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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혹
조회수 | 2,101
작성일 | 07.02.24
사람들은 유혹을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타인들로부터 받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즉 유혹이 주체이며 유혹을 받는 인간 자신을 객체라고 생각합니다. 유혹이 적극적으로 도전해오기에 우리 자신은 그것과 싸워서 이겨내야 승리할 수 있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 유혹에 빠졌을 때 모든 탓을 외부로, 타인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때로는 그와 동시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아비판을 하는 오만한 겸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주객이 전도된 잘못된 사고입니다. 유혹을 받는 우리 자신이 주체이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객체일 뿐입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의 희망과 원의와 욕망과 욕구의 투사체일 뿐입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 유혹의 원천입니다. 자신이 그 무엇인가를 희망하고 원하고 욕망하고 욕구하고 있기에 그 유혹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유혹은 마치 되돌아오는 메아리이며 거울 속에 투영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악마와 우리 자신이 보기에 유혹이 되는 요소였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원하셨던 것은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우리의 구원이었습니다. 현세의 구원, 내세에서의 구원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악마의 유혹은 유혹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 아닌 유혹에 자신을 내어 맡겼습니다. 유혹을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김이 빠진 악마는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신(神)이 아니기에 그리고 현세를 살아가기에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혹이 없다면 그 삶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삶입니다. 유혹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예수님처럼 그것을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 유혹은 우리의 희망이고 원의이며 우리가 바라고, 갈구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유혹과 맞서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혹이 이루어졌을 때, 유혹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선택입니다. 이 유혹을 어떻게 사용하고, 활용하느냐가 그 관건입니다. 유혹을 자신만을 위한 것 그리고 유혹을 더 많이 쌓아 올리는데만 열중할 때 이것은 악마의 유혹이 되고 우리는 유혹의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유혹을 정당하고 올바르게 그리고 타인을 위해 사용할 때 이것은 희망이 되며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악마의 유혹이 아닌 신(神)의 유혹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마지막 유혹을 이겨내시고 자신을 바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우리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겨낸 유혹은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라 가슴 떨리는 희망의 전율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혹에 빠지고, 말고가 아니라 그 유혹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실로 유혹은 가슴 떨리는 희망의 전율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변화로의, 발전으로의, 성숙으로의 도전입니다. 인간은 유혹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유혹이란 매개체 없이, 유혹이라는 희망 없이 인간은 도전할 수 없습니다. 유혹의 다른 단어는 바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되고자 하는,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희망이며 염원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유혹을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혹 안에서 희망을 끄집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유혹 속에서 살아가는 사명일 것입니다.

▶ 김규엽(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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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의 여정을 시작하며

지난 수요일,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정화의 시기, 사순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본래 사람은 생명을 움솟게 하는 흙의 존재임을 잊지말 것을 사순시기는 우리에게 강조하여 일러줍니다. 참으로 사람이 흙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희망의 싹을 틔우며, 구원의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향한 참회의 시간에 초대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유혹은 우리가 현세를 살아가면서 밀쳐내려 하지만 항시 맞닥뜨리는 따끈따끈한 유혹인 것 같습니다. 빵, 권세, 영광, 그리고 명예는 불편함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기꺼이 수락하는 유혹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의 편리에 의해 죽어가는 생명들을 생각하며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저만의 감상적인 생각일까요?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4대강 사업이 한 치의 뉘우침 없이 아주 조용하게 점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현실에서 “죽음의 문화를 넘어서 생명의 문화”(‘생명의 복음’ 요한바오로 2세 회칙)를 생각하는 것은 왠지 짠한 생각이 듭니다.

지난 가을, 본당 배수·교육관 마감공사를 했습니다. 물이 잘 흘러갈 수 있게 해주는 아주 단순한 공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 속 그 깊이를 알 수 없듯 물길 속도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성당은 물이 참 많은 동네에 있습니다. 그래서 온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당 뒷편 십자가의 길 밑에는 운동장이 있는데 그곳에는 옛날부터 우물이 두 개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마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우물물이 한 지류는 자연스럽게 마을 배수로로, 또 다른 지류는 성전 뒷마당을 습지로 만들어 교육관과 성전을 위협하였습니다. 아뿔사! 서둘러 공사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물물을 이용해 작은 연못도 만들고, 돌담을 쌓아 흙의 흘러내림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많은 양의 좋은 나무들을 많은 분들이 고운마음으로 봉헌해 주셔서 성전 앞 성모상 뜰에는 반송, 연산홍, 목백일홍, 소나무를 심었고 교육관 옆으로는 살구나무, 벚나무도 심었습니다. 성전 뒷편에는 서어나무, 산딸나무, 이팝나무, 산사, 매실, 탱자나무도 심었답니다.

