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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믿음.
조회수 | 2,312
작성일 | 07.03.0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알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알립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기도하신 것은 구약성서에 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진 것은 땅에서 사람들이 보던 그분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별한 교감(交感) 안에 사신 분이었다는 말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알아듣는 데에 그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종교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셔서 생명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인류역사 안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들이 있습니다.(출애 33,18-19). 구약성서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받들어서,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계약은 두 당사자가 앞으로의 행동 양식을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은 앞으로 계속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겠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실천하지 못하였을 때,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왕이나 제관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으로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할 때, 예언자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언자들은 대부분 기득권자들로부터 박해 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당신 자신에 대해 가르치거나 당신의 권위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 들린 이들에서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간질 환자나 정신 분열환자들을 그 시대는 마귀 들린 이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연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한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람들은 그분을 예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군중이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마태 21,11)라고 환호한 사실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로부터 시작된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다가 생명을 잃었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설명하는 오늘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리 보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할 때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도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엉뚱한 제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떤 망설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설명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깨달은 바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에서 들렸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알려면,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늘나라의 호적을 확인하고 나온 말이 아닙니다. 친자(親子) 확인을 위해 유전자 감식을 한 결과로 나온 말도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충만히 있었다는 믿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병을 고치신 것은 그분 안에 있었던 하느님 생명의 발로였다는 말입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며 그들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면서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던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가 자유롭게 실천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종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나는 여러분을 친구라 불렀습니다.” 요한복음서(15,15)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조건 순종하면서 미성숙하게 사는 종이 될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는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벌이 두려워 눈치 보며 행동하지 않습니다. 친구는 친구의 뜻을 실천하여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하느님의 생명을 자유롭게 실천하며 당당하게 사는 사람일 것을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알리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믿음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있어서 예수님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이 그분을 결정적으로 알아듣게 하는 열쇠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죽기까지 실천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당당하게 사는 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얻어 이 세상에서 잘 살아 보겠다고 눈치 보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자녀들인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시선으로 새롭게 봅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 자기가 할 일을 찾습니다. 아버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자녀는 그 아버지의 자녀들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실천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이 하늘에서 들리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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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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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삶의 변화만이 살길이다.

열심한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는, 하는 일이나 바라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 신앙과 가정마저도 저버린 채, 깊은 방황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남편, 아버지를 보면서 가족들도 교회로의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교우들은 이 가정을 보면서 안타까워만 할 뿐 그냥 그대로 보고만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 교우들에게 잊혀질때 쯤, 모든 가족이 함께 아주 밝은 모습으로 성당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교우들은 뜻밖이지만 반가이 맞이하면서 “시간이 해결해 주는구나. 힘든 발걸음 했다. 잘 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흘러간 시간동안의 삶이나 성당에 다시 나오는 것이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어려웠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로 인해 더욱 힘들어 하던 가족들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활 중에 오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고통을 십자가로 여기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후엔 나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가 가볍게 여겨졌고 너무나 홀가분한 것이 좋다”라고 하며 웃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동료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합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한 모습에 함께 살기를 희망합니다. 거룩한 변모의 영광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모른 채, 너무나 단순하게 어리석은 생각과 말을 한 것입니다. 이 영광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영광인 것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이 십자가의 고통없이는 부활의 영광을 입을 수 없음을 우리들에게 미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면 끝은 멸망임을, 그리고 하늘의 시민으로서 구세주로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주님 안에서 굳건히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상징인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섬길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사순 2주를 맞이하면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예화에서 형제를 맞이하는 교우들이나 베드로처럼 과정은 모르고 결과 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음 보다는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의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이 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영광을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7)

▶ 우종선 라우렌시오 신부
  |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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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사순 제2주일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듣습니다.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는 과학의 상식 안에서 볼 때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사건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앙인들도 있지만, 오늘날 과학 만능주의의 현대인들에게는 설득력 있는 주장은 못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과학과 지식의 언어가 아니라 상징과 의미의 언어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 본문 이면에 담긴 의미를 알아보고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묵상해 봄도 좋으리라 여깁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신현(神顯)사화(출애 24장 참조)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3명의 동반자, 산이라는 공간, 그리고 구름 뒤에서 들리는 음성 등이 같은 소재라고 볼 수 있지요. 이처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가지신 신적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구약의 소재들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고 예수님이 이들과 당신의 수난에 대해 말씀을 나누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 역사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율법과 예언자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이들과 한자리에 모임으로써 이스라엘의 율법 전통과 예언자 전통을 온전히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들의 대화 내용(루카 9, 31 참조)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이 두 전통의 완성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구약전승을 활용하여 루카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자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며 놀라움과 두려움 안에서도 그 곳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체험한 그 순간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나 미사를 통해, 또는 어떤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만남과 은총의 체험은 믿음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밑거름일 뿐입니다. 그 체험의 기쁨에서 나와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갈 때 제자 됨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부산교구 신요안 신부
  |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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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거룩함의 빛

또 사순절이 되었고 벌써 사순 2주째가 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언제나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시기에 오지요.

