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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참 맛나는 기도
조회수 | 2,355
작성일 | 07.03.02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기도를 통해서 내 모습이 좋게 변하고, 기도하는 순간이 하느님을 대면하는 기쁜 순간이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수도생활 20년이 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말하자면 관상기도의 맛을 알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쉽게 이룰 줄 아는 기도의 선수이고 싶은 그런 수도사제…. 그러나 아직도 그런 관상기도의 경지는 먼 꿈처럼만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고전적 가르침에 의하면 관상의 은혜는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은혜라고 한다. 나의 노력에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산을 오르셨는데 그들은 잠을 자고 있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뵙게 되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눈으로 직접 뵙는 은혜!! 이제 다시는 주님을 의심하거나, 제자로 부름 받은 것을 후회하지 않고, 자부심과 확신을 갖기에 충분한 은혜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 라.”였다. 비약이 있는 듯한 이 말씀 사이에 있을 법한, 구름에 가려 안 보이는 자막을 마음의 눈으로 읽어 본다.

“베드로야, 영광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란다. 일상 안에서 오늘 본 영광 못지않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마. 그것은 바로 내 아들의 말을 잘 듣는 일이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신비들을 보았다. 이 신비들 중 가장 큰 것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이 예수님의 죽음의 결과로 밝아 왔다는 것이었으며, 또한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당시 이 신비를 믿을 만한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주님께서 나에게도 말씀하시는 듯하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따르기로 한 스승 예수님의 말을 잘 듣는 일이 바로 관상기도로 가는 지름길일 뿐더러 더 많은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가장 좋은 길이니라.”

▶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 김광수(요한 보스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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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산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설레입니다. 성경에도 좋은 의미로 쓰여진 산의 표상이 자주 등장합니다. 광야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고 정화하는 장소라면,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시편은 “북녘의 맨 끝 시온산은 대왕님의 도읍이라네. 하느님께서 그 궁궐 안에 계시며”(48,3ㄴ-4ㄴ)라고 노래하고 있고, 이사야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2,2ㄴ) 하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25,6)고 합니다. 그러기에 시편은 “산들을 향하여 내 눈을 드네”(121,1ㄱ) 하며 산을 향하여 주님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나아가 이사야는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2,3)고 합니다.

산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올라가야 할 곳이라고 외칩니다. 시편은 또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24,3)고 합니다. 산은 공간적으로 볼 때 높으신 하느님을 제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깊고 신비롭고 고요하면서 변화하는 ‘靜中動’ 이미지 그 자체가 하느님의 속성을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산은 예수님이 자주 산에서 기도하셨듯이 기도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도달해야 할 기도의 목적지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 예수님도 그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세 분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다인들이 최고의 지침으로 여기는 율법의 대변인인 모세와 예언자들의 대표인 엘리야와 함께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시켜 해방시켰듯이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기득권 체제에 의한 억압에서, 나아가 죄의 종살이에서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을 탈출, 해방시켜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희망을 두고 말한 바로 ‘그분’입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분위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은 세 분이 나눈 이야기의 내용은 듣지 못하고 예수님의 빛나는 영광만 봅니다. 수난 없는 영광만 누리고 싶은 그들의 영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35)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지만 알아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수난에 대해서는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을 뿐더러 서로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는 논쟁을 합니다.

또 예수께 받은 기득권을 공유할 마음이 없는 그들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못마땅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냉대에 대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고 으스대다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 꾸중을 듣습니다. 자신을 죽이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제자의 삶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그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깊은 잠을 잡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쳤을 때에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듯합니다. 베드로는 서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2-­13).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줄 때, 교묘하게 꾸며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지만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활약하다가 사도로서 첫 순교자가 되고, 요한은 가장 오래 살면서 제4복음서를 집필하여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명상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산에서의 기억은 박해를 견디는 힘과 신자들을 격려하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의 산에 오른 제자들이 된 것입니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땀 흘리는 수고를 동반해야 합니다. 관광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사찰 입구에서 북적대다가 떠납니다. 등산로 입구만 가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만나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숨도 차고 다리도 무거워지면서 도중하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다시 숨을 가다듬으며 한 발 한 발 걸어 정상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환희는 고생을 할수록 더 큰 것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더위와 타는 목마름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오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한 인내의 걸음으로 산 정상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 차려주시는 잔치상을 받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정상을 갈망하며 꾸준히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산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오르셨던 이 산을 우리도 갈망하며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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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오소서, 성령님. 거룩하신 주님의 영광을 마음에 새기고 어둠 속에서도 그 빛으로 살 수 있게 이끌어 주소서.

