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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나는 소망합니다
조회수 | 2,223
작성일 | 07.03.0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미국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다양한 직업을 갖기도 하였으나, 문명을 등지고 고향 콩코드와 월든 숲에서 산책과 명상, 노동으로 영적인 삶을 보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당시 ‘해리슨 블레이크’라는 신학자와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영적인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그 편지 글에서 ‘소로우’는 이야기 합니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장작 몇 개를 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것과 동시에 당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신성한 불을 지필 수 없다면… 수동적인 방법으로 따뜻함을 구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얻어진 따뜻함은 위태로운 것입니다. 내면의 적극적인 따뜻함은 맹렬한 아궁이를 견딜 수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분명 이 세상의 영광은 아닌 것입니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장작 몇 개를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 한 끼의 음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영혼과 믿음, 구원을 운운하는 것은 분명 배부른 자의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그 같은 인간의 아픔을 모른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욱 철저히 그 아픔 속으로 들어가시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겪는 모든 아픔들 때문에 오늘 그 아픔을 이길 수 있는 당신 희망의 변모를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의 인생길에서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 알고 계셨던 분이셨기에 영광스러운 변모 전에 이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분명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때론 비난을 받기도 하며, 바보가 되어야 하고, 손해를 보며 미쳤다는 소리도 듣게 되어있습니다. 그 모든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같은 십자가의 길은 결코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분명 십자가의 길은 영광의 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런 변모 전에 예고 말씀을 하신 뒤 변모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루카 9, 27)

진정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고통을 우리를 위해 겪으시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이 고통으로 끝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이시고, 참된 희망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해 오늘 또다시 그 영광의 변모를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변모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결코 당신 혼자만의 변모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그같이 변모해야 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지상 생애의 절대적인 가르침이셨습니다.

반드시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과 용서와 사랑을 따를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셨기에 우리도 그 영광의 변모를 체험할 수 있음을, 그것도 이미 이 지상에서 경험할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피정이나 특별한 신앙 교육을 통하여 얼굴빛이 환해지는 모습이나 느낌을 경험하였습니다. 교육의 장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져 있음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또한 영광스럽게 변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생의 순간 순간 마다 변모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며 넋 나간 사람마냥 그곳에 그냥 눌러 앉아 있겠다는 고백이 아닌, 예수님처럼 변모하겠다는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예전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뼈를 깎는 애씀과 노력 끝에 나 또한 거룩히 변모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의 변모에 함께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훌륭한 영성가이신 ‘헨리 나웬’ 신부님은 변모되어야 할 모습에 대하여 이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누구를 대하든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볼 때 내가 더욱 작아질 수 있기를. 그러나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삶의 기쁨이 작아지는 일이 없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지 않기를.”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이 세상의 영광된 변모입니다.

▶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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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제2주일이면서 정월 대보름입니다. 보통 이날 본당에선 민속놀이 중 윷놀이를 하면서 공동체의 일치와 친목을 다집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시작한 사순시기가 놀이에 너무 취해서 부활 축제를 미리 맛보는 결과가 되었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보실까요?

오늘 복음 내용은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에 관한 것입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는 얼떨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루카 9,33)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런 원의를 구름이 지워 버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자신이 본 환상적인 영광은 아직 이른 것이었습니다.

성서에서 산은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고,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특별하게도 예수님에게 있어서 광야 유혹의 산, 타볼산, 겟세마니 동산, 갈바리아 산들이 그러했듯이 산은 구원의 징검다리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순절은 그동안 세속에 잃어버렸던 우리 자신을 하느님 안에서 되찾는 기도의 시간이며, 은혜의 기간입니다. 이 세상엔 공짜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데 어떻게 공짜로 되겠습니까? 희생도, 절제도, 극기도, 아픔도, 정성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고 한 베드로의 말 ‘이젠 거기까지’ 입니다.

