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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죄인이 죽기를 바라시지 않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조회수 | 2,460
작성일 | 07.03.16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혹시 예수님이 계시해 주신 하느님과는 너무나 다른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은 죄인과 잃어버린 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1. 서글픈 현실

어머니들이 앉아서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즘은 영감 할멈 늙어서 먹고 살 것 딱 챙겨놓아야지, 괜히 자식들 한데 다 주었다가는 큰일나! 암 그렇고 말고!"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이다. 핵가족화 되면서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기를 꺼리다 보니, 이제 부모들도 할 수 없이 스스로 자신들의 노후를 걱정하게 된 것이다. 옛 날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할 때에는 항상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예로 들었다. 그런데 부모 자식간의 사랑마저도 장사꾼 적인 거래가 된 것 같은 요즘의 세태를 보면, 어쩐지 세상이 삭막해진 것 같아 서글퍼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는 뉘우치며 돌아오는 작은아들을 무사히 살아왔다 하여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보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큰아들의 태도가 더 마음에 들지도 모른다.

루카 복음은 '잃었던 아들의 비유'와 함께, 아흔 아홉 마리를 들판에 둔 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의 모습을 전하는 '잃었던 양 한 마리'(루카15,1-7)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집안을 온통 쓸며 샅샅이 뒤지는 아낙네의 모습을 전하는 '잃었던 은전의 비유'(루카 15,8-10)를 들려준다. 이 말씀들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들이라 할 수 있다. 바리사이 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루카15,2)하며 예수님을 비난하자 비유들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고 당당히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회개하는 아들이 아니라, 그 아들을 큰사랑으로 용서하시는 사랑 지극한 아버지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 신지를 알려주신다.

2. 하느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흔히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전선(全善) 하시고, 영원하신 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보다 더 나은 하느님께 대한 설명은 없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시다. 우리는 계시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창녀와 함께 대표적인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삼으셨고(마태9,9-13), 세관장 자케오의 식사 초대에까지 기꺼이 응하셨다(루가19,1-10). 그리고 간음하다 들킨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짖지 마라."하시며 용서해 주셨고(요한8,1-11), 잘못한 형제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한다."(마태18,22)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당신자신을 우리 죄인들을 의한 속죄의 제물로 내놓으셨다.

전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하느님은 「잃어버린 자들과 죄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일찍이 신학자 한스 큉은 예수님은 인류역사상 「죄인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가르치신 유일무이한 분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모든 종교는 「죄인을 벌하는 신(神)」을 가르친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다. 예수의 죽음은, 예수님과 당시 지도자들이 서로 다른 하느님을 믿는 신관(神觀)의 차이로 빚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온 생애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가르치시기 위한 생애였다고 할 수 있다.

3. 참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

오늘 복음의 탕자(蕩子)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하며 아버지께로 발길을 돌려 회개하게 된 근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믿음보다 더 크고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이 미워지는 죄의 무게를 떨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도, 온갖 시련을 사랑의 채찍으로 알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나날이 늙어 죽음에로 향하고 있는 삶의 공허(空虛)를 견딜 수 있는 것도, 작은 일상의 삶에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참으로 하느님께서 무한한 사랑 자체이심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때, 어떤 죄(罪)도, 어떤 시련도, 죽음까지도 우리를 절망시킬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는 사도 바오로께서 깊은 체험을 통해 고백하신 거처럼 "죄(罪)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풍부하게 내렸습니다."(로마5,20)는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뉘우치기만 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타당한 부활 판공 성사로 진정한 부활을 준비하자.
지금이 바로 회개의 때요, 구원의 때이다.

▶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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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이신 하느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다. 어리석을 정도로 착하고 어진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다. 작은 아들은 재산을 억지로 물려받고 객지로 떠난다. 얼마나 기다렸던 가출인가. 돈을 쥔 그는 보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까운 돈을 물처럼 써버렸다. 어쩌면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재산을 달라 했을 때 몽땅 날리고 알거지가 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정신 차리고 돌아올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돈이 떨어진 아들은 힘이 없었다. 돈 힘으로 살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그는 인심도 잃어버린 듯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돼지가 먹는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고 하니 자존심도 팽개쳤다는 표현이다. 인간이 비참함을 체험할 때 은총은 시작된다고 했다. 작은 아들은 처참한 상황에서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돌아온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세 가지로 연상할 수 있다.