돌, 나무, 연못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지만 나무를 옮겨 심는 일은 더욱 힘든 일이더군요. 또 하나의 생명을 키우고 북돋우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뿌리 하나 상하지 않게 분을 뜨는 일, 잘려나간 뿌리만큼 가지를 쳐 주는 일, 음지와 양지를 찾아 나무의 성질에 맞게 흙을 파고,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물을 주는 일들 모두가 아름다운 창조 행위 같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합니다. 성전 주변을 정리하고 우리만 바라보기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 그 아름다움을 함께 하고자 감사 음악회를 열어 많은 분들을 초대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꾼 아름다움이 가시 돋친 이 엉겅퀴 세상을 구원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순의 여정을 시작하며 힘이 아주 많이 들더라도, 유혹이 꼬리를 물고 생명 파괴를 조장해도, 생명 살리는 일에 있는 힘 다해 살아 보았으면 합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자 힘쓰며 올 봄에는 꽃씨를 듬뿍 뿌려 볼까 합니다.

▶ 박병훈 요셉 신부
  |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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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우리는 머리에 재를 받고 올해의 사순절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순절(四旬節)이란 글자 그대로 40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만 우리가 부활 대축일 전 40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한 숫자만의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정화의 시간, 참회와 속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죄로 더럽혀진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40일간 밤낮으로 비를 내리셨고, 탈출기에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백성이 약속된 땅 가나안에 가기 위해 40년간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을 때도 40일간 시나이 산에서 금식 기도를 하며 자기 정화의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 기도를 하시며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세 가지 형태로 유혹합니다. 곧 자기의 주린 배를 채우려는 유혹, 남을 제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은 유혹, 자신을 높이려는 유혹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유혹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처럼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치심으로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시어 유혹을 극복하는 방법을 깨우쳐 주십니다.

첫 번째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로, 오랫동안 음식을 들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몹시 배가 고프십니다. 먹을 수 있다면 돌이라도 삼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빵의 유혹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는 말씀으로 강렬한 유혹을 물리칩니다. 빵의 유혹을 극복하는 방법은 절제입니다. 사순절기간 특히 금식으로 절제의 덕을 길러야만 진정한 절제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저 나라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로 권력과 부귀영화에 대한 강렬한 유혹입니다. 인간은 더 많은 재물을 갖고 싶어 하고, 출세하여 다른 이 위에 군림하여 남을 부리고 싶은 권력의 욕망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면서 권력과 재물을 우상시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우리가 믿고,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분은 주님뿐이시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유혹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과신을 하게 하는 교만과 자만심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스타가 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욕망은 자신의 과욕과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라며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이 같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은총입니다. 철저한 믿음, 어떠한 처지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만이 유혹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어느 시기보다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절제와 겸손, 나눔 그리고 믿음을 굳게 하는 시기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할 때 유혹이 넘치는 이 세상은 축복의 은총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인천교구 이학노 신부
  |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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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붕어빵 파는 아저씨에 관한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붕어빵을 사기 위해 동네 붕어빵집에 들어갔는데 ‘3개에 1,000원, 1개에 300원’이라는 가격표를 보게 된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3개에 1,000원이면 하나에 333원꼴인데, 한 개를 사면 300원으로 더 가격이 싸기 때문이지요. 보통 많이 사면 가격이 더 내려가는 것이 정상인데, 이 붕어빵집은 오히려 낱개로 구입해야 가격이 더 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붕어빵 주인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답니다.

“아저씨, 가격이 이상한데요. 많이 사는 사람에게 싸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에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붕어빵을 하나씩 사먹는 사람이 더 가난합니다.”

붕어빵 사먹을 돈 천 원이 없어서 한 개밖에 주문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위한 주인아저씨의 배려인 것입니다.

