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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무르익는다는 것
조회수 | 2,055
작성일 | 07.03.16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기운 빠지게 하는 말을 찾아봤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껏 늘 그렇게 해왔어.”라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의 나이가 들수록 더욱 위험한 독을 뿜게 만드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차츰 결실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순간에 알갱이는 빠져버린 겉모습만 갖고 있다면 어찌 진정한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을 되짚어볼 수 있다는 것은 또 한 번 생명이 움트는 계절을 맞이하여 무르익어가는 기회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잃었던 삶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 장면을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되찾은 아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주며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화를 내는 큰아들의 모습처럼. 주님께서 오늘 우리 앞에 놓였던 수치를 치워주시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고진감래(苦盡甘來)도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음을 겸손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지난주 회개를 통하여 신앙인이 된 것을 기뻐하게 되었다면, 오늘은 그 신앙인의 모습이 영글어 가기를 기도해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2코린5,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움의 목적은 하느님과의 화해와 피조물들 간의 화해에 있음을 간곡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의로움은 모든이에 대한 사랑과 화해의 삶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무르익는다는 것, 그것도 신앙인으로서 무르익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은총의 시기에 깨닫게 됩니다. 오늘도 사랑과 화해의 삶이 되도록 이끌어주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어린이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 차호찬(시메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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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마세요

한 청년이 홧김에 실수로 살인을 범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의 아버지는 주지사를 찾아가 간절히 애원을 했지요.

“제 아들이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원래는 착한 아이입니다. 성격이 급해서 그러한 실수를 했으니 부디 사형만은 면하게 해주십시오.”

주지사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겸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이 사형수 역시 본성은 착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면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사면장을 안주머니에 넣고 감옥에 갇힌 청년을 찾아갔지요.

“여보게, 정말로 만약인데……. 자네가 사면을 받아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지금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주지사의 이 말에 청년은 매우 화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두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 사형을 선고한 판사와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 이렇게 두 사람을 말이지요.”

이 말을 들은 주지사는 과연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이 사형수에게 사면장을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면장을 가슴에 그대로 품은 채 조용히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만약 이 사형수가 남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면이 되어 다시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에 대한 원망으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사형수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 사랑을 오늘 복음의 탕자의 비유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사실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유대의 율법을 따른다면 많아봐야 17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줍니다.

유산을 미리 받은 둘째 아들이 잘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아쉽게도 방종한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종한 생활은 결국 둘째 아들을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재산을 탕진한 것은 물론 그 고장에 기근이 들어서 곤궁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살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됩니다. 특히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천해진 상황이라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극도로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은 두 갈래의 길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절망에 빠지거나 아니면 또 다시 일어서 보자는 희망적인 용기를 갖는 것…….

특히 절망에 빠진 사람은 자살하거나 인생을 포기하고 막가는 악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로 둘째 아들 역시 극도의 비참한 상태에서 절망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아버지 안에서 희망적인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둘째 아들과 같은 상황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강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망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만약 모르겠다면, 그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아까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 안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 조명연 신부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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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주는 복음 말씀 중에, 되찾은 아들의 비유만큼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한 복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복음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에 이 복음을 읽는 이유는 사순시기가 자신의 죄를 성찰하는 회개를 넘어서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는 시기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살고 있습니까?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능력만 믿고 자신의 윤리적, 종교적 완전성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큰아들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좌절과 실패를 거듭하고서야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탐욕을 깨닫고, 결국은 주님 은총과 자비에 기대는 작은 아들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큰아들은 자신이 매우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되풀이 되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자신의 죄를 통해 오히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 두 아들 중에 주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어쩌면 이 두 아들은 삶의 여정을 바라보는 우리 안에 내재된 두 가지 삶의 양식이 아닌지 성찰해 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눠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루카 15,11-13).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챙겨 자신이 누리고 싶은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바랐던 행복은 기대만큼 오래 가지 않습니다. 방종한 그의 생활은 그를 가장 낮은 삶의 처지로 몰락시키고 맙니다. 작은아들은 하도 배가 고파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고 복음은 전합니다(루카 15,16).
 
작은아들은 짐승 취급을 받는 처참한 상황까지 치달은 것도 괴롭지만, 그 보다 더 고통스런 일은 짐승이 먹는 그 가치 없는 것마저도 주지 않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작은아들은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고 삶에서 잊었던 아버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은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잊고 살았지만 아버지는 그를 바로 마중 나올 정도로 늘 그를 기억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일관되고 염려하는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의려지정(倚閭之精)이란 고사성어를 생각나게 합니다.
 
