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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십자가의 길은 주님이 가신 길, 구원의 길.
조회수 | 2,443
작성일 | 07.03.03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님의 신적(神的) 광채에 취한 베드로는 [초막을 짓고 계속 머물기를] 청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죽음의 길을 계속 가신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음을 명심하자.

1. 이분이 누구 신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그리고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만일 우리가 함께 등산을 하던 은사님이 갑자기 [모습이 변하며 옷이 눈부시게 빛이 나서] 도저히 바라 볼 수 없게 되는 일을 체험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우리도 베드로사도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꿈인가 아닌가 하며 자신을 꼬집어 볼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여러 차례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그분의 권능을 체험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 9,20)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었다. 그런데도 함께 먹고 마시며 길을 걷고, 목말라 하시고, 피로해 하시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시고, 분노하시는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셨던 그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며 옷이 눈부시게 빛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 신성(神性)의 면모를 보여주신 것이다. 게다가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성부의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신원(身元)을 밝혀주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려고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는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2.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머리에서 뿔처럼 빛을 발했던 모세는 십계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고 , 불가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우상의 가짜 예언자들을 격파하였다. 그들은 율법과 예언으로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의 눈부시고 황홀한 모습을 목격한 베드로는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홀경에 취한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가9,33)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제안에는 응답도 없이 산을 내려오셨고,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베드로는 기쁨과 희열의 순간에 그대로 안주하고자 하였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던 것이다.

3. 십자가와 죽음 없는 부활과 승천은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적였다.](루가9,29)고 전하고 있다. 신앙인은 때때로 피정이나 연수회나 기도모임(묵상회) 등을 통해 신앙이 없는 이들이 체험할 수 없는 영적인 체험을 한다. 타볼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기쁨과 희열, 은총의 감미로움을 체험할 때가 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니던 몇몇 제자들이 한 순간 경험했듯이, 그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언젠가 얼굴을 맞대고 볼 천상 행복의 조각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이런 영적 희열을 추구해야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채우기 위한 희생과 헌신, 자기 비움과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고, 영적 위안에만 매달린다면 그것은 성숙한 신앙자세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겨야 한다.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몫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과의 싸움의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다.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하지 않고 부활에 이르는 길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필리3,18)고 말씀하신다. 나의 삶은 어떤가?

우리 시대의 문제는 [쉽고 편한 것은 다 좋은 것이고, 어렵고 힘든 것은 다 나쁜 것]인양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어려울 때에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때로는 영적인 위안과 위로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현세적인 복을 얻는 데만 열중하는 기복종교(祈福宗敎)가 아닐뿐더러, 심리적인 위안만을 찾는 종교는 더욱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사순절을 맞아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로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깊이 묵상하며, 일상생활의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속죄와 구원의 의미를 발견토록 하자. 이것이 구름 속에서 들려온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일 것이다.

▶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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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모습을 바꾸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갑자기 온 몸이 변하고 옷은 눈부시게 빛났다. 현실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예언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웠을까. 베드로는 그곳에 오래 머물자고 했다. 평범하고 조용했던 주님께서 왜 이렇게 찬란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을까.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내다보셨다. 제자들의 절망과 방황도 내다보셨다. 그때를 대비해서 당신의 천상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 생각해 본다. 수난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서라는 것이다. 오늘의 체험을 떠올리며 의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당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처럼 생명의 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암시다. 그러니 변모 사건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했던 위안과 격려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순간이었지만 영원을 목격하고 체험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스승에 대한 확신을 더 깊이 간직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체험이 없을까. 우리에게는 그분의 변모 사건이 없을까. 신앙 안에서 낙심하지 말라고 그분께서 개입해 오신 사건은 없을까. 이것을 찾아내어 묵상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이다.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린다. 고통과 역경 속에 놓이게 되면 좋았던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제자들도 그랬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수난의 순간이 오자 스승의 죽음을 이해 못하고 절망에 빠진다. 변모 사건의 기억도 소용없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주님께서 다시 다가 가셨기에 제자들은 사도로 바뀔 수 있었다.

우리도 영세 후 많은 은혜를 받았다. 신자가 되기 전에도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왔다. 진정한 신자는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잊어버리면 감사할 수 없다. 잊지 않기에 감사할 수 있고 그래야 신앙은 힘이 된다. 누구에게나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은 있기 마련이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라.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많았던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마무리되었던가. 우연인 듯 느껴져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 역경을 만나 기도했는데 역경이 끝난 뒤에는 우연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인가. 너무 쉽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유혹인 것이다.

신앙인에게는 반드시 은혜로운 기억이 있다. 고통으로 왔다가 안도와 유익함으로 마감된 사건들이다. 주님의 개입 없이 가능했을까. 신앙 안에서 힘을 내라고 그분께서 베푸신 은총이며 신앙인 각자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변모 사건이라 해석해 본다.