어쩌면 넉넉한 물질을 채우고자 하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가능한 장면이고, 그래서 감사한 장면입니다.

우리의 관점이 과연 어디에 맞추어 있을까요? 내가 어디에 관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도 또 반대로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복음은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하신 유혹은 우리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유혹입니다.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이었지요. 40일간 단식 후에 얼마나 배가 고프셨겠습니까? 그 순간 예수님께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배를 채우는 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유혹의 문제는 빵을 만드는 방법에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자신의 불편함을 쉽게 얻게 하는 것, 욕구를 즉시 채우고자 하는 유혹. 이것이 악마의 첫째 유혹이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악마만 잠깐 경배하면 나중에 굳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필요도 없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권력 투쟁을 떠올려 보십시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의 희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마지막 유혹은 기적을 바라는 유혹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적. 이처럼 우리들은 내 자신에게 신비로운 일이 생기기를 바라고, 놀라운 일들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져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만을 바라는 유혹인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들에서 자유로워야 악마와 함께 하는 삶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 물질의 관점이 아닌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유혹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유혹에 자유로우십니까?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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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하느님의 흔적이 됩시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남긴 흔적을 통해 바람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에 따라 ‘시원한 바람’, ‘매서운 바람’, ‘고마운 바람’, ‘미운 바람’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느님 또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과 섭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중 예수님은 하느님의 가장 큰 흔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우리는 사순시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흔적이신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며 부활이라는 영광의 희망을 보여주시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의 첫 번째 주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유혹은 우리가 현세를 살아가면서 멀리하려 하지만 항상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끊을 수 없는 유혹인 것 같습니다. 빵, 권세, 영광, 그리고 명예는 불편함 없이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기꺼이 수락하는 유혹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유혹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함’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라는 성경 말씀을 들어 악마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사명은 악과의 끝없는 투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흔적을 당신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사순시기에 우리가 살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다가왔던 이 유혹은 우리에게도 늘 다가오는 끝나지 않는 과제인 듯합니다. 악마는 늘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그 모범을 배우고 그 길을 따릅니다. 바로 그 흔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흔적을 찾고 그 흔적을 살아가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흔적으로서 예수님처럼 유혹을 이기고 말씀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악과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갖은 유혹을 극복하는 사순의 삶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며 우리가 하느님의 흔적이 되어야 합니다. 매섭고, 밉고, 이기적이고, 불일치의 흔적이 아닌 아름답고,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흔적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하느님을 알릴 수 있는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이번 사순시기에 나의 모습을 그분, 그 바람에 실어 보았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김정수 사도 요한 신부 : 2016년 2월 14일
  |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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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어떤 수업에서 리포트를 제출하는 과제가 있어서 저는 도서관에 있는 여러 가지 책들을 보면서 리포트를 작성했지요.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준비를 했기에 잘 쓴 리포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리포트를 제출하고 다음 수업시간에 교수 신부님께서 저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이단이냐?”

글쎄 리포트의 내용에 초대교회 때 심각했던 이단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저학년이었기 때문에 신학적 지식이 부족했었고, 그 부족한 지식 때문에 초대교회 때의 이단을 지지하는 듯한 내용이 리포트에 담았던 것이었지요. 이런 어리석은 모습은 고학년이 되어 가면서, 그리고 사제가 되어서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학을 배워가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교회적이지 않은 부분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대신 그 안에 담겨 있는 좋은 의미만을 골라서 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악마의 유혹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즉, 주님을 도저히 모르는 분으로 만들어서 주님의 뜻에 반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악마의 유혹인 것이지요. 이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기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절로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어떤 유혹도 거뜬하게 이겨냅니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는 유혹의 순간에서도 주님을 만나고 또 주님의 뜻을 찾으면서 기쁨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시지요. 광야는 어떤 장소입니까?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부족한 장소입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부족한 것들이 많은 곳에서 40일 동안이나 단식까지 하고 계십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가득한 최악의 상황입니다. 이때 악마의 유혹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어렵고 힘든 유혹이라도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실천이 있다면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음을 예수님 스스로 직접 보여주십니다.