독서

어느 날 예수님은 세 제자에게 기도하러 산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이것은 평범한 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어떤 체험을 하게 될지 전혀 모른 채 따라 나섭니다. 그렇지만 이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보고 듣게 될 것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산에서 베드로는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것이며(33절), 산에서 내려온 다음에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할 것입니다(36절). 아직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이고(31절), 둘째는 “예수님의 영광”?입니다(32절).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거룩한 변모의 신비입니다.

먼저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빛나는 것을 봅니다. 옷이 희게 빛난다는 것은 감추어져 있던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으로 육화하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제자들이, 그분이 본래 지니고 계셨던 신성의 빛을 잠시나마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를 대변하는데,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루카는 2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셨다고 말하는데, 그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24,?26???27).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께서 ‘이루실’ 일,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며 행하셔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수동적으로 그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번역된 단어에 잠시 머물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엑소도스’?입니다. 떠남?·?나감이라는 의미인데, 이집트에서 ‘탈출’?한다는 것과 동일한 단어지요. 여기에서 이미, 이것이 다만 ‘세상을 떠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사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반이 되는 새로운 파스카, 부활을 내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그는 자신이 머물 초막이 아니라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머물 초막을 지으려 합니다. 이집트 탈출 과정 중에 이스라엘을 동반했던 장막 성소가 그러했듯이, 초막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영광이 최종적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예고로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7) 이것이 앞으로 제자들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도 신적 영광과 순종으로 받아들인 죽음 두 가지 모두를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세례 때에 하느님께서 예수님 자신에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다면(루카 3,?22), 지금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이는 내 아들”?이라고 하십니다(35절). 그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이 제자들에게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그의 말을 들어라.”)

다른 한편으로 “내가 선택한 아들”?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 사용된 것으로(이사 42,?1), 예수님도 고통 받는 종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주님의 종은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이지만,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53,?10),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53,?5)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제자들한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십자가의 길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찰

예수님의 신적 영광을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알려주는 이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두 가지를 모두 그분이 하느님께서 ‘선택한 아들’?이라는 것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수난의 의미는 부활에 비추어서야 이해될 것입니다. 그때 아드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시편 27,?8)

안소근 수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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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고향

묵상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산속의 수도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밤새 고요히 흰눈이 쌓였습니다. 솔잎도, 풀잎도, 뜨락도, 기와 지붕도 눈옷을 수려하게 차려 입었습니다. 신비롭고 황홀합니다. 자연의 이같은 신비를 빚어내시는 하느님의 솜씨에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중세의 위대한 신비가 성 보나벤투라는 온 우주를 ‘하느님의 또 다른 책’이라 했습니다. 로고스를 통해 창조된 우주는 자신 안에 숨어 있는 로고스 신비를 끊임없이 뿜어내며, 자신을 지어낸 작가를 쉼없이 기리고 있습니다.

이 우주를 두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말했습니다. “온 세상이 수도원 회랑이노라.”

온 우주는 하느님의 신비가 깃들어 있는 하느님의 뜨락입니다. 이 신비의 뜨락에는 갖가지 신비의 꽃들이 피어 있는데, 몇 가지를 보면, “아름다움”과 “좋음”과 “참됨”입니다. 이 진선미를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를 동시에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뜨락에는 사랑의 꽃도 있습니다. 귀찮고 싫음을 무릅쓰고, 베풀고 받아들일 때, 그 사랑을 통해서도 이 신비는 우리 영혼 안으로 스며들고, 우리의 마음과 몸을 그윽하게 비추어줍니다. 그 빛이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운지! “주님, 이 신비 안에서 지내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모든 사랑의 사건에서 흘러나오는 이 신비가 바로 우리가 돌아가 머무를 유일한 고향인 것입니다.

고계영 신부(작은 형제회)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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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이겨내는 신비체험