은총은 예고 없이 온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온다. 하느님은 아버지시기에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그냥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평소의 작은 기도가, 작은 선행이 결정적 순간에 은총을 모셔오는 것이다. 그분께서 한번만 봐 주셔도 우리의 운명은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변모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가끔씩 부활을 생각해야 한다. 무작정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부분이 부활해야 할지 생각하며 사순절을 보내자.

▶ 신은근 신부
  |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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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게 말합니다. "하늘을 쳐다 보아라.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희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이 말씀을 읽은 형제자매 여러분! 아브람과 같이 여러분의 후손도 많아지기를 빕니다. 자손이 많은 것은 재물 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기 1,28) "자식은 주님의 선물이요, 태중의 소생은 상급이다."(시편 127,3)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자식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같구나."(시 128,3) 성경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란 두 동창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공부를 잘 해서 미국 유학까지 갔습니다. 다른 한 친구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둘 다 노인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출세했던 친구는 은퇴해서 귀국했습니다. 옛 친구 가까이에서 삽니다. 그런데 그는 부인과 단 둘이만 살고 있습니다. 어릴 때 공부 못했던 그 친구는 고향에서 살면서 결혼하고 자손들을 많이 두었는데, 무려 70명의 자손을 두게 되었습니다. 출세하여 미국까지 다녀온 그 노인이 행복한가? 아니면 고향에서 살고 지금 자손이 70명이 나 되는 그 친구가 행복한가?

귀국한 노인 친구가 하는 말이, "나 보다 자식이 많은 저 친구가 행복합니다. 저 친구가 출세를 했지, 내가 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아내와 단둘이 외롭게 살지만, 저 친구는 많은 손주들과 살면서 외롭지 않습니다. 저 친구가 성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식 복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자녀를 많이 낳아 기르는 것은 주님의 창조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에 맞게 자연의 법에 순응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섭리를 거슬리며 삽니다. 30여 년 전에 정부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하여 인구조절 정책을 폈습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 낳아 잘 기르자!" 였습니다. 이 정책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정면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교회는 정부의 시책을 적극 반대했습니다.

자연을 거슬러서 하는 인위적인 인구 조절은 무서운 낙태란 죄까지 서슴없이 자행하게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오늘날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도덕적 불확실성이라는 풍조는 죄의 구조에 빠져들 수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교황님은 "피임과 낙태는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악입니다. 전자는 부부의 정당한 애정의 충만한 진실을 훼손하는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다. 전자가 혼인의 순결과 대립되는 반면에, 후자는 정의라는 덕목에 대립되며 ' 살인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직접 침해하는 것이다"(생명의 복음 1장)고 했습니다.

교황님은 "오늘날 강력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경향들이 죽음의 문화를 활발하게 조장하고 있다... 효율성에만 관심을 가진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세상을 부추기고 있다. 쾌락주의적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그 행위들 속에는 출산을 자기 성취의 방해물로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자유의 개념이 내포되어있다"(생명의 복음 1장)고 했습니다.

자식을 기를 때는 힘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힘들게 키워서 어른이 된 자식들은 부모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자식은 그 어떤 돈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큰 재산입니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내 개인의 성취욕을 위해서 힘든 다고 자식을 낳지 않고 산다면 노년에는 후회하고 또 후회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행복 중에 자식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음을 잊지 맙시다.

▶ 신정목(우르바노)신부
  |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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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재촉하는 절기 우수雨水가 지났다. 봄비를 맞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잠에서 깨어나듯 기지개를 켜고 깨어난다. 우수 다음에 오는 절기가 그래서 경칩驚蟄이다. 경칩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숨어있는 것들蟄이 놀라서 깨어난다驚는 뜻이다. 절기節氣의 이름을 짓는 옛사람들의 지혜가 감탄스럽다.

곳곳에서 매화梅花는 꽃망울을 터트리고 향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까만 삭정이 같은 저 가지에서 어떻게 저런 꽃이 나올 수 있을까? 저 향기의 정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놀랍고 신기해서 가지 하나를 꺾어 그 안을 샅샅이 살펴보고 싶다. 가지 속에 무엇이 들었기에 이리도 예
쁜 꽃이 피고 아름다운 향기가 난단 말인가.

틀림없이 겨우내 칼날 같은 찬바람과 살을 에는 듯 매서운 추위를 견디어낸 보상이겠거니. 매화와 그 향기는 거룩한 변모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높은 산에 오른다. 산 정상에 다다른 예수님께서는 기도 삼매경三昧境에 빠진다. 예수님의 얼굴은 태양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얗다. 세 제자들은 얼이 빠져버린다.

