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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아버지의 품으로
조회수 | 2,240
작성일 | 07.03.15
사람이 눈으로 본 것을 뇌가 깨닫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라고 한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불과 0.03초에서 0.4초가 걸린다는 것인데, 흔히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그렇게 짧은 순간에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많은 영화 중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그때뿐이지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영화를 볼때의 마음같이 감동이 느껴지면서도 오래오래 긴 여운을 남기는 그런 영화도 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가 그렇지 않나 싶다. 이 비유는 그렇게 더 없이 아름답고 진한 감동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아주 후하게 넘치고 한없이 베풀어지기만 하는 사랑의 감동이다.

루카 복음서에서만 나오는 이 비유는 흔히 '되찾은 아들'의 비유로 불려지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비유의 핵심은 아버지의 사랑에 있고, 또 그런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주인공은 바로 아버지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이 강조되어 있으며,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선다면 죄인인 우리를 다시금 품어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인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깨달았을 때,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 죄인들이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진정한 회개의 마음으로, 따뜻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사순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 김명식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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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하느님의 잣대로

용서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은 자신의 작품 ‘예언자’에서 이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살해당한 자, 자기의 살해당함에 책임 없지 않으며, 도둑맞은 자, 자기의 도둑맞음에 잘못 없지 않음을, 정의로운 자, 사악한 자의 행위에 전혀 결백할 수 없으며, 정직한 자, 중죄인의 행위 앞에서 완전 결백할 수 없음을.

그렇다. 죄인이란 때로는 피해자의 희생물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때로는 죄인이란 죄 없는 자의 짐을 지고 가는 자인 것을,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사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를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누구누구를 용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더구나 그 용서할 수 없음이 우리를 가장 괴롭히고, 영적 자유의 걸림돌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용서는 절대로 내가 아닌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자비에 우리 자신과 타인의 잘못을 내어 맡길 따름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그토록 끔찍하게 처형하는 자들을 용서하시지 않고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내가 용서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용서하심이란 확신이 설 때, 내 자신은 이제껏 가졌던 용서의 칼자루를 감히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겸손이 있을 때, 용서의 위치 변동이 있을 때, 진정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길고 어두운 미움과 증오, 분노와 복수의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용서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함은 첫째,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둘째,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선과 악에 대한 그 어떤 선을 그어 판단할 수 없음을, 셋째, 세상 그 어떤 죄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회개하면 모두 용서받을 수 있어도 ‘용서하지 않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음을, 넷째, 너무도 가슴 터지는 분노를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진실로 타인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할 때, 비로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더욱 크게 가슴에 다가올 것입니다.

용서의 아버지와 큰아들

제 책상 앞에는 독일 베네딕토회 수사님이며 칠보기법의 성 미술 세계적 권위자이신 ‘에기노 바이너트’의 ‘되찾은 아들’ 작품이 있습니다.

바이너트 수사님은 1945년 폭발사고로 오른손을 잃고 왼손 하나로 작업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비유’로 유명한 그의 작품을 보면 머리가 백발이 되신 아버지께서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기쁘게 맞아 안아 주는 모습 밑에 난쟁이 같은 큰아들이 잔뜩 화가 나서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싸움이라도 한판 할 것 같은 자세로 서 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큰아들을 그토록 작게 표현한 것은 큰아들의 작은 마음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든 자녀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는데, 큰아들은, 우리들은 가족을,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이 심판관이 된 양, 우리들 마음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저울질하며 단죄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큰아들의 경우를 봅시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 30).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대놓고 따집니다. 그는 집에서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종처럼 일만 하였습니다. 참으로 칭찬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고 그리하였습니다. 그리고 큰아들의 대꾸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처럼 종같이 일하며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가 멀리 떠난 동생의 가산 탕진 내용을 곁에서 본 듯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동생이 술로 탕진하였는지, 도박으로 탕진하였는지, 요즘처럼 주식에 투자하여 날렸는지, 큰아들이 어찌 알고 대뜸 창녀들과 어울려 가산을 탕진하였다고 말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이미 큰아들 마음에 창녀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하느님만이 보이고, 강도의 눈에는 강도만 보이는 법입니다. 결국 큰아들과 같은 눈과 마음의 판단을 지닌 상태로는 남을 관용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에 대한 용서를 하느님께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배광하 신부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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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동구 밖에 서서 행여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는 아버지, 먼 곳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눈은 깊이 패여지고 짓물러 있다. ‘사랑하는 아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돌아오기만 해라.’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면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라,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예전 아버지의 아들 자리를 돌려주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사랑스럽나 보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 하느님 아버지 사랑을 나는 많이 느끼고 있는 걸까?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한 아이에게 물었다. “부모님은 왜 그렇게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걸까요?” 아이가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이예요.”

하느님께서 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아드님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시며 우리를 살리시는 걸까. 세상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얘기며 현실이다. 그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현실이다. 어느 절대자가 자기가 지어낸 조물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 다는 건가.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유다인들에겐 수치요, 이방인들에겐 어리석음” 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잘 안 믿는다.

그런데 우린 십자가의 수치와 어리석음이 온 인류를 구한 것이라고 믿는다. 참혹한 처형틀이 구원의 표지가 되었다고, 죽음이 곧 삶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이다. 누가 봤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은총으로 믿음을 주시고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환하게 볼 뿐만 아니라, 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서 아주 온 몸으로 말춤을 춘다고 하면 대답이 될까?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봐도 너무나 완벽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상 어디가서 찾아봐도 이런 하느님이 또 계신 지, 또 다른 구원이 있는 지…. 가만히 앉아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다 보면 온 몸에 전율이 오고 눈물이 난다.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치시는 하느님! 그 사랑 받았으니 사랑을 전하고 싶다. 사랑만이 모든 것을 변하게 할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형제들이 핵을 개발해서 온 세상이 불안해 하고 있다. 그 형제들은 사랑을 받지 못했나보다. 하긴 온 세상이 다 욕을 하고 미쳤다고만 하니까 변할 수 있을까? 성경에 자기 형제더러 바보라고 하면 중앙법정에 넘겨지고, 미쳤다고하면 불붙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는데… 우리들 중엔 형제더러 미쳤다고 하는 놈들만 많고 진정으로 대화하고 사랑하려 하는 사람은 적으니 그게 참문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구원으로 나아가는 걸까? 오직 사랑뿐이다. 믿는다면 실천해야 한다. 사순절 잘 보내시길!

춘천교구 오세호 신부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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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하느님의 자비

오늘의 복음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고 회개하는 죄인을 사랑으로 품어주시는지 비유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밥을 먹는다고 못마땅하게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미리 물려받아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가 거지가 되어서야 돌아온 작은 아들과 아버지 곁에서 순종하며 착실하게 살아온 큰 아들이 나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보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루카 15,21) 그러나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돌아온 작은 아들을 사랑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성대한 잔치를 엽니다.

한편 큰아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대하여 크게 화를 내고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부드럽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 31) 아버지에게 죽었다가 살아난 작은 아들이나 자기 곁에서 착실하게 살아온 큰 아들이나 둘 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지중지하는 자식들입니다. 다만 자식들이 아버지 곁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제2독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화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코린토2서 5,17-19)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또한 우리들이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 자신 역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살아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작은 아들처럼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와 은총의 사순시기를 살아갑시다.

▦ 춘천교구 강동금 베드로 신부 : 2016년 3월 6일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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