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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조회수 | 2,385
작성일 | 07.03.15
어느 주일학교 유치부 선생님이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어린이들에게 설명해주며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집 떠난 아들이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슬퍼했을까요?"

한 꼬마 어린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누가 제일 슬퍼했냐면요, 살진 송아지요!"

맞는 말이지요. 송아지는 그날이 바로 죽음의 날이었으니까요.

오늘 복음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큰아들, 그리고 탕자라고 일컫는 둘째 아들입니다. 이 세 인물 중에 나는 어디에 해당하는지 한 번 생각해보며 오늘 복음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무한한 자비로움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뜻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죄인을 버리지 못하시는, 부모보다도 더 깊은 자비와 사랑을 가지신 하느님 아버지이시지요. 그러므로 감히 내 자신이 이 아버지에 해당된다는 말은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탕자인 둘째 아들에 속하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에 또 선뜻 수긍할 수가 없지요. 물론 우리도 가끔은 탕자처럼 방탕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기분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지요. 그러니 탕자에 속한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 세 명의 등장인물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굳이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큰아들에 가깝다고 손을 들 것 같습니다.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았으며, 아버지께 반항하고 아버지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내고 떠나버린 동생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큰아들입니다.

우리는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를 통해서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또 탕자에게서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회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와 가깝다고 생각한 큰아들에게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큰아들은 "보십시오,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29-30).

사실 큰아들은 동생처럼 어리석고 무모하게 방탕한 짓을 하지도 않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정말 아버지를 사랑하고 동생을 아끼는 사람이었는지는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두 배에 해당하는 재산을 큰 아들에게 나누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남은 재산에 욕심이 있었는지 큰아들은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큰 아들은 아버지의 남은 재산에 대한 욕심은 물론 뉘우치고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동생의 잘못만을 기억합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고 외치며 못된 동생을 지극한 사랑으로 맞아주며 대접하는 아버지의 잔치를 거부하지요. 절대로 돌아온 동생을 용서해 줄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속 좁은 형의 태도로 일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아들은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며 죄 지은 사람들의 과거를 끊임없이 들춰내면서 미래를 가로막고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을 아주 당당하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이 가르치는 것은 한 번 지은 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형식에 얽매인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의 냉정한 논리가 아니라,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온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따뜻한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큰 사랑만이 부족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가르치는 아버지의 가득한 사랑에 힘입어 어떠한 경우에도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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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용기

사순 제 4주일은 전례상 ‘기쁜 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순절의 반이 지났기에,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는 기쁨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등산객이 산 중턱을 넘어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때 느끼는 환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꼭대기를 바라보며 정복할 수 있다는 부푼 희망에 힘찬 발걸음을 계속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까마득했던 그 목적지가 이제 눈앞에 다다랐으니 그 동안의 ‘나의 노력'이, ‘나의 수고'가 보람이 있구나 하며 스스로 감격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희생의 길, 기도의 길, 재계의 길, 십자가의 길이 그렇게 힘들고 고된 길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쁨으로 또 다른 새 출발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가장 짧은 단편 소설 ‘탕자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그 탕자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바로 현대 교회에 사는 미지근한 신앙인인 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만 있다면 문제없이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아버지와 가정을 떠나 마음대로 지냈지반, 결국에 가서는 알거지가 된 다음에야 후회하는 탕아. 이제는 먹을 것도 없어서 남의 집에서 종살이, 돼지 먹이로 굶주림을 달래야 하는 신세, 참으로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탕아는 겸손한 자세를 배웠고, 용기있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오만한 자존심, 유치한 자만심을 버렸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야지!"하는 결심과 함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아들이라 불리기에 부당하니 그저 종으로서만도 착실히 지내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고려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이니,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종으로만 삼아 달라고 간청하는 이 탕아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아버지는 탕아를 껴안고 '잃었던 아들'의 재회를 기뻐하였습니다. 떠나 달라고 간청한 사도 베드르의 기도 대신 예수님은 더욱더 가까이 오시며 베드로를 감싸 주셨습니다. “아버지, 저는 부당합니다. 종으로만 써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하는 기도는 거절이 아닙니다. 너무나 황송하여 자기의 처지를 이와는 다르게 표현할 수 없는 참된 고백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습니다. 교회를 가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을, 착함을, 나 자신을 재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너무나 자신만만해서 신앙 하나면 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 착하기만 하면 되겠지 하는 순진함에서, 더구나 '나야, 뭐, 누가 뭐래! ' 하는 철부지의 영웅심에서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는 하느님을 떠나, 교회를 떠나,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는 현대의 탕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신앙도 잃고, 착함도 잃고, 자신도 잃었습니다. 이제는 절망뿐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해 본 지도 오래이고 성당에 가 본 지도 오래입니다. 더구나 고백의 성사를 받은 때는 기억조차 나질 않습니다. ‘기도도 해야 할 텐데, 성당에도 가야지. 성사도 봐야지!’하면서도 손이, 발이, 입이 떨어지지가 않음은 웬일일까요 ?

