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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변화는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조회수 | 2,340
작성일 | 07.03.02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 ‘변화’, ‘소멸’의 단계를 거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공장에서 나오는 제조품처럼 완성된 것이 아니라 조물주이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기 위해 스스로 가꾸어 나가야 할, 그리고 성장하고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웅장함도,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홀로 뿌리를 내린 이름 없는 잡초 한 포기조차도 생명으로 태어나서 살아가기 위해 변화하고 성장하고 생명의 유효시간이 될 때 소멸해 간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 인간도 아주 자그마한 생명체로 어머니의 품속에 잉태되어 성장하고 변화한다. 그리고 그 성장의 유효기간이 끝났을 때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세상의 빛을 보면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생성’, ‘변화’, ‘소멸’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가 성장하듯이, 동식물이 성장하듯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육체적으로 성장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성숙되는 것은 아니다. 성장, 변화의 진정한 의미는 성숙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 동안 거룩한 변모를 이루셨다. 제자들은 잠에서 깨어나서야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변모한 예수님의 모습을 본 베드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그 곳에 머무르기를 청하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대조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성장하기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곳을 박차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달콤한 잠과 평화로운 그 곳에 머무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새로운 환경으로 나아가는 것,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익숙하지 못한 것, 낯설은 것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기에게 다시 맞추기 위해서, 그것에 맞추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의 익숙한 생활을 계속 지속한다면 고통도 힘겨움도 없을 것이며 아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길로 도전한다면, 새롭게 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길은 고통과 힘겨움을 겪어야만 하는 길인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분명 인간은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한 노력을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예수님처럼 거룩한 변모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안주한다면 성장도, 변화도 없다. 성장과 변화가 없는 삶은 육체적인 생명만이 있는 삶이다. 결국 반쪽짜리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삶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가 걸어야 할 삶인 것이다.

▶ 김규엽(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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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에게 선택받고 사랑받는 자녀"

오늘 복음은 주님의 영광스런 변모에 대해 전해줍니다. 주님의 영광스런 변모의 의미를 묵상하기 위한 출발점은 십자가입니다. 왜냐면 복음서에는 이 장면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주님의 십자가 말씀 후에 항상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 여정을 걸어가야 주님의 거룩한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주님 영광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 말씀에서도 이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18-21).
 
십자가 여정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서 주님의 뜻을 매일 매일 가까이 따르려는 삶입니다.
 
거룩한 변모에 함께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도 이 말씀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바로 십자가 여정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영광만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고통과 죽음이라는 십자가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이 의심과 불안을 떨쳐버리고 왜 주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체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 말씀을 듣고 믿는다면, 우리는 주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되고 모든 의혹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 말씀은 우리를 영적 정상에 서게 하고, 이제 저 세상 밑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더 큰 차원에서 명확하게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산에서 주님의 위대함을 목격했던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드 1,19).
 
주님 말씀에 애써 귀를 기울이려는 삶, 이것이 십자가 여정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주님의 빛이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움과 불안을 밝혀줄 것입니다. 주님 현존은 우리 내면을 기쁨과 환희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에게 선택받고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삶 속에서 불안과 절망이라는 유혹의 손길을 경험하곤 합니다(창세 15,12). 그러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분께 선택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체험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결정적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을 세상 속에서 끝을 모르고 추구하는 자신의 인간적 욕망으로만 채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서슴없이 자행되는 모든 어두움의 행위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주님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새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삶과 철저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변화의 핵심은 주님께 매달리는데 있습니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긴 여정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엘리야도 모세도 심지어 제자들도 주님의 부르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어둠이 밝아 오고 새벽의 찬란한 빛이 비출 때까지, 당신을 믿고 의탁하고 내맡기며 변화돼가는 우리 모습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뒤에 감춰진 주님 본연의 모습을 보기 원한다면, 우리의 나약한 의지, 부끄러운 행위들, 숨기고 싶은 욕망들을 주님께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타볼산에서 제자들이 느꼈던 행복의 순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행복의 순간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더 큰 영광과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홍승모 신부
  |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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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남동쪽으로 차로 한 시간 쯤 걸리는 곳에 고다와리라는 작은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작은 학교 “산띠라니(Shanti Rani:평화의 여왕)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일흔이 훨씬 넘으신 인도인 이멜다 수녀님과 마흔쯤으로 보이는 네팔 수녀님이 몇몇 네팔 선생님과 함께 운영하시는 가톨릭계 초등학교입니다.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2005년 히말라야 트레킹을 갔다가 그곳에 들르게 된 것은. 학생 70명의 자그마한 학교. 한 달 수업료가 미화 1달러인 학교. 그런데도 수업료를 낼 수 있는 아이는 고작 30명이 안되는 정말 가난한 학교. 누군가의 도움으로 학교 건물은 새로 지었지만 어린 학생들 대부분이 점심을 굶으면서도 그저 글을 읽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때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학교에 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천사들이 모여드는 하느님 나라.