기댄다는 뜻의 '의'와 리마다 세운 문을 뜻하는 '려'를 사용해 부모의 정이란 대문에 기대서서 기다린다는 뜻에 비유하는 말입니다. 중국에 왕손가라는 사람의 어머니가 자식을 몹시 걱정하며 사랑하여 "네가 아침에 나가 늦게 돌아올 때면 나는 대문에 기대 네가 돌아오는지 바라보았고, 네가 저녁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마을 문 앞에 기대서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말에서 연유된 고사성어입니다.
 
주님이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 분이신지를 직접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유혹에서 얼마나 허우적대는지를 아시면서도 진정한 삶의 희망과 행복을 주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큰아들은 분개합니다(루카 15,29-30). 큰아들은 자비를 향한 연민보다는, 절제되고 통제된 삶속에서 사회적 체면과 의무감으로 살아 온 우리 마음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런 마음으로 모든 이를 판단한다면 다시 찾은 삶의 행복을 맛보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주님의 깊은 사랑과 자비로운 넓은 마음을 체험하려면 우리는 아버지의 말을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바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그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32).

▶ 홍승모 신부
  |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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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마구 졸라서, 큰 도시로 출세를 위해서 떠났다는 것은 그리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닌 듯 싶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잘 배우지도 못한 처지에 돈푼이나 가지고 서울로 왔다고 곧 출세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눈 뜨고도 코를 베어 간다는 서울로 왔는데 그 작은 아들의 생각처럼 일이 잘 풀렸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시골서 가지고 온 돈 모두 다 사기당하고 갈 데가 없었던 것이겠죠. 어쩔 수 없어서 머슴살이라도 하면서 살아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여 보았지만 살 수가 없었던 것이겠죠. 결국, 마지막에는 죽기 직전까지 몰리다 보니 부모님 생각이 났던 것이고, 한 때의 잘못을 반성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속상해도 보내지 말걸, 아들의 기를 꺾어서라도 농사나 짓게 할걸! 내 생각 잘못으로 아들 하나 잃어 버렸구나!’ 라고 후회하면서 매일매일 서쪽 하늘만 쳐다보던 그 아버지의 눈에 작은 아들이 보였던 것입니다. 측은한 생각과 반가운 생각이 뒤엉겨져 들뜬 기분에 힘을 다하여서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자신의 잘못이나 아들의 잘못 같은 것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새롭게 아들 하나를 얻은 기쁨에 온천지가 하얗게 보이고, 기쁨에 넘쳐 목욕을 시키고, 반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던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잘못했다는 소리 같은 것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리 집의 재산은 몽땅 내 것이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 큰 아들에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다. 적이 하나 생긴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몫을 다 가지고 떠난 동생이 돌아왔다고 잔치까지 벌이는 아버지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아버지를 보자마자 한꺼번에 투덜거림이 쏟아진 것입니다. 아버지 곁에서 묵묵히 하라는 대로 일을 하면서 아버지를 도와 준 자기에게 응당 보상이 돌아와야 하는데 자기 재산을 다 날리고 방탕한 생활까지 하였다고 생각한 자기 동생에게 보상이 주어지다니 화날 만도 한 일입니다.

정직한 사람들은 돈을 못 번다고들 하던데, 기득권층이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재산들이 많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니 한숨이 나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죽었던 네 동생이 살아왔으니 잃었던 동생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라는 구절을 마음에 새기면서 기득권의 권한을, 욕심들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면 좋지 않을까요?

인천교구 이성득 신부
  |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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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오늘 복음은 비유에 앞서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에 대한 대상을 먼저 제시합니다. 작은아들은 회개하여 돌아온 세리들과 죄인들을 말합니다. 큰아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이들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비유를 통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언뜻 보기에 작은아들만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말썽을 부린 아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각자 떨어져 있는 거리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작은아들은 집을 떠나 아버지의 눈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눈에 미치는 가까운 곳에 살았습니다. 둘 다 아버지의 눈에 미치는 곳에 살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와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가 없이 말입니다.

작은아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큰아들이 의외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큰아들은 재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산을 돌려드리고 아버지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아들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아버지와 친교 없이 종의 모습으로 섬기며 살았습니다(29절). 그 결과 되돌아온 작은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작은아들에 대해 서슴없이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복음은 이러한 두 아들의 모습을 대조하여 보여줌으로써 우리도 그들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위선적인 신앙인들의 돌처럼 굳은 마음을 힘차게 두드리고 있습니다.우리는 작은아들의 모습이든 큰아들의 모습이든 언제나 주님 앞에 회개하며 살아갈 사랑의 의무가 있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두 아들의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고 살아갈 때 하느님과 떨어져 단절된 삶을 살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두 아들의 모습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의인으로 참되게 인정해 주실 때까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의인이 되기를 희망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그에 필요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니 힘을 내어 일어나 의인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아버지께 청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 인천교구 나병식 대건 안드레아 신부 : 2016년 3월 6일
  |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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