옛날엔 공짜가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그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거저 주셨는 데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일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무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변모를 향한 길은 아직 멀었습니다. 그 길은 대속을 위한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지만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 9,35)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용기를 갖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필리 4,1)

춘천교구 윤헌식 신부
  |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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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저요? 사실은 제가 빛이거든요.

기억 하나, 다이아몬드 원석을 무수히 다양한 형태의 돌과 섞어 놨을 때, 과연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또한 그 원석이 장인의 손을 거치지 않는 다면 세상은 그 가치를 알 수 있을까?

기억 둘, 오래 전에 작고하신 저희 큰 아버 님께서 저에게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는 “忍(참을 인)” , 또 하나는 “玉不琢 不成器 人不學 不知道(옥불탁 불성기 인불학 부지도)”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이 루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 아마도 제 성정을 잘 아시기에 또는 인생을 사시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기에 저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 주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게으르고 어리숙한 저를 바라볼 때 이 선물은 항상 저와 같이 합니다. 다이아몬드 원석이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것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갈고 닦지 않으면 거친 돌일 뿐이고 모양만 사람일 뿐일 것입니다. 소중한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겠지요.

오늘 들려오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 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빛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 예수님 안에 없었던 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일 까요? 아니면 그 빛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까요? 후 자일 것입니다. 빛이 나서 달라지는 것도 달라져서 빛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때가 되어 예수님의 존재성이 빛으로 드러난 것 뿐입니다. 그 분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속을 살아가면서 거룩함을 꿈꾸고 있는 ‘나’ 라는 인간을 바라봅니다. 세속과 거룩함이 다른 곳에서 손짓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입니다. 그 안에서 ‘나라고 하는 인간’ 을 ‘참된 나’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거룩함이 아닐까요? 따라서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다보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빛으로 당신의 존재성을 드러내셨듯이 ‘나라고 하는 인간’ 역시 자연스럽게 주님의 사람인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 안에 그 존재성이 드러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역시 거룩히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각인시켜 주십니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1데 살 5, 5 ; 에페 5, 8 ~ 9)

▥ 춘천교구 이상철 요한 세례자 신부 : 2016년 2월 21일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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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예수님과 함께 현장 체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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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에 나오는 초중고 주일학교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해맑고 귀엽다고 생각한다. 어찌 이런 생각을 나만 하겠는가? 물론 그들 나름대로의 고민과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학생들이 갖는 꿈과 이상은 충분히 그것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본당에서는 학생들의 꿈을 미리 맛보기 위해 현장체험을 많이들 한다. 유명 음악회 감상, 월드 클래스 스포츠 관람, 드라마 촬영장 방문, 신학교 방문, 테마 여행, 순례 등등……. 이럴 때 아이들은 힘과 용기를 갖고 신명나게 빛을 낸다. 아이들이 꿈을 이룬 거룩한 변모라 할까!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체험들이고 결국엔 꿈을 이룬 현실이 된다.

사순 제2주일이면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한층 깊어져야 하는데, 복음의 내용은 의외로 부활을 예표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이다. 십자가상 죽음 이후 부활 때에 있을 이 사건을 앞당겨서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 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주님의 수난을 목격하게 될 측근 제자들에게 그때를 대비하여 미리 용기를 북돋아 주자는것이다. 복음의 말씀처럼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오를 때” (루카 9,28)에만 매년 반복되는 고리타분한 일상의 사순 시기를 넘을 수 있다. 산은 하느님을 더 깊이 가깝게 체험할수 있는 만남의 장소다. 제자들은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와 그것을 완성하실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초막 세 개를 짓고 영원히 살고플 정도로 매혹적이며 신비로운 체험이었고 은혜였다. 천상의 체험이 주는 행복이 제자들에게 지속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이 그들의 십자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은혜와 체험에서 받은 용기와 힘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게 한다.

“사순은 부활의 관문이며 부활은 십자가 끝에 달려 있다”고 한다. 부활을 향한 이번 사순 시기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현장체험을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권능으로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그 체험을 주실 것이다.” (필리 3,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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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윤헌식 F.하비에르 신부 : 2019년 3월 17일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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