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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그의 말을 들어라!
조회수 | 2,310
작성일 | 07.03.02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이 추구하는 대로 재산이 많은 재벌 총수일까요? 권력이 가장 높은 대통령일까요? 소유와 권력으로 행복해질 수 없음은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부모가 자식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모든 재산을 바쳐도 아깝지 않고 심지어 목숨을 내주어도 후회하지 않을 사랑을 가진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인간 욕망의 경지를 넘어서까지 사랑할 수 있음은 깊은 사랑의 경험이 바탕이 될 때 가능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좋은 체험들은 어떤 난관이 닥쳐도 무너지지 않지요. 오히려 이런 사람에게 시련은 더 깊은 사랑을 확인하는 은총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아픈 기억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시련이 후회와 체념의 시간이 되고, 간신히 이어온 관계는 결별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사람들과 좋은 체험들이 많아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오늘 복음에서 만나게 되는 타볼산의 황홀한 변모사건이 이런 사랑 체험 교육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는데 기도하시는 동안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9,35)는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약에 예언된 구원자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고 그곳에서 영원히 머물자는 제자들을 달래 생노병사의 기쁨과 고통이 있는 산 아래 마을로 내려오십니다.

타볼산에서의 놀라운 체험은 이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님을 따르는 길이 고통의 길만이 아니라 그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미리 가르쳐준 교훈적 사건입니다. 이렇게 수난에 앞서 희망을 보여주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기 전에 당신이 많은 고난과 배척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난다는 첫 번째 예고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육의 의도대로 베드로는 처음에는 십자가 없는 예수를 따르고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꾸었지만 순교를 당할 때는 용감하게도 어찌 스승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수 있느냐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고통 속에서도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던 것은 타볼산에서의 체험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8). 타볼산에서의 황홀했던 체험이 깊이 각인되어 있던 베드로였기에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도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신자들 역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지셨고 제자들이 따랐던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 길이 많은 시련과 고통을 가져와도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믿기에 인내하며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화가인 디즈니는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도 못한 디즈니가 추운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무너진 벽의 구멍에서 생쥐 한 마리가 배고픈 듯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디즈니는 이 생쥐를 보는 순간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처럼 가난하여 고통 받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생쥐의 순진한 얼굴을 보여 준다면 가난하면서도 우리처럼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곧 생쥐를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커다란 귀, 까만 눈동자, 장난기 가득한 입술 등. 이렇게 해서 전 세계 어린이들의 친구 '미키 마우스'가 탄생되었습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인생을 살면서 각자 적지 않은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암흑의 터널 그 시작과 중간에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말고 그 길을 계속 가라고 용기를 줍니다. 은총의 사순시기입니다. 인내와 기도로써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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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만난 사람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당신의 하느님다운 모습을 보여 주시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전통에 따르면 높은 산은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본래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좌정하고 계시던 산 위에 올라가셨을 때 그분의 본래 모습이 잠시 드러나셨던 것입니다. 또 그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두 예언자들의 공통적인 점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육체를 가진 상태에서 하느님을 뵌 분들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정신에 따르면 사람은 죽어서만 하느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뵌 사람은 죽는 것입니다. 탈출기를 보면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는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이 하느님을 보려고 마구 다가오다가는 죽을 것이라 하셨고, 사제들도 하느님께 가까이 오기 위해서는 자신을 정결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외적으로 모세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을 뵈었지만 얼굴은 보지 못하고 뒷모습만 뵈었습니다.

엘리야도 하느님을 뵌 사람입니다. 그가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는 합니다만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을 직접 만나기는 하였지만 모습을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현세의 육체를 가지고 하느님의 나라로 갔으니 그 또한 살아서 하느님을 뵌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는 오직 이미 육체를 가지고 하느님을 뵈었던 모세와 엘리야만이 동석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사도가 동석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세 사도들은 육체를 가진 상태에서 하느님을 뵙고도 죽지 않는 영광을 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은 얼마 후에 모든 사도들과 더 나아가서는 현재의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광채가 가득한 모습을 사도들에게 자주 보여 주셨습니다. 그 광채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을 뵙고도 얼른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는 표현은 바로 훗날 부활하신 모습의 표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사도들은 뒤늦게나마 이 높은 산의 영광에 참여한 것이며 하느님을 뵙고도 죽지 않는 은혜를 받은 셈입니다.

우리들도 이 영광에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체성사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우리가 누리는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하며, 이 영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 백남용 신부
  |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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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열심히!

오늘 제1독서의 말씀으로 함께 들은 창세기 15장 6절은 사도 바오로께서도 무척 좋아하셨던 구절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로마 4,3).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모든 신앙인의 시조이자 모범인 것은, 그가 선행을 많이 해서 공로를 아주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복과 은총을 내려줘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자비의 하느님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우리 마음 안에 커다란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장래에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며, 누구든지 당신의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루카 9,22-23 참조).