첫째는 꾸중하는 모습이다. 그래 이 녀석아 네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뭐 하러 왔느냐. 그 많은 재산을 어떡했느냐. 분노하는 아버지의 모습 앞에서 작은 아들은 무어라 답변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는 끝까지 침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잘 왔다는 소리도, 재산을 어떡했냐고 묻지도 않는 차디찬 모습이다. 어쩌면 그것은 꾸중하는 아버지보다 더 아프게 작은 아들을 괴롭혔을 것이다. 세 번째는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받아주는 바다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을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인간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다. 건강할 땐 건강의 고마움을 모르고 축복이 있을 땐 축복의 고마움을 잊어버린다. 언제까지나 건강과 축복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심한 경우 하느님의 도우심도 소용없다는 교만에 빠진다.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도 은총도 하느님도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착각에 젖어든다. 이런 모습의 출발이 복음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무력감과 비참함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별 이유 없이 건강이 나빠지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경험한다. 때로는 철저하게 준비한 일이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려 실패로 끝나는 것을 목격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자신을 너무 믿은 결과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분의 뜻은 외면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했기에 나타난 결과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작은 아들은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욕심 때문에 실패하고 자포자기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회개한 뒤에는 은혜에 보답하는 충직한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아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 또한 회개를 기뻐했다. 누구에게나 작은 아들의 경험은 있다. 실패와 자포자기의 경험은 있다. 축복이 은총이라면 실패 또한 은총이다. 어떤 아버지든 아들이 잘 살기를 원하지 시련 속에서 좌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실패의 체험이 은총이었음을 작은 아들의 비유에서 묵상해야 한다.

▶ 신은근 신부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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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시기인 사순절

형제자매 여러분! 극기와 보속과 회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지나온 사순절도 이제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한 땅에 들어가기 전에 치르는 중요한 두 가지 일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할례요 또 하나는 과월절을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할례이야기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의 1세대는 나이도 많아 죽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불신과 불경으로 그 자격을 상실하여 새로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후세들이 하느님의 새 백성으로 선택되어 할례를 받게 됩니다. 할례를 받은 이 백성들이 새로운 백성이며 새 땅으로 들어갈 주체라는 의미이며 과월절은 그들이 그 땅에서 소출된 것으로 하느님께 제사를 지냄으로서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세세대대로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가르치면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죽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소명 받았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너무나 잘 알려진 루카 복음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에서 드러나는 취지는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살았지만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는 형으로 대별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두 계층 곧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던 계층과 다른 한 편으로는 융통성 없이 율법을 지키면서 그저 정통성만을 내세우고 살면서 자칭 의인으로 거드름을 피우는 계층을 비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은 사람은 스스로 의인인 체 하는 율법 제일주의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고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말씀 요지는 새 사람, 하느님 안에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은 스스로 회개하는 자들이지만 그들의 회개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해와 지금은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동계 올림픽에서 선전한 우리의 선수들 때문에 잠시나마 행복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감동의 시기요 행복한 시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찾지 못하기 때문에 늘 어렵고 고달프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지식이나 재물 안에서, 권력이나 명예 안에서, 미모나 화려함 안에서 찾으려고 안달이지만 그곳에는 무지개만 존재할 뿐 감동은 없습니다. 우리의 감동은 감사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 한 끼의 식사를 줄이고 가난한 사람을 식탁으로 부르는 소박함 안에서, 나의지난 과실을 용서하는 형제의 너그러움에서, 잊혀진 나를 찾아주는 따뜻한 이웃의 손길 안에서 우리는 감사함을 느끼며 감동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동이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 그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아버지 저를 짐꾼이라도 써주십시오 ” “너는 내 아들, 죽었다가 살아온 내 아들”이라는 아버지의 말씀과 와싹 끌어안은 그 가슴은 감동의 도가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순절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도 돌아 가야합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새 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으며 새 하늘 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가 아버지께 돌아가는 감동의 시기이며 이웃을 위해 열려 있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 허철수 미카엘
  |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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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들은 일탈을 저지릅니다. 기존의 관습적 질서, 즉 아버지의 죽음 이후 물려받는 유산을 미리 청하는 일탈은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근데 더 의문스러운 것은 아버지는 왜 순순히 재산을 나누어 주었을까?하는 부분입니다. 뻔히 반항과 일탈을 알지만, 당신은 내버려 둡니다. 죄스런 상황 앞에 오히려 아버지는 죄인의 갈 길을 가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뿌리에 자리 잡은 독단자의 바보스러운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상태는 하느님으로부터 결별이며, 끊임없이 솟구치는 불평의 상황입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족과 실망을 통한 엄청난 시련의 길을 배웁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치욕스런 동물인 돼지가 먹는 열매로 배를 채우는 아들의 모습은 죄를 인식하거나 느끼지 못해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죄의 모습은 그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거슬렀을 때 임이 확연해집니다.