사순시기여서인지 예수님의 변모 얘기를 묵상하니
다음의 얘기가 겹쳐지며 그림 그리어졌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얘기입니다.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두 아이를 키우던 엄마는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며 오직 아이들만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몸이 너무 피곤하고 밥맛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일에 지쳐서 그런가보다 하고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검사 결과는 위암이었습니다.
그것도 온 몸에 전이되어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위암이었습니다.
그래도 자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이 엄마에게는 사치였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몰아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아파할 수도 없었고
아픈 티를 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엄마가 죽은 다음에도
꿋꿋이 살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까 시간만 나며 궁리를 했습니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만한 시설이 없나 알아보기도 하고
입양을 시키는 것이 어떨지 알아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런 현실적인 대책을 세워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엄마에 대한 추억을 아이들에게 남기는 것,
엄마가 얼마나 자기들을 사랑하는지를 아이들이 느끼게 하는 것.
그래서 엄마는 아이들과 마지막 추억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돈 버느라 지금껏 한 번도 아이들과 시간을 오래 같이 보낸 적도,
그래서 여행을 떠난 적도 없었습니다.
돈을 아끼느라 한 번도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 먹이지도 못했습니다.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면서도 한껏 들떴습니다.
바다와 제주도의 멋진 풍광을 보면서 아이들은
“집에 가지 말고 여기서 계속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지어낸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하겠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지어냈는지 짐작을 하시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하시기 앞서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고
루카복음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수께서 이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예루살렘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제자들은 황홀경에 취해 여기서 계속 지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타볼산에서 내려오셔야 하고
골고타 산을 오르셔야 합니다.
그래야지 천상의 시온 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너무도 혹독하고 암울한 여정입니다.
그야말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여 희망을 꺾지 않고 제자들이 같이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절망을 넘어서는 믿음과 사랑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골고타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제자들 앞에서 장엄하게 선포하실 필요가 있으셨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미래 영광의 주님 모습을 앞당겨 보여주시고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고
구름을 뚫고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이는 아브람이 체험한 신비경과 같은 체험입니다.
고향 땅을 떠난 아브람도 땅과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허언이 아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이 신비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오늘 이 아침, 저의 기도 또한
어떠한 역경도 이겨낼 신비체험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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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수

결혼 전에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결혼생활 몇 달 만에 심각할 정도로 성격차이를 발견한 부부, 그로 인해 한 평생을 고통스런 갈등관계 속에 살았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30년간 결혼생활 내내 부인은 "이럴 수가 없어!"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을 바라볼 때마다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지요. 남편은 인생에 동반자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망친 "웬수"였습니다. 이런 감정은 남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나마 지금까지 갈라서지 않은 것은 주변 사람들 이목과 불쌍한 "자식새끼들" 때문이었노라고 공공연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부부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집안에 사기나 유리로 만든 그릇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두 분 사이의 골이 너무나 깊어 관계회복을 위한 희망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한 가지 "대사건"이 생겼습니다.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던 두 분 관계에 뭔가 변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변화는 부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부인의 변화는 남편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따발총같이 쏘아대던 부인의 잔소리와 바가지가 조금씩 사라지자, 남편의 술주정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어서 사람들이 부인에게 "도대체 변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부인은 "나도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저 양반 저렇게 한 평생 술에 찌들려 살다가 죽겠거니 생각했었는데…지금 와서 무슨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생각했었는데, 정말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부인 쪽에서 먼저 시작된 심경의 변화는 마치 미풍이 꽃잎을 스치며 지나가듯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늦가을 저녁 시장을 봐오던 부인이 우연하게도 전방 10미터 가량 앞서 걸어가는 남편을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남편의 약간 꾸부정한 뒷모습이 그날 따라 그리도 쓸쓸해 보이고 허전해 보이더랍니다. 그 순간 측은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 골목 안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답니다.

불현듯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토록 목숨을 걸고 자존심 싸움을 해왔구나" 하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답니다. 그저 한 걸음만 물러났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티격태격 다투느라 좋은 시절 다 보냈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답니다.

생각 하나를 바꾸니 모든 것이 다 술술 풀려만 갔습니다. 한쪽에서 먼저 마음을 비우고 한 발자국만 물러서니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입니다. 결국 변화된 삶의 출발점은 한번 생각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작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얻은 부인에게 남편은 더 이상 "웬수"가 아니라 한번이라도 더 따뜻이 감싸주어야 할 측은한 존재였습니다. 남편에 대한 증오심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연민의 마음이 조용히 스며든 것입니다.

오늘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님 변모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산에 오르셔서 간절히 기도하시던 가운데 예수님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숨은 생활, 그리고 공생활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변모를 추구하십니다. 육적 삶에서 영적 삶으로, 인간 예수에서 메시아인 그리스도로 점차 건너가십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처럼, 위에 소개해드린 부부처럼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언제나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사람입니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변화, 회개다운 회개, 새 삶, 이런 단어들은 결국 하느님과 절실한 만남 그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참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억울함, 분함, 불평불만, 아쉬움과도 같은 인간적 감정은 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과 친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피하고만 싶던 십자가마저 은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어떻게 해서라도 하느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체험하는 기쁨의 시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느님과 만남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우리 삶을 스치는 그 순간 우리 인생은 점화된 촛불처럼 의미와 활기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한번 영적 여정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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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주님, 저희 눈을 밝혀주시어 당신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고 당신 뒤를 따르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사순 제2주일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 사건을 들려줍니다. 제자들은 이제 막 예수님의 첫 수난 예고(루카 9,22)를 접했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9,23-26)도 들었습니다. 이런 무겁고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으로 당황했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 중에 미리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이 있다는 말씀(9,27)을 통해 희망을 주시면서 이 영광스런 변모로서 그 약속을 이뤄주십니다.