복음의 탕아는 겸손했습니다. 용기가 있었습니다.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껴안고는 기뻐서 제일 커다란 잔치를 해 주었습니다. 현대의 탕아인 나, 나는 교만합니다. 용기가 아니라 비겁하기만 한 위선자입니다. 고백은 하지 않고 묵비권과 거부권만 행사합니다. 그래서 잔치상은 준비되었지만 바라다보기만 하는 처지입니다.

탕아의 길, 그것은 되돌아오기만 하면 착한 아들이 되는 길입니다. 그 되돌아오는 길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탕아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그 탕아는 착한 아들이 되는 길만을 따라서 걷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이 탕아인 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가정을 떠나서 오랫동안 헤맨 현대의 탕아입니다. “되돌아서야지!"하는 결심으로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

▶ 함세웅 신부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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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사순 제 4주일은 전례 상 ‘기쁨의 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순절의 반이 지났기에,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는 기쁨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등산객이 산 중턱을 넘어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때 느끼는 환희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꼭대기를 바라보며 곧 도착할 수 있다는 부푼 희망에 또다시 새롭게 출발하라는 의미입니다.

기쁨의 주일인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말씀입니다.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보나, 정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구나 생각이 듭니다. 정말 그렇게 자신이 부모의 속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는 마음에 못을 탕탕 박아 놓더라도.. 자식의 사과와는 상관없이... 자식의 사과를 뛰어넘어 용서해주는 것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의 마음입니다.

복음은 늘 자식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의 모습과 마음을 하느님의 모습과 마음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떠나간 아버지의 품으로...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올 것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을 대하며 소홀히 할 수 있는 문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할 아들은 둘째아들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곧, 회개해야할 존재는 둘째 아들만이라는 그릇된 판단입니다. 물론, 지금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 라는 제목이지만, 공동번역에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 라는 제목이어서 둘째 아들에 초점이 맞춰진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둘째아들의 모습의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쉬는 교우들을 둘째 아들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쉬는 교우들을 둘째아들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바로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교회에 잘못을 했으니, 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떠나간 하느님의 품으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큰아들의 경우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 큰아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반성해 봅니다.

큰아들은 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정작 마음으로는 아버지를 떠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집나간 동생을 부러워하며 ‘나도 그렇게 할걸..왜, 무엇 때문에 그러지 못했나... 큰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인가?’ 라며 아버지를 비난하고, 동생을 미워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불평과 불만, 분노 속에서 살아갔기에, 동생이 돌아오자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못마땅하게 보이고, 미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싸였던 불만을 터트리며, “이게 뭡니까?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동생이 오니 잔치를 베풀어 주시다니요.” 라며 아버지께 대드는 것입니다. 도저히 잔치 집에 갈 수 없다며 떼를 쓰는 것입니다.

종종, 아니 너무나 자주, 큰아들의 모습일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계명이.. 고해성사를 보아야하는 것이 귀찮고 부담되게 느껴지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많은 모임 활동과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남의 눈치나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봉사의 기쁨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자유, 재능, 시간 등을 내어드리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르게 됩니다. 상대방의 대해 쉽게 말을 하며 판단하게 되고, 상대방을 시기, 질투하는 것을 넘어, ‘에이, 저 사람 있으면 나 성당에 다니지 안허켜...’라며 냉담에 까지 이르게 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모습은 바로 아버지와 늘 함께 살아간다고 하지만, 정작 그러한 아버지를 떠난 큰아들의 모습입니다. 늘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을 떠나 있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위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 이익만을 위한 신앙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런 경우는 늘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정작 아버지 편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요, 되찾아야할 아들인 것처럼, 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느님을 떠난 신앙인 것입니다.

