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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유혹을 이겨내신 예수님
조회수 | 2,105
작성일 | 07.02.24
신앙 안에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새롭게 사순시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마에 재를 바름으로써 흙으로 빗어 만들어져 언젠가는 다시 흙으로 돌아갈 우리의 처지를 깨닫고, 헛된 욕망이나 아집을 버리고, 희생과 극기를 통하여 우리가 저질렀던 잘못을 보속하기로 결심하셨을 겁니다. 이러한 참회와 속죄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게 되고, 아울러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 첫 주일인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들과 시련들을 경험합니다. 만일 신앙이 없다면 그런 유혹이나 시련들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의미 없는 것들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둔 우리들은 그런 유혹이나 시련들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첫 창조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두 번째 창조의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삶에로 끌어올리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는 이러한 시험과 유혹이 불가피하게 따릅니다. 이사악의 희생을 요구 받았던 아브라함이 끝까지 하느님께 믿음으로써 순종하고 의탁함을 통하여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창세 22 이하).
이집트를 벗어났지만 사막에서 배고픔과 갈증에 허덕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픈 유혹에 빠지게 되고 결국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한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파스카를 체험하고 약속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당하신 유혹과, 피땀을 흘리실 만큼 괴로운 갈등을 동반한 최후의 유혹(루가 22,39 이하)을 이겨내시고 당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하시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시험과 유혹을 받는 것을 용인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이나 시련에 빠져 죽음을 맞게 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이겨내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유혹을 이겨내신 예수님,
그분은 죄 이외에는 우리와 똑같은 처지의 인간이시지만 유혹을 이겨내심으로써 우리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이번 사순시기를 통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가 22,40.46)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순간순간 맞게 되는 유혹과 시험에 대하여 먼저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서 당당히 맞서도록 합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 장세명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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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사순 시기는 부활 전 40일을 말합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부활축일을 앞두고는 사흘 동안 단식과 기도에 전념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고 부활하신 그분의 생명이 자기들 안에 흘러들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4세기 초에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이 사흘은 40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 동안 단식하고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였습니다. 유혹 받으신 장소를 ‘광야’, ‘높은 곳’,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 등으로 바꾸면서 이야기를 다채롭게 꾸몄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예수님이 평소에 겪으셨던 유혹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들이 살면서 또한 겪어야 하는 유혹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빵’이라는 말로 표현된 재물이고, ‘권세와 영광’이며, 또한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실제로 주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악마는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탐하는 것을 주어서 그들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행동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마르 14,38). 예수님은 “이 잔을 가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 악마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유혹의 이야기에서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먹고 사는 것, 곧 재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 신명기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그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 산다.”(8,3). 예수님은 먹거리로만 사는 인생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빌어 붙여서 재물을 얻어 소원 성취하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유혹의 두 번째 장면에는 악마가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여주며 악마는 말합니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은 신명기(6,13)를 또 인용하여 답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인간은 권세와 영광을 얻을 수 있으면 비굴하게 행동합니다. 기쁨조 노릇을 하며 추태도 부립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소신도 버리고, 탈당, 창당, 입당을 예사로 하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봅니다. 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날렵하게 처신하고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는 엎드려 절합니다. 그 권력을 가진 자가 함량미달의 사람이라도 좋고 악마라도 좋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도 하느님에 대한 소신을 버리고 권력과 영광을 가진 사람에게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부귀와 영화를 탐하여 아무 데나 엎드려 절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세 번째로 예수님에게 권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6,16) 말씀을 또 인용하여 거절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인 것은 예수님 안에 초능력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람들이 시적을 많이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적 안에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기적하시는 예수님의 초능력이 아니라, 그분 안에 보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입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지, 먹거리나 권세와 영광 그리고 기적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인간이 탐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일이지, 하느님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먹거리와 재물을 위해, 혹은 더 큰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 그리고 부귀영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하느님을 동원하여 그런 것을 얻어 내겠다는 유혹이 빠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특정 인물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어서 따로 데리고 놀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신앙인은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자기 한 사람 잘 되고 보겠다는 이기심의 유혹에 빠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따뜻함이 배여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 생명은 부모와 가족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재물도, 권세도, 초능력도 좋은 것이지만, 그 안에 하느님의 온기(溫氣)가 배어있지 있지 않으면, 인간 사이에 차별과 불화와 냉혹함을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차별과 냉혹함을 없애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온기를 우리의 삶 안에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무자비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무자비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고, 지키고, 바치기 위해 악을 쓰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류역사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온기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상징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온기를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소원을 성취하겠다고 열심히 기도하고 권력과 영광을 얻어 보겠다고 비굴하게 엎드려서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은 초능력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일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자기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의 온기를 자기 주변에 살려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길입니다.

