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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
조회수 | 2,474
작성일 | 07.03.0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조용히 참회와 보속을 하는 시기에 영광스러운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루가복음은 사순시기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파악하도록 해주고 있다.

복음: 루카 9,28-36: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였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분위기로 이끄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기도’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28-29절). 여기에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 기도가 그 영광스러운 변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 루가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기도의 주제가 바로 이 사순시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순절의 의미가 기도의 표지 아래서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열렬히 타오르는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복음에서는 단순하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30절)는 사실만 전해주고 있는데 반해, 루가 복음은 두 인물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31절). 여기서 ‘죽음’이라고 한 말은 원문으로 ‘exodos: 출애굽, 대탈출이다. 즉 결정적인 해방과 약속의 땅을 향한 출애굽의 모든 주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은 출애굽 사건과 같이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고있는 고달픈 여정이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여정을 반복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는 사순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세 사도들의 졸리운 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내용이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거기 함께 서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32절). 그리고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34절)고 한다. 이 구름은 특별한 신적 현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즉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은 수난과 수모를 당하시겠지만 이분이 한결같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아들’(35절)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 위에 죽음을 당하시지만, 그분은 산에서 보여주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아 그 고통과 괴로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변모’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예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의 빛을 위한 것으로써,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택하신 아들’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예수께 일어났던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신앙을 통해 아브라함이 변화되고 그의 자손들이 은총을 입었듯이 그처럼 변모되어갈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딸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35절)는 말씀을 잘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약속된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이미 그 영광을 미리 내다보고 있고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35절) 즉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에 그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광야와 같은 이 사순절은 어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목적지에 미리 도착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부활의 신비를, 영광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될 때, 진정 빠스카 신비의 완성인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제2독서: 필립 3,17-4,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변화시켜주실 것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들의 생활에서 고달픈 십자가를 회피함으로써 사순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벌써 여러 번 여러분에게 일러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18-19절). 즉 갈바리아를 향한 여정이 없다면 빠스카의 기쁨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의 시민으로서(20절)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변모의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매일매일 변화시켜 가는 삶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춤으로써 신앙 안에서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묵상한 바와 같이 이 사순절이 바로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룰 수 있는, 그래서 우리가 합당하게 빠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의 열심한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그 변모를 이룰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20-21절). 나 자신의 참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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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오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러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종종 우리는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거나,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산에 오르는 과정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고3 수험생에게는 대학 진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직장을 구하는 것이, 대부분의 부부들에게는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노년의 고독을 마주하는 어르신들께는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거대한 산을 마주하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도 산을 대신 올라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자신의 두 발을 한 걸음씩 내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둘째는 산에 오를 때, 혼자보다는 두 명 이상이 함께 오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숨이 턱에 차서 이제 산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 순간, 함께 오르는 동반자는 정상에 오르는 데 생각보다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신앙생활의 여정을 산에 오르는 과정에 비유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점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사랑 실천이 우리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따라 생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둘째,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두 발로 끝까지 전진해야 하듯이, 신앙생활도 우리 각자가 자신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건강을 위해 교회가 아무리 많은 방법을 제시해도 본인이 실천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제자들이 함께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랐듯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영혼이 건강하도록 돌보되, 교회 공동체와 함께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은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세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인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는 교회가 제시하는 길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 동안 이루어지는 우리의 희생과 절제의 생활을 통한 이웃 사랑의 실천은 복음을 위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죽기까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사랑, 그분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은 오늘 복음에서 만난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르는 여정입니다. 이 여정에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서동조(유스티노) 신부
  |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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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1991년 3월 미국 LA의 한인 슈퍼마켓에 한 흑인 소녀가 찾아옵니다. 주인은 소녀가 음료수를 가방에 집어넣는 것을 목격합니다. 계산대 앞에서 당시 49세였던 여주인은 소녀의 가방을 확인하려하자 덩치 큰 소녀는 주인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 쓰러뜨립니다. 주인은 일어나면서 숨겨두었던 권총을 들어 소녀를 쏘았고 소녀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이 슈퍼마켓은 흑인들의 도둑질과 강도질 등으로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맞는 순간 소녀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재판에서 주인은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풀려납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동안 흑인 강도가 많았기 때문에 피고가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이것이 판결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망한 16세 소녀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었고 음료수를 카운터에 올려놓고 돌아서는 순간 총을 맞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무기 대신 음료수 값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 일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한인 타운 90%가 파괴되었으며 그 피해액은 3억 5천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흑인들이 그런 강도짓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소녀까지 강도로 착각한 것이 사회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혹은 바라는 대로 보게 됩니다. 사람은 착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커다란 진실을 놓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합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십니다.

사실 이런 착각은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착각입니다. 누구도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에게 이 착각을 깨 주기 위해서 그를 타볼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진실을 보여주십니다.