잠시, 생각해 봅시다. 과연 하느님 앞에서 나는 큰 아들일까요? 작은 아들일까요? 작은 아들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겸손되이 인정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청하면 됩니다. 실제, 하느님께서도 ‘잘못의 인정’ ‘죄의 고백’만을 원하십니다. 그러한 고백을 한 순간, 우리는 초라한 옷을 버리고, 영적인 옷으로 갈아 입혀 주십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신을 신겨 주며 잃었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둘째아들의 경우는 성당에 나오지 않아서 문제지, 나온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고해 성사를 보는 그 순간, 이 모든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회개할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린 많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처럼,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정작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아버지와 큰아들의 대화중 아버지말만 전하고 큰 아들의 말이나 행동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큰 아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기에 그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큰 아들의 모습이든, 작은 아들의 모습이든, 아무 상관없이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그러나, 우리가 성당에 나온 오늘 이 순간만은, 우리는 작은 아들이 아니라,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한 하느님의 잔치집 앞에서...“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우리는 어떠한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까? 잔치 집에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여전히 잔치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는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라는 둘째 아들의 진정한 통회와 용기가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느님께서도 자녀인 우리를 이기지 못하는 그러한 부모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 이찬홍 신부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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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

루카 복음서에서 오늘 복음구절을 찾아보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어린 소신학생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정진석 추기경님이 그 당시 저희 반 담임 신부님이셨고 라틴어를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교재는 15세기의 독일 가톨릭 신학자 에라스무스가 성경을 재해석하여 쓴 라틴어 성경이었습니다. 어느 날, 바로 오늘 복음 구절을 독해하던 중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갑자기 저희에게 “동구 밖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지쳐서 돌아오는 작은 아들 중에 누가 먼저 상대를 알아봤을까?”하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그 다음 구절을 읽어 주셨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알아보았다.” 에라스무스의 멋진 표현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이 복음 구절의 제목이 틀렸다고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면 집 나간 아들이 주인공인데, 이 이야기의 주제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이고 그렇다면 이 비유의 주인공은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의 제목을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라고 써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 주신 마치 하나의 단편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신자든 비신자든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감동적입니다.

오늘 주일을 교회는 ‘Laetare(즐거워하여라) 주일’이라고 부르고, 제대도 꽃으로 꾸미며, 사제의 제의도 장미색으로 합니다. 보속과 재계의 시기인 사순절에 이 무슨 일일까요? 오늘 미사의 입당송으로 이사야 예언서에서 인용된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라는 구절로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워해야 할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들은 무시하고 돈을 최우선으로 꼽습니다. 차기 대통령 후보들도 모두가 경제회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경제만 회복되면 우리는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거기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합니다. 어느 날 정신이 들 때 우리가 너무도 많은 가치 있는 것들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고, 그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다시 아쉬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돌아가면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받아 주실 것입니다.

꼭 이렇게 악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이 회개의 사순절에, 그 중에서도 오늘 지금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 주실 것이고, 우리는 다시 삶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참으로 ‘즐거워하여라. 주일’이 될 것입니다.

▶ 백남용 신부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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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고통

‘탕자의 비유’쯤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오늘 복음 말씀은 사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칩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이로 여기고 제 몫으로 돌아올 것을 챙긴 둘째 아들의 행위는 분명 패륜입니다. 그가 겪은 고통과 수모는 정의의 실현이라 함이 옳습니다. 뉘우쳤지만 아버지께 돌아가는 그가 참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만신창이로 돌아오고 있는 그를 아버지는 멀리까지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복음은 간단히 ‘가엾은 마음’이라설명합니다. 아버지의 이 ‘가엾은 마음’을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를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신 마음이라 설명합니다. 수도 없이 당신께 등을 돌린 이스라엘이지만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버리시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셨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 아들을 죄로 만드셨을까요? 하느님께서 품으신 인간에 대한 사랑은 차라리 극단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허구의 것 혹은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현상들이 허다합니다. 복음의 둘째 아들처럼 그렇게 패륜의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음에도 바닥까지 곤두박질 치는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려받을 유산이라고는 ‘빈곤’밖에 없는 젊은이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돌아온 탕자라도 가엽게 여겨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고”, 게다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벌여줄 몇몇 높은 분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이대로 영원히’를 노래하지만, 대다수의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은 “곤궁에 허덕”이고 “돼지 치는 일”자리마저 구걸하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발전과 성장, 그리고 ‘고진감래’를 들먹이며 고통을 강요하는 이들은 태연하기까지 합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세계에서 굶주리고 있으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개인과 정부에 촉구한다. ‘굶주림으로죽어 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지 않으면 그대가 죽이는 것이다’고 한 교부들의 말씀을 상기”(사목헌장,69항)합시다.