그게 인연이 되어 4년 가까이 한 달에 얼마씩 밥값을 보탰습니다. 마리아씨, 요한씨, 분도씨에게도 말을 건넸더니 흔쾌히 도와주셔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학생수가 250명이 넘었습니다. 학교 내에 조그마한 양호실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수업료를 내는 아이들은 채 50명이 안된답니다. 아이들은 계속 늘어납니다. 계속 학교에 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학교에 가면 점심 한 끼를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 한 끼를 먹은 아이의 얼굴은 어둡고 무기력한 죽음의 색을 이겨내고 빛나는 화색이 돕니다. 어찌 그리 밝고 빛날 수 있는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당신의 아들. 그를 빛나게 변화시킴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아버지의 구원의지를 드러내십니다. 하루 한 끼 채 500원어치도 안되는 밥을 먹고도 그렇게 빛날 수 있는 산띠라니의 아이들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싶습니다. “이는 내가 택한 아이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멜다 수녀님께서 감사의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늘 빠뜨리지 않고 써보내시는 말씀 “Don’t forget Us!”(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범석 아우구스티노 신부
  |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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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진을 올리면 그 사진으로 나이를 평가하고 닮은꼴 연예인을 찾아주는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미삼아 그 사이트에 들어가 제 사진을 올렸지요. 그런데 제 사진으로 평가되는 나이는 40대 후반이랍니다. 40대 초반인 저로써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긴 제가 그렇게 젊어 보이지는 않겠지요. 왜냐하면 얼굴에 주름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주름 때문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어느 본당의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아서 생활할 때였습니다. 그때 역시 사람들은 제게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하도 많이 듣다보니 지겨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제게 오셔서 귓속말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사람들이요. 신부님께서 나이 많아 보인데요.”

한 두 번 들은 것도 아니어서, 저는 곧바로 말씀드렸지요.

“제가 주름이 많아서 그래요. 어떻게 하겠어요? 생긴 것이 이런데…….”

이에 그 할아버지께서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신부님께서는 너무나 젊어 보이세요. 제가 이래봬도 사람 나이는 잘 맞춘다니까요.”라고 말씀하신 뒤 곧바로 이야기하십니다.

“신부님, 올해 나이가 마흔 몇 이죠?”

제가 사제 서품을 받은 해였기 때문에, 딱 서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3~4살 많게 보시는 분들은 많이 뵈었지만, 이렇게 열 살 넘게 제 나이를 예측하신 분은 처음이었지요.

