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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아버지의 마음으로
조회수 | 2,285
작성일 | 07.03.15
넌 센스 퀴즈 하나.
  
오늘 복음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챙겨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이 거지 몰골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용서하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과는 달리 이 작은 아들의 귀환을 가장 싫어했던 이가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 들으신 분은 ‘살진 송아지’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사순 4주일인 오늘은 ‘즐거워하라 주일(Dominica"Laetare")’입니다. 오늘 입당송에서 제3이사야는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애도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라고 환호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라 주일’인 대림 3주일과 함께 오늘을 장미 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오늘 사제가 장미 색깔 제의를 입고 이날을 기념하는 까닭은 희생과 속죄의 시기인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신자들에게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하는 권고와 함께 언제나 기쁨과 희망을 지녀야 함을 상징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우리는 루가 복음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복음 말씀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의 비유’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오늘의 말씀을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거지 몰골로 돌아온 작은 아들에 있지 않고, 그 허물 많은 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맞이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가 그토록 고대했던 자유와 해방을 찾아 떠났지만, 그가 이룬 것이라고는 돼지우리 안에서 배고파하고 있는 초라한 자신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자신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게 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아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떠난 그 순간부터 아버지의 기다림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지 몰골로, 냄새나는 몸으로, 힘없이 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무 조건 없이 맞이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들도 단죄와 선입견을 벗어 버리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 주위에 부족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다시금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천상교회의 잔치를 미리 맛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감사하다’, ‘행복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냉냉함에 빠져 생활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사실 우리들도 지금 작은 아들처럼 방황하며 살아가고 있는 가련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으로는 ‘이번만큼은 정말 잘 살아봐야지!’ 하고 수 없이 결심해 보지만 번번이 죄의 유혹에 빠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처럼 그분께서는 사람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건네시는 희망의 주님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시고, 언제나 기다려 주시는 자비로우신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 이기범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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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회하는 죄인의 무릎이 되자

돌아온 탕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화중 하나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에르미타슈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돌아온 탕자>를 꼽습니다. 그러나 이 성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성화는 루카복음 15장 11-32절이 그 배경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탕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자기 유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대꾸 없이 그냥 줍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먼 곳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먼 곳이란 과연 어떤 곳일까요? 방탕한 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창녀와 술이 넘치는 곳입니다.

살기가 어려워 배고픈 곳입니다. 거지처럼 사는 곳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그는 제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의 옷과 신발은 누더기가 되었고, 그의 머리는 죄수의 머리처럼 짧습니다. 그는 알거지가 되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은 것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입니다. 그 칼로 인해 그가 귀족 가문임을 나타내 줍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갑니다. 반쯤 장님이 된 아버지는 몸을 낮추어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습니다. 화가는 아버지의 속옷과 아들의 옷에 동일한 색상을 사용하여 두 사람의 깊은 유대감을 묘사해줍니다. 이 성화의 핵심은 아버지의 손입니다. 그 손에 모든 빛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손에 화해와 용서와 치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아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안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아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시는 어머니이십니다. 그래서 화가는 탕자를 끌어안는 손을 그릴 때, 아버지의 손과 어머니의 손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배에 고개를 파묻은 탕자의 모습도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죄인임을 고백할 때, 탕자처럼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체험하고 새로 태어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마치 큰아들처럼 그런 아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투덜대지는 않습니까? 죄인과 의인을 똑같이 대접한다고 투정하지는 않습니까? 사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사람은 큰 아들입니다. 긴 수염과 붉은색 겉옷은 물론이고 얼굴의 광채마저 닮았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긴 지팡이를 들고 두 손을 포갠 채 마치 심판관처럼 꼿꼿이 서 있습니다. 그의 자세가 너무나 올곧아 싸늘한 느낌마저 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죄인들의 교회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교회는 죄인들이 회개하는 곳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심판관의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죄인의 통회하는 무릎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도 돌아온 탕자처럼 무릎 꿇고 고백합시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껴안으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2-24)

그런데 돌아온 탕자가 노년이 된 렘브란트의 삶과 흡사하단 게 놀랍습니다. 그는 방탕한 삶을 살았고, 낭비로 모든 재산을 잃었으며, 부인과 두 딸은 젊은 시절에 잃었습니다. 그리고 노년에는 파산을 한 뒤 외아들 티투스마저 잃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그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화가는 이 성화를 그린 다음 해에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을까요?

▶ 손용환 신부
  |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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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 “회개하지 않으면...”(루카 13,3)

새 성경을 펼쳐보면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구절에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차지하는 분량이 제법 많기에 그 주인공이 작은아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비유의 주인공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며, 비유의 주제는 ‘아버지의 사랑’ 곧 ‘하느님의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이 복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종종 회자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이 그림은 루카 복음 15장의 강렬한 비유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고 있습니다. 이 화폭 속에는 작은아들의 귀한,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아버지, 큰아들의 서운함, 아버지의 동정심 등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화폭에 담긴 이야기들은 방황과 방탕한 삶에서 용서의 삶으로, 냉담과 질시의 시선에서 사랑과 환대의 포옹으로 나아가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특별히 이 화폭에 담긴 여러 장면 중 저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는 장면은 바로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품에 안는 모습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작은 아들에게 어떠한 책임을 묻지 않고, 벌을 내리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비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작은아들에게만 해당하는 자비가 아닙니다. 뒤에서 내심 동생을 질투하며 좀처럼 아버지와 내적 거리를 줄이지 못하고 있는 큰아들에게도 아버지의 자비는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순시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느님과 함께하기에는 잘못도 크고, 부족함을 많이 갖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 자체 바로 ‘나’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외적으로 방황하는 작은 아들과 내적으로 방황하는 큰아들 모두가 아버지 품에 머물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며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갖게 되는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모습을 숨기기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아버지 품에 돌아가는 은총의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군종교구 윤성민 그레고리오 신부 : 2016년 3월 6일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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