패륜한 아들의 목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죄로 만들면서까지 움켜쥔 하느님의 그 고통스러운 사랑을 값싼 허구의 이야기 소재쯤으로 여긴다면, 하느님 앞에 너무 부끄럽고 염치없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회개와 참회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 박동호 신부
  |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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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물론 우리들의 경험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즉시 벌을 주지도 않으셨고 우리의 회개가 다소 늦어진다 하더라도 성급하게 진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더딘 징벌이 과연 우리에게 이익이 되거나 안심해도 되는 상황일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여호 5,12)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울부짖던 이스라엘 민족을 가엾이 여기시어 모세를 시켜 구해내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진노하시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아 가나안 땅에서 구원의 은총을 상징하는 첫 소출을 먹기까지 4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내하시어 그들을 당장 멸망시키지는 않으셨지만, 광야에서의 40년 생활이 결코 그들에게 이익이 될 만한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작은아들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며 방탕하게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작은아들은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달라는 작은아들을 마주한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시고 큰 잔치를 열어 주십니다. 이렇게 작은아들은 밑바닥까지 떨어져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회개함으로써 고통의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었으며, 아버지의 사랑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40년을 광야에서 보낸 이스라엘 민족과 즉시 아버지께 돌아와 죄를 고백한 작은아들 중, 누가 더 현명하다고 판단하십니까?

어쩌면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민족과 큰아들이 같은 부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아들은 아버지의 관대한 처사에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불만을 표현합니다. 게다가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아버지의 위로의 말에도 큰아들은 시큰둥합니다. 사실 우리는 큰 죄를 지으며 살지 않는다고 마치 하느님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의인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에 게을러지기 쉽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회개도 지연시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회개도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2코린 5,19) 만드셨다고 언급합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시지만, 하느님의 본심은 우리가 당신과 화해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후한 처사에 양심이 무디어지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후한 처사에 반감을 갖지 말고, 즉시 회개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서울대교구 전영준 신부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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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천을 짜거나 바느질을 하는 데 쓰이는 실은 꼬이거나 매듭이 생기면 제 역할을 못 하게 됩니다. 더구나 실타래가 엉키면 정말 난감해집니다. 그런데 우리 삶도 이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서로 아름 다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삶의 실타래가 꼬이고, 심하면 매듭이 생겨 상처로 남기도 하고, 때로는 끊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 자리한 이 꼬임과 매듭을 풀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서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할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은 그 자체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저 고민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는 앞선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님을 위한 24 시간’을 지냈습니다. 프란치스코교황은 이날 동안 고해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고해성사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는 길, 삶의 의미를 되찾는 길”(「자비의 얼굴」, 17 항)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고해성사를 통해 체험한 하느님의 깊은 자비를 모든 신앙인이 간직하기를 원하십니 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 체험이 서로를 용서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의 도구가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음을 깨달아 우리도 남에게 관대하게 대하라.”(「자비의 얼굴」, 14항)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 일깨워 주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인데도 상속을 요구하여 재산을 받은 작은 아들의 잘못된 삶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났고, 재산을 허비했습니다. 또 부정한 동물로 취급되었던 돼지를 키우는 이방인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돼지들이 먹는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처지에까지 이르러 그는 문득 아버지를 떠 올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이제나저제나 매일 집 밖에 나와 아들을 기다렸던 아버지는 멀리 떨어 진 상태에서도, 초라한 모습임에도 먼저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도 이처럼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라고 권고합니다. 그동안 하느님을 잊고 외면했던 우리에게 하느님은 당신께로 돌아오라고 초대합니다. 사순 시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성사표’는 당신 자비를 체험 하라는 하느님의 소중한 ‘초청장’입니다. 이제 자비로운 사랑의 하느님과의 화해를 체험하고 그 자비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삶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 : 2016년 3월 6일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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