아무튼 이런 평가를 받게 된 이유가 바로 얼굴의 주름살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주름살이 저에게는 커다란 핸디캡(handicap)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떤 분의 강의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분께서도 저와 비슷하게 얼굴 주름이 많으신 분이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창 시절에 공부할 때 중요한 구절이 나오면 어떻게 하셨습니까? 줄을 그으셨지요? 아마 지금도 책을 읽다가 중요한 구절, 가슴에 새기고 싶은 구절이 있으면 줄을 그으실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제가 그렇게 중요했나 봅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슴에 저를 새기시려고 했나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 얼굴에 줄을 그으셨네요.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핸디캡인 부분이, 이 분에게는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자신감을 갖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할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모든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부분까지도 가능한 일로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들은 그 모습이 너무나 좋았나 봅니다. 이제까지 어렵게 살아왔는데,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과 더불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까지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그 자리가 천국 같았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 눌러 살자고 청하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지금이 좋다고 그냥 그 자리에 안주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예수님의 뜻을 알아채고 이러한 소리를 전해 주지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굳게 믿으면서, 어떤 일이든 자신감을 갖고 힘차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지금 현재 편하고 쉽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안주하려는 나태함을 과감하게 버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좌절과 포기의 모습을 간직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런 모습을 원하시지 않는 것은 물론, 내 스스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확신을 갖고 힘차게 생활하십시오. 힘차게 생활하다보면 어느새 행복도 내 것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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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본 베드로 사도가 외친 말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의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곧 닥쳐올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보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주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세 제자는 스승님의 고뇌와는 상관없이 철딱서니 없게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깨어나 보니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에는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두 예언자를 대동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예언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곧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구약에 예언된 대로 부활하시리라는 사실을 미리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 대한 예고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혼란스럽고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렵고 힘들어하지 말라고 십자가 죽음 후에 이루어지는 부활의 영광과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힘들고 어려울 때 참고 견디라고 격려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임을 기억하자.

사순 제2주일에 이 복음을 들려주는 이유도 사순절을 잘 지내면 부활의 기쁨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다. 순교자들과 성인들에게 주어진 하늘나라의 영광도 십자가의 삶을 이겨낸 바로 그 고통과 땀의 결실인 것이다. ‘십자가는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신비’임을 명심하자. 그런데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진 제자들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베드로의 반응이 이를 대변한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순절을 편하게 어물어물 지내다가 그냥 부활을 맞이할 수 있다.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십자가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당신의 뜻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하느님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표현 방식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 방법의 하나인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삶의 형태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들려온“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면 우리도 세 제자처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뵙게 될 것이다.

인천교구 이찬우 신부
  |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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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미사를 드리고 묵주기도를 바치고 고해성사를 보고 레지오 회합에 참석하고 돈과 시간, 재능과 열정을 봉헌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고자 합니다. 결국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나를 돌보아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나를 돌보아 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재정립됩니다. ‘그분께서 이미 나에게 주시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도를 하는 이유도 다를 바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 당신을 위해 기도를 하는 수고를 했으니, 정당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그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는 계시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동안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신앙의 이유와 기쁨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솔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그분께 혼나고 버림받을까봐 이상하게 포장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노예적인 성향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 쌓아 올린 하느님상과 복음적이지 않은 가치관에 묶여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풀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를 해방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나의 구원자는 내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묵주기도를 이만큼 바치고 레지오 회합에 빠지지 않았다고, 봉헌을 많이 하고 봉사를 열심히 했다고, 이 정도면 되겠거니 하고 머물지 말고 그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성경공부, 피정, 신자재교육 특강, 성체조배, 요즘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가톨릭 서적들 읽기, 복음 묵상 및 나눔,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통해서만 얻고 싶은 관심이 아닌 소공동체 모임에서의 신앙 대화, 이 모든 것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는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들어야 합니다.

나의 업적과 내 주변 사람들만 바라보면 눈을 들어 하늘을 보기가 싫어집니다. 지금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 인천교구 최화인 라우렌시오 신부 : 2016년 2월 21일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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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패트릭 맥콘록(Patric McConlogue)은 노숙자라 할지라도 훌륭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노숙자 한 명을 만났고, 그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100달러나 자바스크립트 전문서적 중 하나를 주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서적을 달라고 한다면 저렴한 노트북을 함께 주고 매일 1시간씩 프로그래밍을 알려 주겠습니다.”