죄스런 인간을 아버지께서는 사랑의 연민으로 참을성 있게 기다리십니다. 오히려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며 용서하고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작은아들의 회개는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을 통해 죄의 노예 생활의 마감이자, 살아있는 희생 제물로 자신의 몸을 바치는 의로운 삶에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의 회개가 눈꼴사나운 이가 있습니다. 큰아들입니다. 큰아들은 자기 정당성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돌아온 죄인인 작은아들과의 관계를 망각합니다. 냉소와 분개가 작은아들에 대한 용서와 자비보다 앞섭니다. 이는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 자유로운 기쁨을 눈멀게 합니다. 이는 자신의 중심부를 둘러싼 보호막 유지에 혈안이 되어 모든 신앙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반복음의 행위입니다.

인간은 왜 일탈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려 할까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관한 끊임없는 자기실현의 욕구가 있기 때문이며, 욕구가 있는 한 기존의 질서를 뛰어넘으려는 탈주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습니다.

“저항은 창조이고 창조는 저항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삶의 저항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탈의 행위가 진정한 창조적 행위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중심부 콤플렉스와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작은아들은 무모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 곧 삶에 대한 결정적 항복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아버지와 화해합니다. 작은아들은 자기중심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납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 관계 회복, 곧 화해는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의로움을 드러냅니다.

아버지의 의로움은 큰아들의 자기 중심부 보호를 위한 ‘가장된’ 의로움과 다릅니다. 어느 순간 자신에게만 몰입되어 자기 긍정만 하는 큰아들에게서는 오히려 회심의 결정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해방과 창조의 행위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일탈과 반항, 불순종으로부터의 결별이 해방의 순간이자, 회심이라는 창조 ㅌ의 행위로 드러납니다. 회심은 죄를 뉘우쳐 재범하지 않겠다는 지평을 넘어섭니다. 회심은 온전히 아버지의 사랑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회심은 어느 것도 거부하시지 않고, 온전히 내어 놓으시고 마련하여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매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우리 심장에 흘러넘치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마산교구 김종훈 신부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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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말씀, 그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자비로운 아버지 앞에 선 두 아들의 태도는 극명합니다.

작은아들은 방탕하게 살며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하고 죽을 고생을 하고서, 그제야 자기 잘못을 후회하며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돌아와 용서를 청합니다. 그의 지난 생활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재산을 허비하며 타락한 생활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도 말아먹었지만, 그의 생활도 타락했습니다.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그는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고 돼지 치는 일을 하며 그것들의 양식으로 배를 채우고자 했으니 사람의 위신도 다 떨어지고 짐승이나 진배없었던 것입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재산 내놓으라고 호언하던 자기 모습과 되돌아가서는 그분 앞에서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를 구할 자기 모습 사이에서, 선 듯 나서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사리 용기를 냅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자!”

자비로운 아버지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작은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고, 그 아들에게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잔치를 벌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은 동생과 전혀 다릅니다. 아버지 곁을 지키며 그분 말씀을 어기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해 나가는 성실한 아들입니다. 그런 큰아들은 동생의 귀환이 기쁘지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의 종처럼 살아온 자기에게 대한 아버지의 보상이 모자란 듯 못마땅해 하고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키고, 큰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를 가리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을 만나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는 사이에, 의인이라 불리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두고 서로 수근 대며 불쾌하게 여깁니다. 부정한 인간들, 더러운 부류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행위가 눈에 거슬립니다.

법, 율법의 굴레를 넘어설 수 없는 사람들, 율법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을 의인이라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법을 넘어서는 “사랑의 행위”가 이해될 수 없습니다. 작은아들은 모든 것을 잘못했지만, 자기 모든 죄를 인정하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큰아들은 모든 일을 잘했지만, 단 하나, 아버지의 자비를 닮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이 둘 중에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기쁨의 주일, 장미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절제와 극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부활의 기쁨을 생각하며 ‘침통하게’가 아니라. ‘기쁘게’ 남은 사순 시기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기쁨은 혼자 누리는 기쁨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나의 구원을 생각하며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공동체와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뵈옵는 기쁨입니다. 50년 전 교회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중략)...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사목헌장 1)

▦ 마산교구 하춘수 fp오 신부 : 2016년 3월 6일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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