악마의 유혹은 언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즉, 언제 주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또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했을까요? 미사 가기 전에 갑작스럽게 급한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때만 되면 더 피곤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죄지은 사람이 더 잘 사는 모습을 보면 왜 이렇게 불공평하다는 생각과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성당에 잘 나오면 무조건 좋은 일만 생겨야 할 것 같은데,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될까요? 왜 이렇게 세상에는 가지고 싶은 것들이 많을까요?

악마의 유혹은 매순간에 내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처럼 최악의 상태도 아니었는데도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갔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주님의 뜻에 맞춰 살려는 노력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봅시다.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 유혹이 다가올 때 과감하게 그 자리를 피하는 것,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역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들이 될 수 있겠지요. 또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 참으로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렸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2월 14일
  |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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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分知足’(안분지족).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며 만족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지족(知足)에서 족(足)은 구(口)와 지(止)가 합쳐져서 생긴 글자다. 그래서 지족은 지지(知止), 즉 멈출 바를 아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만족은 탐욕과는 다르게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것인데 이때 중요한 것이 ‘멈춤’이다.

탐욕은 멈출 바를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여유가 없다. 탐욕은 인간이 갖기 쉬운 하나의 맹목이다. 맹목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의 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적인 것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탐욕 하는가를 물으면 특별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것은 브레이크가 망가진 내연기관과 같다. 그러한 엔진은 연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탐욕 역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는다면 멈추지 않고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장자(莊子)가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기심(機心), 즉 기계적 마음이라고 부른 것이나 유가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학(大學)에서 참다운 선(善)에 이르는 것의 시작으로 ‘멈출 바를 아는 것’(知止)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오늘 독서나 복음은 인간이 갈 수 있는 최대 지점이 결국 자신이 발(足) 붙이고 있는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각성시키는 듯 보인다. 멀리, 높게 우리의 이상을 설정하지만 그 긴 여정에서의 종착역은 결국 자신의 발 아래다. 되돌아옴이다. 특별히 사도 바오로는 오늘의 제2독서 부분에 해당되는 구절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그러나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누가 하늘로 올라가리오?’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고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또 말합니다. “‘누가 지하로 내려가리오?’ 하지 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모시고 올라오라는 것입니다.”(로마 10,6-7)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오늘 제2독서의 첫 구절이다.

“의로움은 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로마 10,8)

믿음의 말씀은 저 하늘 높이 있거나 저 땅 깊숙한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에 있다고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복음의 말씀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대신 성취되거나 혹은 고원(高遠)한 곳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성취되고 있고 또 그래야 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과 관계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가끔 평범한 일상과 매우 다른, 신묘한 체험이나 환영을 높은 신앙의 경지로 여길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물론 특별한 소명으로 인해 이러한 체험이 허락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가 사이비(似而非)인지 아닌지는 그들의 깨달음이나 신적 체험이 일상을 긍정하게 만드는지 부정하게 만드는지를 통해 가려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이비들은 멈춰야 할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점에서 탐욕스럽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저버리고 떠나 있던 지난날들, 다시 말해 자기의 분수를 망각하고 우쭐대던 과거를 반성하고 세상의 참된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회심(回心)이라 부른다.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悔改)라고 부르는 말의 어원도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에 있다. 하느님의 길을 가는 것, 그래서 신(神)적인 일의 시작은 탐욕이라는 기계적 맹목에서 멈추는 것(止)부터다.

명나라 때 일부 유학자들은 이 멈춤의 순간을 기(幾)라고 불렀다. 일종의 전환점이다. 그들은 이 기를 우주의 운행원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까지 칭송했다. 지나간 과거의 악습, 혹은 기계적 생활에서 마음을 내는 일이 바로 멈춤이다. 물론 이 멈춤은 멈춰 서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멈춤은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시작이고 그래서 첫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일궈 내는 값진 신앙의 삶은 회개해 돌아섰던 그때의 마음, 즉 첫 마음과 동일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덕담으로 자주 등장하는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결국에는 생각 없이 가던 길을 멈추자는 이야기며 회개하자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40일간의 수행을 마치고 마지막 관문에 도달했다. 복음은 수행의 전 과정은 생략한 채 마지막 유혹 과정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다. 이 유혹이 마지막에 있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최후를 의미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그것이 가장 끊기 어려운 유혹임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오늘 직면한 유혹은 말 그대로 유혹이다. 당신이 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단순하게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은’ 일종의 멈추지 않는 충동을 보여 준다.