▶ 서공석 신부
  |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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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이겨내는 삶

사랑은 그대들에게 왕관을 씌워주지만 고통의 가시관을 씌우기도 합니다.
사랑은 그대들을 자라게 하지만 그대들의 가지를 쳐내기도 합니다.
사랑은 그대들의 꼭대기로 올라가 햇살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그대들의 가장 연한 가지를 어루만져주지만,
그대들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뽑힐 정도로 뿌리를 흔들어대기도 합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있는 글입니다. 처음 연애를 하는 연인들은 사랑이 마냥 설레기만 합니다. 마냥 좋고 달콤할 것만 같고, 웃음만을 가져다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속에 커다란 가시를 숨기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그 가시가 솟아나와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찔러대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성경의 코헬렛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찾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다’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하나는 붙잡고 싶지만, 다른 하나는 피하고만 싶고 멀리하고만 싶습니다.
하지만 멀리하고 싶어도 멀리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림자는 항상 우리를 따라 다닙니다. 빛이 있는 한 그림자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이를 피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둠을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착각에 쉽게 빠집니다. ‘나에게는 그런 어두운 순간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런 착각을 합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냐고.’ 하지만 둘 다 우리의 착각일 뿐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어둠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어둠 속으로 뛰어드셨습니다. 광야라는 그 어둠 속으로 몸소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겨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어둠을 부정하기만 하고, 멀리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이겨내야만 합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이번 사순 시기에는 어둠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도록 해 봅시다.

▶ 박태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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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박을 차는 사람은 더러더러 있고 대박을 터뜨리는 이는 아주 드물게 있다. 쪽박을 차는 순간 죽을 것 같은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 점차 안정을 찾으며, 고맙게도 인체의 면역체계는 그를 버려두지 않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하고, 땅끝까지 억눌린 마음도 점점 상승곡선을 그리며 어떤 처지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을 되찾는다.

반면 대박을 터뜨린 아주 드문 사람은 하늘까지 치솟는 유쾌함과 삶의 환희가 목젖의 끝까지 밀려와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든다. 주님께서 주신 이 선물에 감사하고 기쁨과 영광이 가득한 축복에 감읍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대박은 아주 드물게 터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박의 기쁨과 감동은 점차 흐려지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기쁨과 감사함을 찾지 못하고 또 다른 대박에 목말라 한다. 대박의 불행이, 승자의 저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박은 그 위세로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한몸에 받는 듯하며 선택되고 뽑힌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득히 높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그 발이 돌부리에 차일세라 보호하고 지켜주시리라 생각한다.

그는 ‘절대 반지’를 낀 것처럼, ‘완장’을 찬 것처럼 남의 아픔에 둔감하고 자기 자신만의 생각이나 자신의 체계를 굳건히 하며 끊임없이 주위 사람을 의심하면서 자신만이 천하무적이 된다. 소위 하느님 콤플렉스(God Complex)로 자신은 우월존재, 자기 판단을 절대시, 자신을 대중의 구원자로 의식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척하다가 결국에 자기 의견만 쏟아내면서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것이다.

이 대박에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단 몇 마디 말씀으로 명쾌하게 대응하시고 그를 쫓아버리셨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지만 그것은 복음서를 통시적(通時的)으로 읽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활과 연결하여 공시적(共時的)으로 읽으면 이 유혹자는 마지막 십자가까지 주님을 시험한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절망적인 외침으로 유혹자를 물리치신다.

우리의 조상은 떠돌아다니던 보잘것없고 약하고 비루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자신 또한 사회악에, 부조리에, 대박의 철권통치에 그야말로 쪽박의 처지인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이런 쪽박들을 같은 쪽박이신 주님이신 예수께서 친히 위로해 주시고,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쪽박을 이겨낼 힘을, 면역체계를 주셨다.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고 눈물은 마르는 법이다.

부산교구 이택면 신부
  |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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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광야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40일간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광야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으로 사람이 생활하기 힘든 곳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모세와 하느님께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하였습니다.“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 3)“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탈출 17, 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물과 음식의 부족으로 하느님을 불신하고 하느님께 불충실했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광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보호하고 이끌어주시며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는 분임을 체험한 장소이기도 합니다.(구름, 불, 만나, 메추라기, 구리뱀 등)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광야는 시련의 장소이자 동시에 하느님을 체험했던 장소였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광야는 바로 우리가 생활하는 삶의 터전, 바로‘여기’이기도 합니다. 내가 사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시련에 하느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때로는 불평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심을 깨달았을 때 하느님께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내가 사는 이곳이 또 다른 광야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하느님은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라고 느끼며 절망에 빠졌을 때, 예수님도 시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유혹자가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을 통해 그 유혹을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만일 유혹에 빠졌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느님 말씀을 가까이해야겠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신명 8, 3 참조)“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 13 참조)“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 6, 16 참조)

▥ 부산교구 장민호 신부 : 2016년 2월 14일
  |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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