그들은 영광스런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운 측면을 미리 본 것이며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훈련받는 과정 중에 중요한 한 단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본문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전해줍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앞서 헤로데의 입을 통해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데(9,9) 바로 이 변모 사건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밝히는데 독자들은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9,20)을 알게 된 것에 더하여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선택된 분이시며 인류가 귀를 기울여야 할 분이심을 알아듣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두 명의 다른 인물 곧 모세와 엘리야를 보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시나이(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이들이며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드러나고 하느님 백성에 대한 그분의 뜻이 이뤄집니다.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탄생하고 엘리야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이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대화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역할이 이들과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루카는 이 두 사람과 나눈 예수님의 대화 내용을 우리에게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이는 그분의 수난, 죽음, 부활과 승천을 가리킵니다. 마치 모세와 엘리야가 하느님 백성의 창조와 재창조와 관련되어 있고 모세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냈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교회를 낳기 위해 새로운 출애굽 사건인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 사건을 겪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영광이라는 단어, 또 구름과 하느님의 목소리는 하느님 백성이 탄생한 장소인 시나이 산에서의 하느님의 현현 사건을 상기시키고, 천상의 두 방문자와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 천상의 두 남자(24,5)와 성부 옆에 앉으신 영광의 예수님과 연결되어 본문은 구약과 신약을 통합하는 광범위한 전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은 재림 때에 영광 중에 오실 그분의 모습과 연결되어(21,27) 본문은 출애굽부터 예수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구원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예수님과 그분의 업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예수님 생애 당시에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 아직은 현세적이고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를 뛰어넘어 그도 우리도 상상하기 힘든 무한한 권능과 영광을 지닌 분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셨고 베드로는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청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목소리와 함께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권능의 메시아인 동시에 수난받으셔야 할 사람의 아들로 제자들 앞에 남아 계셨고,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그들의 소원은 먼저 그 길을 앞장서 가셨던(19,28)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 뒤를 따를 때 온전히 이뤄질 것입니다.

묵상 (Meditatio)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아듣고 고백하고 있는지요? 우리의 시선에서 아직은 감춰져 있지만 믿음 안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그 영광의 상태,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과 같이 되는 그 상태를 바라도록 초대하는 오늘 말씀처럼 믿음과 희망 안에서 살고 있는지요? 이 희망의 든든한 기둥인 기도 안에 얼마나 항구하고 열심히 살고 있는지요? 이 믿음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으면서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또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애쓰고 있는지요?

기도 (Oratio)

당신의 뜻에 따라 저를 이끄시다가 훗날 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시리이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 몸과 제 마음이 스러질지라도 제 마음의 반석, 제 몫은 영원히 하느님이십니다.(시편 73,24-26)

김태훈 수사(성바오로수도회)
  | 02.23
447 45.6%
[수도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주님이 되시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시기에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을 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믿음이 우리들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주님이라 말 할 수 있는 그분께서는 분명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거룩하게 변모하신 주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하시고자 한 것은 기도의 삶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유일한 시간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기도의 시간은 주님으로부터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 무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만이 결정적으로 주실 수 있는 은총과 평화입니다.

관계의 신비는 나눔의 신비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변모하십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변모입니다. 관계안에서의 일어나는 변모이기 때문입니다. 소홀히 하지 말아야할 것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관계의 끈을 끌고 나가는 것은 분명 기도입니다. 기도야말로 신비의 핵심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소통입니다.

갈라놓을 수 없는 주님과 우리의 하나 되는 신비입니다. 신비로운 일치는 우리의 현실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잘 가르쳐줍니다. 거룩한 변모는 우리 존재 안에서 솟아 나오는 그리스도를 닮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6년 2월 21일
  | 02.21
447 45.6%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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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날씨와 이 땅의 시간을 받아들이며 봄꽃이 피어납니다.

받아들이는 변모는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이 순간이 온통 아름다운 변모의 순간들입니다. 죽음까지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만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를 향한 소중한 하느님의 고백과 약속은 사랑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 또한 아름답게 변모될 것입니다.

기도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기도의 여정을 걸어갔던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의 여정을 걸으며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으로 하여 과거와 현재는 아름다운 선물이 됩니다.

이 사순 주일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주일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임이 뜨거운 변모의 힘찬 신앙고백이 됩니다. 받아들임이 깊어지는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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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9년 3월 17일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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