극도의 허기짐에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은 그 주안점이 허기를 채우는 것에 있지 않다. 거기에는 궁핍을 해결하는 것과는 무관한,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자리한다. 정말 배가 고프다면 수행을 마치고 가족들과 음식을 들면 그만이다. 세상을 모두 소유하도록 유혹하는 속삭임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다 얻은 다음 도착하려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것을 묻지 않는다면 그것을 다 소유한다 해도 새로운 욕망이 생겨날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다.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상처를 입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질적 특성은 하느님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는 데 있다.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도구화하는 것이다. 사실 참된 생명이란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멈추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결국 예수님께 던져진 유혹들과 그것에 대한 극복은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일종의 멈춰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지난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40일간의 극기와 절제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40일을 의미하는 사순절(四旬節)은 이스라엘의 광야체험과 예수님의 사막체험을 현재화하는 행위다. 이 두 체험은 결국 우리가 멈춰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멈출 줄 알아야 만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열심’을 가장해 제어하지 못했던 탐욕은 없었는지 잠시 숨을 돌리고 멈춰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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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서강휘 신부 : 가톨릭신문 2019년 3월 10일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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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예수님 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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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어떤 분이 “미사 중에 신부님이 거양성체를 할 때, 성체는 보이지 않고 신부님의 얼굴만 보여요.”라고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성체에 집중하면 제 얼굴이 보이지 않고 성체만 보일 겁니다. 그러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편안해지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거예요.”라고 했던 적이 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기도하시는 중에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악마는 예수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루카 4,3) 그리고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루카 4,7) 마지막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 4,9)라는 말로 세 번이나 유혹한다. 특이하게도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하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나에게 절을 하면’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다.

악마는 예수님께서 돌로 빵을 만들거나, 성전 꼭대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질 때 천사가 받쳐주는 것과 또 악마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에 꿈쩍도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는 그런 요구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예수님은 악마가 요구하는 것으로 정해지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더 갖기 위해, 더 많은 능력을 갖추기 위해, 또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아왔다. 이런 것들이 내 삶의 목표인 양, 앞만 보고 달렸던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런 일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아들이셨던 것처럼,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무엇을 많이 소유하거나, 또 남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하는 문제가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무엇을 잘하거나, 무엇을 많이 갖고 있거나, 내가 인정을 받고 있거나에 상관없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보자. 오직 예수님만 보이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고, 소유나 능력, 남의 인정을 받는 것에 나를 맡기지 않는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정성껏 사순절을 지내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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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태헌 요셉 신부 : 2019년 3월 10일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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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습관처럼 해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시간도 습관이고, 성당 가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도 습관처럼 이루어집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 책을 펼쳐 읽는 것도 습관처럼, 무료하거나 힘들면 자연스럽게 졸고 있는 제 모습도 습관처럼 일어납니다. 이렇게 습관이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습관이 자신의 몸에 배어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 습관이 행복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습관도 참 많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죄의 유혹에 빠지는 습관입니다. 순간의 쾌락에 끌려서, 또한 인간적인 나약함에 흔들려서 죄로 기울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경우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죄로 나아가는 습관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습관이 바로 빈도를 높이는 가장 좋은 길이고 결국 행복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행복의 삶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유혹을 당하십니다. 사십 일 동안의 유혹, 더군다나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라는 것은 유혹에 넘어가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악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유혹하기 시작하지요. 첫 번째는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입니다. 40일 동안 굶은 상태에서 먹을 것은 가장 큰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라면서 물리칩니다. 두 번째는 자신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면서 극복하십니다.

운동 경기를 볼 때, 많은 이들은 아무리 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역전승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마 악마도 이를 노렸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 2:0의 완패 중이지만, 마지막 한 번만 이기면 결국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예수님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던집니다. 바로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몸으로 밑으로 던져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은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실 예수님으로써는 이 자리에서 자신을 알린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악마는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바로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이겨내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말씀만이 나쁜 습관으로 이끄는 죄를 극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서 좋은 습관,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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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9년 3월 10일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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