이곳 가르멜 수녀원에도 겨울이 차츰 물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수녀님들은 언제나 사순절처럼 살고 계신답니다.

얼마 전 한 수도원을 방문해 하얀빛처럼 누워계시는, 올해로 101세가 되시는 수사님을 뵙고 왔습니다만, 이곳 수녀원에도 아주 귀한 보석같이 빛나는 할머니 수녀님들이 여럿 계시답니다. 그 빛이라는 것이 스스로 내고 싶다고 해서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순절은 주님의 수난을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만, 또한 잠에 빠져있는 우리 영혼을 깨워 일으키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 중에 빛이 났습니다.“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 빛 자체이신 분이 빛을 발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도 빛이 날 때가 있답니다. 그 빛은 사람의 내면에서 발산되는 빛인데, 주님과 함께할 때나 말씀과 함께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힐 때는 내면에서 빛이 나게 됩니다. 산에서 주님의 모습이 빛나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주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빛이 났습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미사 드릴 때 내면에서 빛이 타오르지 않는다면 아마도‘아케디아’(영적 무기력)에 빠진 것이겠지요.

신부님도 수녀님도 신자님들도 모두 빛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잠에 빠졌던 제자들이 그 빛을 보고 그곳에 살고 싶다고 한 것처럼 우리도 일시적으로나마 그 빛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시다.

갈수록 성당은 빈자리가 늘어나고 젊은이들과 중장년 신자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사라졌던 빛이 다시 나타난다면 그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하느님과 말씀만 되새기며 105살이나 살면서 수많은 제자들의 빛이 되었습니다. 유혹자들과 영적투쟁을 벌이던 성인은 어느새 빛나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이 빛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요?

▥ 부산교구 김형길 안젤로 신부 : 2016년 2월 21일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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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의 의로움

고대 중동에서는 임금들 간에 서로 계약을 맺을 때 희생 제물을 가져와 반으로 쪼갠 뒤 계약 조건을 말하며 쪼개어진 제물 사이로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둘 가운데 누구라도 계약을 어기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는 장면도 이와 유사한데, 아브라함이 짐승들을 주님께 가져와 반으로 자른 뒤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습니다. 그리고는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갑니다. 여기서 화덕과 횃불은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화덕과 횃불 모습으로 쪼개 놓은 짐승 사이를 지나가면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점이 발견됩니다. 계약 당사자인 아브라함이 갈라진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쪼개어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면서 계약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15장은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라기보다 하느님이 일방적인 약속, 곧 하느님의 언약에 관한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시는 것도 아브라함이 청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계약에 당신 스스로를 옭아매시는 하느님. 여기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마지막까지 책임지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늘 2독서에서는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는 당신 아드님의 피로 계약을 맺게 되었고, 그분 덕분에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이루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충실하심 덕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모습을 두고 하느님의 의로움이라고 표현합니다.

대개 세상의 의로움은 착한 일 하면 상주고, 나쁜 일 하면 벌주는 그런 의로움이지만, 하느님의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것, 곧 우리의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당신 약속을 기필코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충실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런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죄마저도 용서해 주십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니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예수님 덕분에 누리게 될 영광만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는 항상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아버지의 의로움을 본받아서 항상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의롭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느님은 언제나처럼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우리가 당신처럼 의로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기억하고, 그분의 의로움에 우리를 내어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갑시다. 그러면 2독서가 이야기하듯이 예수님께서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 곧 오늘 복음에서 보았던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2월 21일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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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동에서는 임금들이 서로 계약을 맺을 때 희생 제물을 가져와 반으로 자른 뒤 계약 조건을 말하며 잘라진 제물 사이로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둘 가운데 누구라도 계약을 어기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른 짐승 사이를 지나가시며,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점이 발견됩니다. 계약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잘라진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잘린 짐승 사이를 지나가시면서 계약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니 창세기 15장은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약속, 곧 하느님의 언약에 관한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시는 것도 아브라함이 청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계약에 당신 스스로를 옭아매시는 하느님. 여기서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마지막까지 책임지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주님께서 변모하시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실 때, 바로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당신이 바로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제물이며, 당신의 피로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리라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 그분의 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이루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충실하심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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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철호 요한 신부 : 2019년 3월 17일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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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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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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