이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뭔가 답답하고 착잡한, 뭔가 무겁고 혼란스러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는 인적이 드문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믿음을 채워주었습니다. 덕분에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또 영광스러운 천상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체험도 하였습니다.

부활대축일을 준비하는 참회와 은총의 시기인 사순절은 우리가 평소보다 더욱 기도에 힘을 쏟아야 할 기간입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특별히 부족한 우리 믿음을 채워달라는 청원을 주님께 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꼭 들어주셔서 우리 믿음도 의로움으로 인정 해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이런 의미로 이번 사순절 동안 함께 바쳤으면 좋겠다 싶은 기도를 한 수 소개해 드립니다:

주님, 저희에게 위로의 영을 선사하소서.
마음에 위안이 없이 메말라
영적인 어둠 속에 빠져 있을 때에도
우리는 주님을 충실하게 섬겨야 하고,
또 그렇게 충실하게 섬길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청합니다.
저희에게 위로와 힘, 기쁨과 확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성장,
고귀한 봉사와 찬양의 영을,
또 침착함과 평화의 영을 주십시오.아멘.

칼 라너 신부

▶ 신희준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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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

사목을 하는 사제들에게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신자들이 몇 분 있습니다. 어느덧 28년이 지난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마치 어제같이 생생합니다. 환자 방문 중에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중풍으로 십여 년 이상을 누워 계신 할머니입니다.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몰골이 형편없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십 년 만에 고백성사를 보신 할머니는 성체를 영하시고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습니다. 봉성체를 끝내고 돌아서려는 제 소매를 붙잡으며 할머니는 작은 소리로 이야기 하셨습니다. “신부님, 다음에 오실 때 요구르트 한 개만 사다 주세요. 먹고 싶은데 이불에 자주 소변을 본다고 주질 않아요….” 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습니다. 그 후에 봉성체를 할 때마다 할머니께 몰래 요구르트를 한 개씩 사다 드렸더니 얼굴이 밝아지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저는 서둘러 할머니 집을 방문했고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그분은 마지막을 직감하셨는지 성사 중에 눈물을 자꾸 흘리셨습니다. 병자성사가 끝나고 할머니는 꼬깃꼬깃 접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과 오천 원짜리 두 장을 제 손에 쥐여주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 이 돈을 저에게 주십니까” “이제 나에겐 이것이 필요 없어요. 신부님이 가지고 계시다가 불쌍한 사람에게 써주세요.” 그날 밤 하느님 곁으로 여행을 준비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저는 오히려 희망과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제관으로 돌아오면서 ‘지금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가 저에게 주신 돈은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할머니가 남기고 가신 때묻은 지폐, 이만 원을 간직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의 이 말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꼭꼭 숨겨놓고 있는 희망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행복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의 인생도 지금과 같은 상태로 지속되기를 내심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두렵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진다고 해도 별로 변화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변화도 싫고 더 나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유혹’입니다. 영성적으로 지금 상태에 머물고 싶은 유혹보다 더 큰 유혹이 있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부활을 원하고 바로 영광을 차지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는 배척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부활의 영광과 행복의 이면에는 항상 십자가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고통 없이는 영광도 없고,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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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전해 줍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 하느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천상의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여 희망과 확 신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 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시어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세 제자는 예수님께서 참 메시아이심과 그 영광을 보았 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보통 우리의 마음입니다. 누구나 변화는 두렵고 안주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통스러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십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주님의 뜻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한 인간의 지식과 능력으로 안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지혜 9,13)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주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믿음을 굳세게 하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어느 날 예수님처럼 천상의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힘은 어떤 시련과 고통에서도 좌절하 거나 절망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우리에 게 죽음을 통한 부활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 말씀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때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 들은 예수님의 변모 후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함께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의 길은 한마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으며, 고통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죽음을 극복 한 부활은 희생과 고통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진실하고 값진 행복은 그 이전에 먼저 십자가의 고통과 자기를 버리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 서울대교구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 2016년 2월 21일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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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리도 예수님처럼 빛나리!

1. 남루한 옷차림에 초췌한 모습으로 산에 오르신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요즘 한국에서 등산객을 보면 마치 신발과 등산복이 에베레스트 산에 오를 것처럼 완벽한 준비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신발이며 옷이며 제대로 갖추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힘많이 들겠지요? 땀에 옷이 흠뻑 젖었습니다.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은 꽤나 초췌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 흙수저의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들도 얼굴은 인생살이가 가난에 찌든 표정이고 옷차림과 말투와 태도도 꾀죄죄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곤 합니다.