얼굴이 변하고 옷이 빛나고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탈출기(출애굽)에 관한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그 영광스런 모습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천막 셋을 지어 그 영광에 안주하고자 합니다. 행복한 곳이 있으면 그 곳에 머물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함께 하고픈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마음을 가졌었지만 실제로 예수님께서 대화하시던 내용은 영광이 아니라 고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탈출기란 파스카를 정점으로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구원되고 종살이 땅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얻게 됨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죄와 두려움의 종살이하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어린양으로 예루살렘에서 피를 흘려야 한다는 의미이니 그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영광 속에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박해와 고통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 올라가 하느님을 만나 십계명판을 받습니다. 그 십계명판은 하느님과 인간의 계약으로써 그 십계명을 지키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사랑하시겠다는 구원의 계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계명판을 들고 내려온 모세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섬기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화가 나서 십계명판을 깨어버립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법이 아니라 황금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 우상을 부수어 백성들이 갈아마시게 한 이후에야 다시 시나이 산에 올라가 새로운 십계명판을 받아 내려옵니다.

‘십계명판’은 하느님의 말씀이 돌에 새겨진 것으로써 바로 육체를 취하신 하느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내려왔지만 사람들은 그 분을 원하지 않았고 세상 것만을 원했기 때문에 그 분은 모세가 십계명판을 부순 것처럼 세상에서 한 번은 부셔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과 마찬가지로 예언되어 있는 예수님의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계약을 위하여 내려오신 ‘계명’이고 그 ‘계명’은 우상숭배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왕비와 백성들에게 쫓겨 다니는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엘리야역시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신을 숭배하는 예언자들과 대결을 펼친 일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갈멜산에 야훼 하느님의 예언자 대표 엘리야와 우상을 섬기는 수백 명의 예언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이 시합을 했는데 송아지를 잡아 장작 위에 놓고 어떤 신이 불을 내려 그 송아지를 살라버리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송아지를 잡아 장작위에 놓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오가 지나자 엘리야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놓고 그 위에 물까지 흠뻑 부었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드리는 시간(오후 3시)이 되자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드렸고 이윽고 하늘에서는 불이 떨어져 제물을 살랐습니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크게 놀랐고 우상을 섬기던 예언자들은 그 자리에서 엘리야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송아지를 예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시간이 바로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도록 기도한 제물이 바쳐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오후 세시에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피로 깨끗해진 세상에 물로 상징되는 성령님께서 비로소 오시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흥건히 젖어있는 물과 송아지제물 위로 성령의 불이 떨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새로운 계약의 피를 흘리셔야 할 운명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려오시면서 이것을 본 세 명의 사도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하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물론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탄이란 말도 듣지 않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다 고통스런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크게 창피를 당했거나 시련을 당했거나 배신을 당했거나 큰 외로움을 느낀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고통스런 기억들은 우리 마음 안에 남아서 큰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삶을 당당하게 맞지 못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마치 병처럼 자신 안에 퍼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이됩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모든 것들을 왜곡해서 보게 됩니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통은 무조건 행복의 반대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이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피하고 싶다고 삶의 모든 고통을 다 피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결국 타볼산에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타볼산은 진실을 볼 수 있는 장소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진실을 보지 못하고 착각하게 되고 그렇게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묵상해보면 우리가 믿는 많은 현실들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참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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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사순 제2주일을 지내며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관한 성경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준비하며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르십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그 자리와 함께 있던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에게는 그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얼떨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9,33)”하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바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9,35)”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와 함께하는 산 위에서의 삶, 그천국과도 같은 삶을 갈망했지만, 아직 때가 안 되었고 이루어야 할 것들이 있었기에 산 아래의 세상으로 돌아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분명산 아래에서의 삶은 산 위에서의 그것처럼 신비롭고 거룩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와 기쁨보다는 오히려 고통과 갈등, 슬픔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마저도 그 산 위에 머물지 않으시고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삶은 한결같이 낮은 데로만 흐르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변 사람들의 인생과 어우러지는 겸손의 모습, 마침내 십자가에 자신을 내맡기는 죽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진리는 끝없는 자기 비움,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떠남의 삶,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영광스러운 변모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영광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면서도 지상생활의 예수님, 가시관을 쓴 채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 신예수님의 삶은 흔히 잊고 살아갑니다. 영광에 참여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말씀대로 다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신자인 척 자부하고, 진리와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척 자랑하기 이전에 외롭고 가난한 인간을 구하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사순 시기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자기 부정의 험난한 길을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신성남 신부
  |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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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영광의 상처

