 것에서부터 죄가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도 뱀과 대화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 여겨 죄에 떨어졌습니다. 생각 자체가 유혹임을 잊지 말고 생각을 끊는 연습인 기도를 꾸준히 해야 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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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2019년 3월 10일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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