2. 갑자기 바뀐 얼굴과 번쩍거리며 빛나는 옷차림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간 베드로와 동료들은 피곤했던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기도하시던 예수님 모습이 갑자기 전혀 달리 뵈는군요. 얼굴에서도 빛이 나고, 남루했던 옷은 하얗게 번쩍거렸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황홀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합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께서 이야기도 나누고 계시는군요.

우리도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기도 합니다. 자주 세속적인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형외과에 가서 자꾸 얼굴을 뜯어고치기도 합니다. 아마 한국이 성형외과 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일 겁니다. 마치 잠을 자는 듯이 사람들을 제대로 볼 줄 모릅니다.

그런 눈으로 가족들도 바라봅니다. 공부, 재산, 용모, 건강 등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실제로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그것들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다시피 하면서 살아갑니다. 헛된 가치에 휘둘려서 만족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기도 합니다. 참 한심하기만 한데 말이지요. 우리 모두 눈을 떠야지요. 참된 가치를 지닌 인생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우선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께서 가시는 인생길, 우리도 뒤따라 가야 하는 인생길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습이 변하면서 보여 주신 것은 종착지가 ‘영광’이라는 것이군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고향인 변두리 나자렛에서 자라나시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통받고 소외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시면서 가시는 길,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인생길은 영광을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때로는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뒤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인생길은 마침내 예수님처럼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설악산 대청봉을 등반할 때,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산에 들어선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청봉 정상에서 아름다운 내설악을 바라보고 동해를 바라보는 장관을 기대하고 기꺼이 인내하면서 등산을 합니다. 우리 인생도 이렇게 고통 속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세상에 초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마침내 그 영광에 우리도 도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2월 21일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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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늘과 땅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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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변모.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에 오른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합니다. 루카복음은 그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변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지 ‘다른’ 모습으로, 이전에 예수님에게서 볼 수없었던 모습으로 변하셨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변모에 함께 등장하는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성경에서 전하는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힙니다. 모세는 탈출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체험을 이끈 예언자이며 유일하게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던 인물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미래에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기 위해 보낼 예언자로 소개됩니다. 엘리야는 우상이었던 바알의 사제들에 맞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낸 예언자이면서 바람에 실려 하늘로 들어 올려진 인물입니다.

이 사건의 마지막에 전해지는 것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와 비슷한 표현을 예수님의 세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복음서 안에서 중요한 축(軸)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표현하는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복음서의 시작과 중간에서 예수님의신원을 드러냅니다. 또한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앞으로 받으실 영광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모든 이들이 알게 될 그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세례와 영광스러운 변모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서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사건이면서 복음서 안에서 명시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표현합니다. 변모 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은 그 영광스러운 모습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나 거룩함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것을 묘사하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변모가 얼마나 황홀하고 찬란한 것이었는지 엿보게 됩니다. 그저 그렇게 머물고 싶고 다른 모든 것들을 잊게 만듭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원하는 사회에서 종교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나 영광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시편의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시편34,9)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머물러 있기를, 머리보다 먼저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맛볼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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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 2019년 3월 17일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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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   [부산]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5] 2263
714   [마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4] 2340
713   [대구] 우리도 함께 가겠소  [4] 2235
712   [인천] 부활은 새로운 시작  [3] 2236
711   [서울]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4] 2684
710   [대전] 우리 곁에 살아계신 주님  [1] 1975
709   [청주] 주님과 함께라면  [1] 143
708   [춘천] 말씀에 귀 기울여라  [2] 2273
707   [원주] 일상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103
706   [광주] 증거하는 삶  2180
705   [전주] 일어나시오.  [2] 110
704   (백) 부활 제3주일 독서와 복음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2] 1913
703   [수도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1] 2159
702   [수원] 이성(理性)을 초월한 신앙  [3] 2212
701   [춘천] 백견(百見)이 불여일신(不如一信)!  [3] 2300
700   [의정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 2126
699   [인천] 사람을 믿어도 행복한데 주님을 믿으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2] 2182
698   [대전]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477
697   [서울]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4] 2117
696   [안동] 문제가 없으면 그게 문제  [2] 1980
695   [부산]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3] 2186
694   [대구] 공동체를 지켜라  487
693   [마산]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4] 2165
692   [전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품으로 달려갑시다.  [1] 2092
691   [광주] 평화가 너희와 함께!  102
690   [군종] 우리의 의심과 불신앙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  2025
689   [청주] 자상한, 친절한, 자비의 예수님  [1] 97
688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독서와 복음  [2] 1628
687   [수도회] '착해빠져' 탈인 사람  [2] 1972
686   [인천] 무언의 가르침  [2] 1997
685   [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6] 1972
684   [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2] 2044
683   [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5] 2116
682   [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3] 1641
681   [군종] 이 세상에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2] 1904
680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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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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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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