“영광 뒤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다(There are many wounds behind glory).”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해 나갈 때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기 마련이고, 그러한 어려움이나 고통을 이겨내고 성공을 거두거나 원하는 목적을 이루었을 때,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어려움이나 고통을 ‘영광의 상처’라는 말로 듣기 좋게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이나 그 밖에 스포츠 경기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들의 성공 이야기를 보면, 바로 이 ‘영광의 상처’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음을 보게 됩니다. 고된 훈련과 부상, 좌절과 실패라는 ‘영광의 상처’를 딛고 자신의 목표를 이뤄낸 선수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또한 용기와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변모는 놀라운 일이자, 자신들이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라다니는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자들이 간과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의 본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냥 일어날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영광의 상처’인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는 수난과 고통을 이겨내야만 다다를 수 있는 미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도 못하면서,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라며 지금 당장 모든 것이 끝난 듯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이라고 하는 영광을 희망하며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고는, 이 ‘영광의 상처’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절대로 부활의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는 이 삶에 있어서 그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이것이 ‘영광의 상처’가 되어 자신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에게 이 사순 시기는 절대로 어둡고 슬픈 절망의 시기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때가 가장 큰 축복의 시기이자, 은총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이석재 안드레아 신부 : 2016년 2월 21일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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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기도의 효과를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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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마인드풀 tv’의 운영자가 말하는 명상이 주는 효과입니다. 그녀는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까지 삶이 무너졌지만 신경안정제 하나도 복용하지 않고 명상으로만 자신의 모든 정신적 문제를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명상을 전파하고 있고 구독자수가 상당히 많은 인기 유튜버가 되었습니다. 물론 삶도 매우 생기 넘칩니다.

그녀가 주장하는 명상의 효과는 1. 현실개선, 2. 정신건강을 상승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여줌, 3. 두뇌가 변함, 4. 건강이 개선됨 등입니다. 명상을 주장하는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이 세상을 창조한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 마음 때문에 불안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환경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마인드’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호흡을 가져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함으로써 자아와의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이 명상입니다. 모든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는 무의식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호흡을 의식적으로 하면 무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현대 과학자들이 명상을 많이 하는 티베트 스님들의 뇌를 조사한 결과 전두엽이 다른 사람들보다 발달해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물론 게임만 하고 인터넷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뇌는 퇴화한다는 것도 밝혀냈습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노력하여 발전시키고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분이 좋아지니 스트레스에서 오는 병들을 이길 수 있게 되어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도 맞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이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전 세계의 8세 이하의 아이들이 명상을 교육받는다면 우리는 단 한 세대 만에 전 세계의 모든 폭력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이라고 하는 것 안에 주님의 현존을 넣으면 기도가 됩니다. 명상은 자아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놓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바다는 우리의 잠재의식, 혹은 자아라고 하는데 그 자아에 빠져들지 않게 만드는 것이 명상, 혹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부정적인 본성을 기도를 통해 ‘감사’로 이끌라고 하는 것이 명상과 기도의 공통점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한 일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내 마음을 부정적이 되지 않게 만들면 삶이 훨씬 수월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있건 없건 간에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긍정적 마인드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기도나 명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실은 우리가 창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현실 앞에서 어떻게 긍정적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세상에 내려왔지만 인간은 그분을 무시하고 침 뱉고 십자가를 지우고 조롱했습니다. 이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으셨을까요? ‘기도’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가 어떻게 부정적 현실 앞에서 긍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주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은 기도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 계약과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이 꼭 필요함을 되새기십니다. 기도하면 이렇듯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있는 사람이 닿을 수 없는 높은 진리를 깨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왜 어려운 현실이 닥치는지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래서 현실이 부정적이더라도 그 부정적인 현실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과 그 열매들을 봅니다. 그래서 힘든 현실도 잘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깨닫는 이런 진리들은 우리 자신을 주님의 뜻에 봉헌하게 만듭니다. 마치 빵과 포도주가 봉헌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되돌아오듯 봉헌은 아픈 것이지만 더 좋은 것으로 되돌려주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 자기봉헌이 자신과 주의의 현실을 재창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모습이 환하게 빛나셨듯이 나의 본성이 변화됨을 자신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생각과 하나인 줄 알았지만 생각은 뱀과의 대화였음을 깨닫게 되고 그 어둠에서 멀어지며 빛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선택이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사람보다 생각 없이 즐거운 아이들의 얼굴이 훨씬 환하게 빛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빛났던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은 빛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환하게 변하시는 것을 보고는 그 제자들이 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전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빛나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들은 모세를 보고 하느님의 현존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리더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신 다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더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 책임자의 말을 잘 따르도록 마음을 이끌어주십니다. 기도는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나와 이웃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제가 성지순례 갔을 때 함께 한 인솔자가 사제가 되려다가 나와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결혼하여 아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태중의 아기가 불구로 태어나거나 사망할 것이라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가톨릭신자는 낙태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병원 문 밖에 나오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혼자 기도할 수 있는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 한없이 울었습니다. 신발을 십자가에 집어던지며 심한 욕까지 했다고 합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리 고통을 주시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시지 왜 죄 없는 아이에게 그러시냐고 밤새 소리소리 지르며 울었다고 합니다. 새벽 동이 터 올 때쯤에는 제정신이 들어 이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비뚤어진 십자고상을 바로 세우고 자세도 바로잡고 한 번만 더 도와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아이는 정상으로 태어났습니다.

리더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체 앞에서 일정 시간만 머물러 있으면 먼저 내가 변화되고 그 다음엔 나에 딸린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가족이나 단체를 이끌려는 사람은 리더의 자격이 없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기도로 채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참 리더의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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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9년 3월 17일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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