이 노숙자는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는 100달러를 선택했을까요? 한참을 고민하다가 100달러 대신 서적을 받고 프로그래밍 공부 하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바뀌었습니다. 그는 프로그래밍 학습 4주 만에 스마트폰 앱 계발을 착수할 수 있었고, 3개월 후 완성한 앱을 판매해서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순간의 만족을 위한 선택과 미래를 위한 선택. 당연히 미래를 위한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늘 망설입니다. 순간의 선택은 지금 당장 얻는 결과이지만, 미래를 위한 선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으며, 그래서 탁월한 선택이 아닌 최악의 선택이라며 후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위의 예를 조금 바꿔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한쪽에는 현금 1억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하느님을 가깝게 느끼게 하는 봉사의 길이 있습니다. 현금 1억으로 지금 당장의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봉사의 길로는 하느님을 훗날 하느님 앞에 가게 되었을 때 인정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물질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일까요? 더욱 더 세상의 것과 지금 당장의 만족을 위한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지금 당장의 작은 만족이 아닌,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따르라고 하시지요.

오늘 예수님을 쫓아갔던 제자들은 거룩한 변모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너무나도 커다란 황홀함을 체험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 눌러 살자고, 그래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느님을 위한 초막을 지을 수 있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말을 한 것입니다. 또한 지금 당장의 만족을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어떤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일까요? 지금 당장의 만족을 위해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는 삶도 아닙니다. 비록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하늘의 것을 추구하면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만족을 위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철저히 듣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한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이 평생 후회하는 삶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2월 21일
  |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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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수난 속에 감춰진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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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모습, 즉 그분의 옷과 얼굴은 완전히 변모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영광의 빛으로 찬란히 빛났고,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루카 복음서 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분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나중에 가서야 그분의 부활로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가 제자들에게 설명되었겠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누고 있는 이야기를 제자들은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순간적인 모습 안에서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고 싶어 합니다. 베드로는 아직 결정적인 한 가지 일이 지나가야 한다는 것, 구름 속으로 지나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

갑자기 구름은 주님과 두 증인을 감추어 버립니다. 구름은 아직 통과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암흑, 즉 수난과 죽음입니다. 구름은 죽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부활이며,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 안에서 베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심지어는 신앙까지도 쉽고 편하고 힘들이지 않고 황홀한 영광만을 바라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참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시는 일은 아직 미래에 보류되어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수난의 길을 통해 영광의 목적지에 이르게 해주는 힘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그분의 말을 듣는 것,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오늘 복음이 던져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사랑, 용서, 자선 등)이 때로는 고통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고통이 없는 영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늘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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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재영 요셉 신부 : 2019년 3월 17일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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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등산을 좋아해서 산을 많이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등산을 다녀온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등산을 하겠다고 늘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언젠가 충청도 지역에 강의가 있어서 하루 전에 가서 강의를 할 본당 근처에 있는 어느 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높지 않아서 산책하듯이 정상까지 갈 수 있다는 말에 힘차게 발을 내딛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등산을 하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 순간 정상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정상을 오르는 두 갈래의 길에서 이런 이정표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리 아픈 길. 그러나 빠른 길.’, ‘다리 편한 길. 그러나 느린 길.’

저는 너무 힘들어서 ‘다리 편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편안하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내려올 때에는 ‘다리 아픈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거리였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금세 내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식으로 두 갈래 길이 펼쳐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힘들지만 짧은 길, 편하지만 먼 길처럼 말이지요. 두 길 모두 무조건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장단점이 늘 있습니다. 문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힘들다고 불평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편해서 좋고, 또 시간이 짧다면서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내게 가장 좋은 순간들이 찾아옴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순간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라는 위대한 현현은 우리에게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는 삶의 신비를 흘끗 보여 줍니다. 흘끗 본 것만을 통해서도 베드로는 큰 감동을 얻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이 너무나 좋으니 그냥 이곳에 눌러 살자는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구름 속에서의 소리로 명령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순간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주님의 말씀이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어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분명히 나의 길이 가장 좋은 길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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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9년 3월 17일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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