나자렛의 목수 출신(마태 13,55)으로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무식한 예수.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마태 8,20) 떠돌이 수행자 예수.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인 예수 안에 저토록 놀라운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니. 더구나 온 이스라엘이 하느님 다음으로 떠받드는 모세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로 나타나 호위하고 있다니.

세 제자들은 그곳이 천국인양 영원히 머물기를 원한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루카 9,33)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피땀이 흐르는 고뇌의 시간, 가시관으로 정수리가 찔리고 매질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고통의 시간,

십자가 위에 매달려 단말마斷末魔의 비명을 지르는 죽음의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진정한 영광을 보게 되리라. 매서운 추위를 이긴 매화가 화려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내뿜듯이.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깨워 하산下山 한다.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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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산이 갖는 의미

오늘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곳은 바로 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산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고,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 역시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 산에 자주 오르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는 내용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기에, 그래서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시련과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으셨기에 예수님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삶의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산에 오를 때마다 누리는 행복, 그곳에서

누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숨결, 그리고 한없이 밀려드는 기쁨, 그 평화 인간 예수께서 당신의 신적인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이 산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오는 숱한 고통과 번민의 순간마다 산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그 산으로 예수님은 초대하십니다. 하느님 계신 그곳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초대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도 행복한 예수님을 보았고,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리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리시는 그 행복을 계속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 짜릿하고 전율을 느낄 수 있는 하느님 체험 안에 영원토록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을 느끼는 그 행복감에 머물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오르셨던 산을 미련 없이 내려오십니다.

산은 세상을 위해 준비된 휴식처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는 목적은 다시 내려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짧은 순간의 위로와 행복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하느님의 그 깊은 사랑을 나누어주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산에 대한 어설픈 체험은 초막 셋을 지어서 그곳에 머물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하느님 체험은 쪼개지고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일의 피로와 상처와 아픔을 주일미사를 통해 주님께 맡겨드리고 이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축복과 위로를 받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미사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축복과 위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하느님 체험은 미사가 끝나고 난 뒤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들의 사명이고 삶입니다. 올바른 표양과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일 미사를 참례하러 성당이라는 산에 올라왔습니다. 이제 조금 있다가 하산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산을 내려갈지 어떤 하느님 체험을 안고 세상으로 나아갈지를 묵상해봅시다.

▥ 마산교구 노중래 비오 신부 : 2016년 2월 21일
  |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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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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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며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 뒤로, 졸음을 참지 못하는 제자들이 보입니다. 밤낮없이 스승님을 따른 탓인지, 제자들은 고단했나 봅니다. 땀 흘리며 오른 산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제자들의 하루하루 같습니다. 스승님을 제대로 따르기에는 아직 미숙하고 제 십자가가 버거운 제자들입니다.

쉬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 속에 오히려 연민과 자비가 차오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설 수 있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꼭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 영광을 위해서 스승님처럼 십자가 죽음을 거쳐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이 제자들에게 위로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다시 일어서서, 스승님을 따르는 삶을 새롭게 시작(회개)하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천상 희망을 선물하십니다. 고난의 삶을 받아들여 영광 속에 머물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야훼 하느님께서 주셨던 그 위로가 제자들에게도 주어집니다.(탈출 33,7-11; 1열왕 19,9-18)

베드로가 했던 서약처럼, 굳이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순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도 구름 속에서 빛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 곁에 쓰러져 쉬고 있는 제자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많은 시련과 유혹에 맞서야 하기에 늘 적지 않은 수고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더군다나 우리 각자의 십자가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때문에 주님처럼 나름 기도 안에 머물러 보지만, 여전히 부족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럼에도 청해봅니다. 가끔은 지쳐 쉬고 있는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당신 자비의 눈길을 보이시고, 당신 영광의 짧은 순간이라도 허락하시기를 말입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처럼- 당신 말씀에 따라 누군가를 섬기고, 그를 위해 용서와 희생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모든 이들의 얼굴로 우리와 마주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사랑으로 빛나는 그들이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던 변모된 주님이 아니실는지요. 괜찮다고, 다시 일어서서 당신을 따르라 하시는 주님께, 당신 영광의 빛으로 사순 여정의 힘을 북돋우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꼭 끌어안고 그분을 따라 걸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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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동영 아우구스티노 신부 : 2019년 3월 17일
  |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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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   [마산]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4] 2165
692   [전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품으로 달려갑시다.  [1] 2091
691   [광주] 평화가 너희와 함께!  100
690   [군종] 우리의 의심과 불신앙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  2024
689   [청주] 자상한, 친절한, 자비의 예수님  [1] 96
688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독서와 복음  [2] 1627
687   [수도회] '착해빠져' 탈인 사람  [2] 1972
686   [인천] 무언의 가르침  [2] 1996
685   [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6] 1972
684   [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2] 2044
683   [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5] 2116
682   [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3] 1641
681   [군종] 이 세상에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2] 1902
680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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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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